[Review] 전대미문의 태양 살인범, 이방인 뫼르소를 연극으로 만나다 [공연]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이해주기를
글 입력 2024.09.05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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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거리를 비롯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을 밝힙니다.



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이해해 보고자 노력하는 집요한 과정 자체를 즐긴다.

 

어떠한 것보다도 복잡한 것은 인간이기에,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을 이해해 보고자 노력하는 끈질긴 과정이 나에겐 궁극의 도착지다.


그리고 도저히 이해가 어려운, 어느 누구에도 이해받지 못할 ‘이방인’에 대해서 나는 굉장한 흥미가 있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인> -어쩌면 <이방인>이라는 제목이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은 이해될 수 없는 인간, ‘뫼르소’의 삶을 그려낸다. 책을 여러 번 읽으면서 나는 뫼르소라는 인물에 대해 탐구했었다. 그는 태양이 뜨겁다는 이유로 총을 쏜 남자이기에 내 구미를 당기기엔 충분했다. 그에게 태양이란 무슨 의미일까, 그의 내면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그 정도로 나에게 뫼르소는 계속해서 ‘들여다보게 되는’ 인물이었고, 이러한 고민을 글을 써 남기기도 했었다.



*

소설 <이방인> 리뷰 1편 : 바로가기



뫼르소 단 한 사람을 중심으로 소설의 모든 내용이 전개되기 때문에, 뫼르소의 독백을 넣은 연극도 재밌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마침 극단 산울림이 6년 만에 연극 <이방인>을 상연한다고 하여 한달음에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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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산울림 프로덕션에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원작의 색과 예술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소설이 담고 있는 강렬한 이미지와 개성 있는 인물들, 극적인 사건들을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그 안에서 연극성을 극대화하여 독창적으로 재해석해 무대 위에서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했는데, 책과 비교하면서 연극을 향유하는 것도 하나의 관점 포인트가 될 것이라 무척 기대되었다.


예술감독이자 번역, 각색, 연출을 맡은 임수현 연출가는 “카뮈의 사상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 독백과 대화, 서술과 연극의 공존을 추구하며, 뫼르소의 시선으로 ‘이방인’의 세계를 무대 위에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전했다. 공연은 고전 문학을 어떻게 구성하고 어떻게 고전 문학만이 가진 힘을 드러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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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은 커다란 원형 판자를 두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 원형 판자 안에서 극을 전개한다. 바닷가 방파제를 거니는 듯한 느낌을 줄 때는 판자 위에 올라서서, 검사와 변호사가 대치할 때는 판자의 양 끝에 서서, 감옥에 간 뫼르소가 혼자 독백할 때는 원형 판자 가운데에 누워서 대사를 읊는다. 최대한 간소화된 투박한 무대가 오히려 ‘인물’에게만 극도로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주었다.


또한 필요시에는 소품을 곁들여 몰입을 더 했는데, 극은 관을 눕혀두고 뫼르소가 독백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십자가가 올려진 관 앞에 서서 <이방인>의 첫 줄을 읊었을 때, 그 전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둡고 컴컴한 조명이 관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을 때부터, 조명이 밝아지고 양로원 관리인이 나올 때까지 관객들은 숨죽인 채 배우들에게 완전히 집중했다. 소품과 조명을 적절히 사용해서 관객들로 하여금 공연 경험의 질을 높이고자 한 것이 느껴졌다.


이 외에도 자유분방한 캐릭터인 마리의 의상을 자주 교체하고, 레이몽이 친구 하자며 다가올 때 곁들일 와인을 준비하고, 개 짖는 소리나 파도가 모래사장에 부딪히는 소리, 쇠창살이 끼익하며 열리는 충격음 등을 함께 들려주었을 때 사소한 디테일도 놓치지 않았음이 더욱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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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을 처음 접한다면


 

소설은 흔히 ‘진입장벽’이 높다고 표현되는데, 나 역시 그에 동감한다.

 

<이방인>의 줄거리와 캐릭터들을 알아가기에 이번 연극은 더 할 나위 없이 적합하다. 어렵지 않게 <이방인>을 접하고,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충분한 공감을 끌어낼 만큼 탄탄하게 짜여진 시나리오였으니 말이다.


뫼르소라는 인물과 소설의 주제를 정의하기에는 상당히 까다롭고 실제로도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다만, 연극에서는 뫼르소라는 인물이 연극 전체를 끌고나가면서 실제로 뫼르소가 느꼈을 상황의 감정들을 풍부한 연기와 감정으로 표현해 주어 인물이 느꼈을 감정 자체에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뫼르소를 비로소 ‘이해’하려면


 

어쩌면 공연만으로는 뫼르소를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뫼르소는 지나가는 사람과 차의 경적을 듣고도 사색에 빠지는 사람으로, 자신의 생각과 감각으로 스스로를 거침없이 어지럽히는 인물이다. 피곤해하고, 귀찮아하고, 무신경한 인물이면서 그와 동시에 분초를 다투어 골몰한다. 이러한 부분이 책에서는 아주 상세하게 적혀 있어서, 뫼르소라는 독특한 인물을 더 이해하고 다가갈 수 있는 매개로 작용한다.


이를테면, 공연에서는 자칫 뫼르소가 다정하게 느껴질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레이몽을 위해 증인을 자처한다던가, 그와 와인을 마시며 친구가 되는 에피소드에서 아마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 뫼르소는 명확하게 선을 긋는데, 그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이러나 저러나’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지독히 무심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함께 포도주를 먹으면 구태여 요리하지 않아도 돼서, 레이몽의 증인을 해준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고 그에겐 이나 저나 마찬가지였기에 뫼르소는 레이몽의 제안과 부탁을 곧잘 승낙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레이몽으로 하여금 퍽 다정한 행동이 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뫼르소의 생각과 디테일이 책에는 잘 담겨 있어, 연극을 보기 전과 후에 소설을 읽는다면 <이방인>과 뫼르소의 매력에 푹 빠질 수 있으리라 장담한다. 공연을 통해서는 뫼르소의 ‘감정’에 집중할 수 있다면, 소설을 통해서는 뫼르소의 ‘생각’과 그가 가진 ‘이성’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다.

