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진실과 회복

글 입력 2024.03.07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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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을 위한 정의


트라우마 연구의 세계적 거장 허먼의

'트라우마' 3부작 완결판

 

 

[진실과 회복]에서 허먼은 트라우마 치료와 연구의 가장 중요한 목적인 회복이라는 근본적 문제를 조명한다.

 

생존자가 공동체와 일상으로 복귀하게 될 때 트라우마를 야기했던 환경이 여전하다면 돌아간 공동체에서 생존자는 어떻게 회복을 해나갈 수 있을까? 생존자의 트라우마 회복을 위해 우리, 즉 공동체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허먼은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회복의 궁극적 단계로서 정의 실현과 공동체의 지지라는 주제를 이끌어낸다. 구체적으로는 철학, 사회과학, 역사, 법, 심리학, 정신의학 등 폭넓은 연구 자료를 토대로, 그리고 무엇보다 다양한 생존자들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내세워, 생존자들의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정의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존자들의 기대가 실제로 고려된다면 트라우마 생존자의 회복을 대하는 우리 공동체의 모습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지 감동적으로 그려나간다.

 

이 책은 가정 폭력, 성폭력, 아동 학대를 당한 이들의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현장에서 시작되었다. 50년 넘는 세월 동안 트라우마를 치료하고 연구해온 허먼에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다음에는?" 폭력이라는 근원적 불의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생존자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트라우마는 궁극적으로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

 

허먼은 정의의 문제를 떠올린다. 트라우마가 권력관계에 바탕을 둔 사회문제인 만큼 회복 역시 사회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고, 트라우마 장애가 힘을 빼앗긴 이들의 질병인 만큼 회복의 원리는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더 넓은 공동체 차원에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뜻으로, 허먼에게 이 조치는 공동체 안에서의 정의 실현이라는 언어로 요약된다. 이는 앞선 저작들에서 보여준 것보다 더 급진적인 문제의식이다. 첫 번째 책 [근친 성폭력, 감춰진 진실]에서 친족 성폭력이라는 현실을 증언하는 생존자들을 뒷받침하고 두 번째 책 [트라우마]에서 생존자의 진실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과정을 설명했다면, 세 번째 책 [진실과 회복]에서는 회복의 궁극적 과정으로서 정의와 공동체의 문제를 내세우며 한 단계 더 진전된 통찰을 보여준 것이다. 요컨대 폭력 경험을 트라우마화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굴욕감과 방치감, 버림받은 듯한 느낌을 치유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 정의다.

 

나아가 이 책은 정의의 모습을 가장 잘 아는 것이 회복의 과정을 거친 생존자들이라고 강조한다. 이에 따라 허먼은 생존자들을 직접 만나 그 자신들에게 저질러진 일을 바로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존자들에게 정의란 무엇인지, 이들의 생각을 토대로 공동체가 바뀐다면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지 그 비전을 묻는다. 정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나아가는 길에 폭력 피해 생존자들이 앞장설 수 있다는 것은 인터뷰에 응했던 세라의 이야기가 잘 보여준다. 세라는 전 남자 친구로부터 끔찍한 폭행을 당한 생존자다. 범인은 곧바로 체포되어 재판받은 뒤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사건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범인의 부모는 가해자 지원 본부를 꾸려 변호사 선임비를 후원받고 범인의 "훌륭한 인격"을 증언하는 편지 쓰기 캠페인을 벌였다. 이에 세라는 언론을 통해 자신이 폭력의 피해자임을 밝혔지만 이 같은 행동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세라는 자신이 삭제당했다고 느꼈고, 가해자뿐 아니라 공동체의 방관과 침묵이 강간 문화를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세라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해주고 세라를 지지해준 또 다른 많은 생존자들이 있었다. 이들 모두에게는 가해자에 대한 법적 처벌만큼 성폭력에 대한 사람들의 공개적 인정이 중요했다. 세라는 성폭력 실상의 공개적 인정을 가능하게 만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성폭행 생존자 기념비'를 세우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마침내 미국의 한 공원에 성폭행 생존자 기념비가 세워지게 된다.

