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무고한 이들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것 [영화]

글 입력 2024.03.13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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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1년 중 가장 설레는 때는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이다. 3월에 있을 아카데미 시상식과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된 작품들이 많이 공개되기 때문이다.

 

현재 영화관에서 상영 중인 <가여운 것들>, <바튼 아카데미>, <추락의 해부>, <패스트 라이브즈>, <메이 디셈버> 등의 다양한 작품들이 있지만 내가 주목했던 것은 촬영상 후보에 오른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공작>(파블로 라라인, 2023)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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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랑스 보육원에서 자란 클로드 피노슈는 루이 16세 때 장교로 지내다 왕권에 저항하는 혁명이 발생하자 왕을 배신한다. 참수된 루이 16세를 본 이후 죽음을 위장하고 프랑스를 떠나 모든 혁명에 맞서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라는 이름으로 칠레의 총사령관이 된다.

 

절대 권력에 오르고 백만장자가 됐지만 범죄와 부패 혐의를 피하고자 다시 죽음을 위장한다. 칠레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여기서 눈치챘겠지만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1974년부터 1990년까지 '피의 독재'를 했다고 불리는 칠레의 군부 독재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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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귀라는 소재와 호러라는 장르로 무시무시한 서스펜스를 기대한다면 그런 영화는 아니다. 역사적인 지식이 있어야 더 많이 보이는 전기 영화이며 흑백 화면과 함께 잔잔한 흐름을 유지한다.

 

아버지의 죽음을 앞두고 강압적인 독재와 무차별적인 학살로 축적한 유산에 더 집착하는 5명의 자식과 이를 기력 없이 지켜보는 늙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모습은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블랙코미디다.


"살아남기 위해 피를 마시다니 끔찍한 희생이겠네요."

 

특히 그저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이들의 심장을 파먹으며 피를 빨아 먹고 살아가는 흡혈귀를 묘사한 장면들을 시각적으로 잔인하게 보여줌으로써 무고한 민중들을 죽여서 살아가는 독재자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흡혈귀인 독재자일까, 독재자인 흡혈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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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의 망토 대신 펄럭이는 군 장교의 코트가 돋보이고, 하늘을 유영하며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마치 모두의 위에 있는 듯한 장면은 익스트림 롱 샷으로 표현되었다.

 

영화 초반부터 알 수 없는 여성의 나레이션은 마지막에서야 '철의 여인'으로 불리던 영국 여성 총리 마가렛 대처였음이 드러났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와 마가렛 대처의 관계를 흡혈귀인 엄마와 아들이라는 설정을 한 것이 굉장히 기발했다. 영화는 창의적인 비유와 남들이 생각해 보지 않은 참신한 방식으로 이야기들을 연결하기 때문에 예술로 분류되는 것 같다.

 

<공작>은 흑백 영화를 선택하여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나레이션을 더 해 옛날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영화는 내내 과거에 대해서 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다시 피를 마시고 어린아이로 돌아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모습과 함께 현대 사회가 배경인 컬러 영화로 전환된다. 적절한 흑백의 사용과 컬러로의 전환을 통해 오랜 악은 마치 흡혈귀처럼 죽지 않고 현재에도 잔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우리 사회에서 무고한 이들의 희생으로 삶을 이어나가는 흡혈귀 같은 존재는 무엇일까, 죽지도 않고 부를 자식들에게 물려주며 또다시 모습을 바꿔 살아가는 흡혈귀. 몇 세대에 걸쳐 사라지지도 않고 계속되는 것은 그것이 흡혈귀이기 때문은 아닐까.

 

 

[이유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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