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피에타 - 성녀 이전에 어머니 마리아를 이해하기 [공연]

글 입력 2024.03.23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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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onodrama_ 오롯이 마리아를 비추는


 

피에타.jpg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하는 뮤지컬 피에타는 70분 동안 마리아 역의 배우가 혼자서 연기하는 모노드라마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아기와 놀아주고 대화하는 첫 장면에서부터 허공에 대고 마치 아기가 있는 듯 연기하는 마리아의 모습이 나온다. 관객들은 오직 마리아의 목소리와 몸짓으로 아기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작품은 굉장히 긴 세월을 다루고 있다. 예수의 아기 시절부터, 범상치 않았던 소년기,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 목소리를 드높였던 청년기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최후까지의 시간을 다루고 있으며 그 시간 속의 마리아를 담담히 따라간다. 그 긴 시간 동안의 마리아를 지켜보는 관객들은 어쩌면 처음으로, 우리가 지금껏 집중해 왔던 예수가 아닌, 마리아에게 집중하게 되고 자신만의 아이를 상상하게 되면서 어머니로서의 마리아에게 이입하게 된다.


특히 본격적으로 감정이 고조되기 전, 관객석 쪽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며 아기로 하여금 관객에게 인사하게끔 하고, 마치 아기가 있는 것처럼 관객들에게 악수하게끔 하는 연출이 존재했다. 해당 연출을 관객들은 익살스럽게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마리아가 묘사하는 사랑스러운 아이를 상상하게 되면서 마치 지금, 이 순간 예수의 어머니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뮤지컬 피에타는 모노드라마의 형식을 빌려와,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화려한 스토리 구성이 아닌 마리아 단 한 사람에게 집중하게 만들어 마치 그녀가 된 듯한 느낌을 받게 하는 작품이다.

 

 

 

2. 성녀 마리아이기 이전에, 어머니 마리아


 

피에타라고 하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못 박혀 죽은 아들의 주검을 안고 알 수 없는 처연한 표정을 하는 마리아의 모습. 해당 조각은 사실 90도 각도에서 위에서 아래로 바라보았을 때 가장 이상적인 신체 비율의 모습으로 보이도록 만들어졌다고 한다. 즉, 신의 시각에서 바라보았을 때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의도한 작품이라는 뜻이며, 두 모자의 모습을 보다 신앙적 관점에서 해석한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다.


피에타, 라는 단어의 뜻이 무엇일까까. Pietà. 이탈리아어로 연민, 자비, 동정심 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한국어로 완벽히 번역하기는 힘든, 이탈리아만의 정서를 표현한 단어이며 신에 대한 경외감, 죽음에 대한 동정과 친족에 대한 사랑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다고.


정리해 보자면, 뮤지컬 피에타를 보기 전 관객들의 뇌리에 가장 익숙하게 존재했을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피에타는 아들의 죽음에 대한 연민과 신에 대한 경외감이 복잡하게 뒤섞여있지만 결국 처연하게 그 죽음을 받아들이고 신의 아들로서 부름을 받은 예수로서 바라보는 작품이라 해석 가능하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적어도 나는, 지금껏 마리아를 한 인간,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로 보기보다는 이처럼 달관한 성녀로서 바라보아왔던 것 같다.


하지만 뮤지컬 피에타의 마리아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연극에서 마리아가 아들을 부를 때 한 번도 ‘예수’라고 부르지 않았다. 항상 우리 아들, 이라고 지칭했으며 마리아가 예수의 죽음 직전 차마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입을 벙긋대며 부르짖을 때야 관객들은 그 입 모양에서 “예수”라는 이름을 읽을 수 있었다. 극 속 마리아에게 그녀의 아들은 성인 ‘예수’이기 보다는 나의 사랑스러운 ‘자식’으로서 존재한 것으로 보였다.


마리아는 그의 아들이 어릴 땐 건강하게 자라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건장한 남자로 성장하기를 바랬고, 아들이 성인이 되고 나서 결혼을 하지 않자 여느 한국 어머니와 다를 바 없이 ‘어휴, 우리 아들이 결혼을 안 하니 참 큰일이에요.’라는 아쉬움을 관객들에게 토로하며 웃음을 산다. 그리고 아들이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오자 ‘결혼식 잔치 대신이다’라며 집에 있던 보릿가루를 탈탈 털어 보리빵을 한가득 만들어 잔치한다. 관객들에게 또다시 말을 걸며 빵을 나눠주기도 한다.


이처럼 생활인의 감각이 묻어나는 마리아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그녀를 ‘성녀 마리아’로 보는 게 아니라 평범한 ‘어머니’로 바라보게 된다. (실제로 예수와 마찬가지로, 마리아의 이름이 극 중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피에타, 라는 제목을 통해서 이 모든 것을 유추할 뿐)그렇기에 우리는 마지막 장면, 예수가 박해받고 모진 매질에 살이 너덜너덜해진 채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올라갈 때, 그리고 끝끝내 못 박혀 죽음을 맏이가 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하는 마리아를, 으레 묘사되는 ‘성녀 마리아’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어머니 마리아’의 입장에서 이입해 보게 되는 것이다. 내 아들이 핏줄기를 흘리며 가련히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 성인의 탄생과 부활이 아닌, 내 아들의 죽음을 목도하고 그 주검을 수습해 두 팔로 끌어안는 비극의 순간을 쓸쓸히 맞이하는 마리아와, 그리고 우리.

 

 

 

3. 연극이 끝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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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에 있는 카페에서 맛있는 디저트를 먹으며 오래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같이 연극을 보러 간 친구와 연극이 끝난 후 오랫동안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종교와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는 친구였고, 그녀는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를 안아 든 마지막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해 보고자 노력했으나 끝끝내 어머니가 된 나 자신을 상상할 수 없었던 나는 오래오래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며, 자식에 대한 사랑과 믿음, 종교에 대해 생각했다.


앞서 말했듯 이 작품은 70분의 시간 중 거의 대부분을 성녀 마리아라기보다는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에 초점을 맞춰 보여준다. 그러나 최후의 장면 속 마리아는 두 가지 모습을 모두 보여준다. 사랑하는 자기 아들을 잃어 절망적이지만, 동시에 신의 아들이기도 한 그를 신과 세상을 위해 다시 겸허히 보내는 모습. 그 마지막 모습에서 우리는 비극과 동시에 새로운 ‘믿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뮤지컬 피에타는 종교적 색채가 많이 드러나지는 않는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해당 소재 자체가 함의하는 종교적 시사점이 크기에 그 믿음, 에 대해서도 우리는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절망의 순간에서도 무엇인가를 믿을 수밖에 없는, 혹은 믿을 수 있는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서.


이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종교와 믿음이 존재한다. 그것들에 대해서 논의하다 보면 끝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아주오래전부터 교가 존재해 왔고, 2024년인 현재까지도 종교의 탄생에 대한 뮤지컬이 동양의 조그만 나라 한국에서 창작되어 상연되고 향유되고 있다. 이를 가능케 한 일종의 동력은, 역시나 삶이라는 알 수 없는 무엇인가에 내던져진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런데도 비극의 구렁텅이에서 삶을 끝내지 않고 무엇인가를 간절히 믿으며 주어진 생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일종의 아름다운 본능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을까. 마리아의 슬프고도 처연한 마지막 몸짓에서, 비극과 동시에 관객들에게 보여준 아름다운 희망과 믿음의 메시지가 있었던 것 같다고, 아직 삶에 대해서 갈피를 잡지 못한 20대 초반의 우리들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던 것이다.



[김정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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