 

공개적 인정은 생존자 정의 실현에 필수적이다. 생존자와 공동체의 깨진 관계를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기념비는 공개적 인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기념비는 생존자의 권리를 공개적으로 옹호하고 남성 우월주의의 특권 의식들에 도전하며, 은폐되어 있던 잘못들의 공개적 인정은 정의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이 기념비의 건립 스토리는 생존자들의 용기와 회복에 대한 희망을 주지만, 이와 대비되었던 주변의 침묵과 외면은 생존자에 대한 공개적 인정이라는 정의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 현실을 잘 보여준다. 허먼은 세라의 이야기를 통해 생존자의 회복을 위해 더 나은 무언가를 모색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이를 폭력적 관계와 그렇지 않은 관계에 대한 이론, 생존자의 목소리를 통해 듣는 정의에 대한 비전, 치유의 구체적 양상으로 구조화시켜 조목조목 살펴나간다.

 

 

 

폭력에 대한 이론부터 회복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가해자에 대한 가십과 처벌이 아닌 생존자 중심의 회복에 대해 논하다


 

이 책은 총 3부로 되어 있다. [1부 권력]에서는 이 책의 바탕이 되는 이론, 즉 정의는 권력이 어떻게 조직되는지에 달려 있다는 이론을 펼친다. [1장 독재의 규칙]과 [2장 평등의 규칙]에서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두 가지 유형의 권력관계, 곧 지배·종속 기반의 권력관계와 호혜·상생 기반의 권력관계를 대조한다. 전자는 독재의 원형이고 후자는 평등의 원형이다. [3장 가부장제]에서는 폭력의 규칙들과 수법들이 사회관계들의 조직 속에 어떻게 그렇게 깊이 뿌리박혀 있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전 세계적인 가부장제 헤게모니를 탐색한다.

 

[2부 정의의 비전]에서는 인터뷰에 나서준 생존자들의 증언으로부터 그려낸 정의의 비전들을 상세하게 논의한다. [4장 인정]에서는 진실에 대한 공개적 인정이 정의의 출발점이어야 함을 말한다. 저자가 이 책에서 인터뷰한 모든 생존자는 다른 무엇보다 진실을 인정받고 정당성을 입증받기를 바랐다. [5장 사죄]에서는 가해자 처벌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생존자의 피해를 복구하고 저질러진 잘못들을 시정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정의의 비전을 논의한다. 가해자가 가해 사실을 인정했다면, 손상된 관계를 바로잡기 위한 첫걸음은 사죄다. [6장 책임지기]에서는 가해자에게 책임을 지게 한다는 것이 무엇일지 그 비전들을 탐색한다. 이때 저자는 생존자 중심의 회복적 정의 운동의 이론들과 실천들을 검토하면서 그 가능성과 한계를 고려한다. 생존자에게 정의란 공동체가 가해자와의 공모를 중단하는 일이므로, 생존자가 중심에 있는 회복적 정의란 가해자에게 명확한 책임을 묻고, 가해를 야기한 가해자의 태도를 바꾸려고 노력하며, 가해자와 공모한 사회문화 관습을 전환하는 방식으로 생존자와 공동체가 통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3부 치유]에서는 정의가 피해자를 치유할 뿐 아니라 가해자와 사회 전반을 치유할 수 있다는 논의를 더 발전시킨다. [7장 배상]에서는 배상 문제를 탐색한다. 허먼은 이 장에서 생존자 개인에 대한 금전배상이라는 기존 개념에서의 탐색을 시작으로, 법 집행의 영역 내부에서 실질적인 보상을 창출하려면 어떠한 유형의 공동체 조직이 필요할 것인지를 고려할 수 있도록 프레임을 확장한다. [8장 재활]과 [9장 예방]에서는 공동체 안전을 해치지 않으면서 가해자를 공동체에 복귀하게 만들 대안적 방법들을 찾고, 어떻게 해야 피해를 예방할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상상한다. 마지막 장인 [결론: 가장 오래 걸리는 혁명]에서 저자는 2020년에 성폭력 생존자들이 발표한 [생존자 의제]를 제시한다. [생존자 의제]는 공동체의 쇄신, 남성 중심주의를 미화하는 문화의 변혁, 교육에 대한 공동체 투자를 확고히 단행하자고 주장하는 정의에 대한 청사진이다.