 

특히 책에 나와 있는 문장과 대사의 많은 부분이 연극에 그대로 구현되어 연극과 소설을 비교하고, 한편으론 연극의 섬세함에 감탄하며 볼 수 있는 재미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二人과 異人


 

소설을 읽었을 때, 나는 뫼르소를 二人 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옮긴이는 책의 1부와 2부가 평행선상에 놓여있다고 말했다. 정량적으로도 1부가 85쪽, 2부가 86쪽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1부 속 뫼르소는 육체적, 일상적 인간이었다면 2부의 뫼르소는 이성적, 영혼적 인간으로서 드러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고 해석했다.


난 소설을 읽고, 뫼르소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는 계기였다고 리뷰했었다.


 

뫼르소는 독방에서 치열하게 생각한다. 정교하게, 완전무결하게 제작된 기계장치를 피하고 싶어 하면서도, 단 한 번의 기회를 주길 바라면서도, 기계가 단 한 차례의 오차도 없이 작동하길 바라는 모순에 놓인 자신의 상황을 명철하게 파악한다. 그는 사형을 집행할 ‘그 사람들’이 오는 시간, 새벽을 두려워한다. 뫼르소는 밤마다 새벽을 기다리며 뜬눈으로 지새우고, 작은 소음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밤이 시작되려는 어느 날, 고동 소리가 울린다. 영원히 무관해져 버린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는, 고동 소리가 울렸다. 뫼르소는 오래간만에 어머니를 떠올린다. 그는 어머니가 다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느꼈을 것이며, 자신 역시 모든 걸 다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느낀다.


우리는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다. 그가 바랐던 것처럼, 완전무결한 기계장치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작동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뫼르소가 말했듯, 그는 다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음을 느꼈고, 이는 다른 차원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방아쇠일 것이다.

 

뫼르소는 재탄생했다. 그는 ‘마음의 문’을 열었고,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세계가 실은 자신과 비슷했음을 깨닫는다. 독방에 갇혀 하는 생각이라곤, 단두대를 피하는 방법뿐이었던 그는 결국 죽음을 받아들였고, 마침내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을 이해하게 되었다.

 

- <이방인> 리뷰 2 중에서

 

 

그러나 연극으로 보았을 때는 동일한 대목을 두고 뫼르소를 다르게 해석하게 되어서 스스로 놀라웠다. 배우들이 실제로 감정을 터뜨리는 부분과 그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일까?


난 뫼르소가 이방인으로 취급된 이유는 남들과는 다르게 인간으로서의 ‘의지’가 매우 강렬해서라고 느꼈다. 뫼르소가 분노와 울분을 느끼는 지점은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따른 결과가 아닌, 남들이 자신의 의지와 어긋나게 본인을 규정하고 본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지점이었다.


어머니가 죽음을 맞이하였을 때도, 태양이 뜨겁단 이유로 다섯 발의 총을 쏘았을 때도, 이로 인해 법정에 올랐을 때도 뫼르소는 항상 무심한 태도로 일관했다. 사형을 앞둔 처지임에도 될 대로 되란 식의 사고방식을 갖춘 극도로 결여된 인물로 표현된다.

 

다만, 뫼르소의 감정이 격하게 고조되어 소리치는 유일한 장면이 두 군데가 있다. 재판에서 변호사와 검사, 그리고 불려 온 증인들이 뫼르소가 어떠한 사람인지 정의하고 그의 행동 저의를 규정하려고 할 때와 신부가 죽음을 앞둔 뫼르소에게 하느님의 존재를 강요하고 본인의 의지에 대한 후회와 뉘우침을 강요했을 때다.


결국 뫼르소 입장에서는 사회가 정의하는 “인간다움”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인 것이고, 이러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잣대가 본인에게 들이밀어져서 사형까지 내몰리는 것이 사회에게 느끼는 부당함과 부조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연극을 보고 나서는 뫼르소가 죽음을 받아들인 방식이 또 다르게 해석되었다. 뫼르소는 이 부조리함과 이해할 수 없음에 납득하고 거짓으로라도 반성하거나 뉘우침을 연기하지 않았다(이 모습이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분통을 터뜨리도록 만드는 지점이 되었다).


뫼르소의 의지와 뫼르소가 가졌던 생각의 결말이 ‘사회에서의 죽음’이라면 오히려 그 죽음을 모두가 보고 환호하는 것이 자신의 마지막 기쁨이라고 받아들인 것으로 이해되었고, 난 여전히, 죽을 때까지, 뫼르소가 본인이 속한 사회와 시대 속의 규정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로, 뫼르소가 가진 異人의 세계가 닫히지 않은 채로 그대로 종결만 되었을 뿐이라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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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인물과 에피소드를 두고도, 다른 해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소설과 연극이 저마다 다른 개성을 가졌기 때문일 테다. 앞서 산울림 프로덕션에서는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그 안에서 연극성을 극대화하여 독창적으로 재해석해 무대 위에서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말했는데, 소설과 연극을 모두 감상한 내가 완전히 다른 포인트로 뫼르소를 해석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이번 연극은 성공적인 것 같다.


또 이러한 다양한 해석이 궁극적으로는 이방인이자, 이인 뫼르소를 비로소 이해하는 궤적이 되리라 확신한다.

 


[권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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