 

 

 

트라우마 연구 50년의 결실, 회복을 위한 가장 급진적인 요청

가해자와 공모를 중단하는 윤리 공동체의 비전을 그리다


 

허먼은 생존자의 직접적인 목소리가 담긴 [생존자 의제]를 통해 정의의 비전을 그려낸다. 구체적으로는 생존자의 회복을 촉진하는 인정, 용서와 화해, 배상과 재활이 정의의 이름 안에서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를 살핀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생존자를 다시 한번 궁지로 내모는 우리 사회의 문화와 관습에 초점을 맞춘다. 현실을 보자면, 우리 사회의 문화와 관습은 독재/폭력의 규칙을 수행하고, 공동체는 알게 모르게 가해자를 방관하거나 가해자와 공모한다. 이렇게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데 실패한 공동체는 생존자에게 더 큰 트라우마를 야기한다. 이런 지금의 공동체는 쇄신되어야 한다.

 

생존자가 돌아가야 할 공동체는 가해와의 공모를 중단하고 생존자의 분노를 나누며 고통을 존중하고 생존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공동체다. 허먼은 이를 윤리 공동체라 명명한다. 여전히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게 공감하는 분위기가 만연한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비전이다. 더불어 허먼은 우리에게는 가해자에 대한 처벌보다 생존자의 회복에 중점을 두는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지금의 우리 현실을 성찰하도록 이끈다. 진실 규명 과정에서 정치적 권력 다툼으로 지연과 번복을 거듭하고 생존자의 회복을 외면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 성폭력 피해자들의 증언이라는 작지만 단단한 목소리에 가해지는 거대한 백래시, 피해자의 목소리보다는 가해자의 변명이 가십이 되는 우리 사회에서 생존자 중심의 정의는 어떤 모습일 수 있을까. 이 책은 우리 사회의 정의에 대한 논의를 촉진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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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루이스 허먼(Judith Lewis Herman, 1942~ ). 미국 하버드대학 의과대학 정신의학과 교수. 트라우마 치료 및 연구 분야의 세계적 거장으로 손꼽힌다. 하버드대학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보스턴대학 의료 센터에서 일반 및 공동체 정신의학 수련을 받았다. 이후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 헬스 얼라이언스에서 '폭력 피해자 프로그램'을 공동으로 설립해 30년 넘게 책임자로 일한 한편, 매사추세츠주 서머빌에서 '여성 정신 건강 모임'을 공동으로 창설했다. 1984년 구겐하임 펠로십, 1996년 국제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주관 평생 공로상, 2000년 미국여성의사협회 주관 여성 과학자상을 수상했으며, 2003년 미국 정신의학회 석학 회원으로 선정되었다. 저서로 가족 내 성폭력 피해와 그 트라우마에 대해 연구한 [근친 성폭력, 감춰진 진실], 트라우마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당사자 치료를 다룬 [트라우마] 등이 있다.

 

[진실과 회복]은 허먼의 '트라우마 연구' 3부작 중 대미를 장식하는 역작으로, 출간 뒤 수많은 학자, 활동가, 생존자 들의 찬사를 받았다. 이 책은 트라우마 회복에 필요한 마지막 요소로서 사회적 역할을 조명하면서, 트라우마 회복을 위해서는 공동체 차원에서의 진실 인정과 정의 바로 세우기가 필수적이라고 역설한다. 책 속에서 허먼은 생존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폭력 피해 생존자들이 사회의 혁신적 조치들을 통해 생존자 정의를 획득하는 희망적인 회복 과정을 보여준다. 

 

 

[박형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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