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달디달고, 달디단, 죽음 - 연극 비Bea

죽음은 달콤하니까
글 입력 2024.03.04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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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날 죽여줘서 고마워


 

 

떠나는 길에 네가 내게 말했지

너는 바라는 게 너무나 많아


아냐, 내가 늘 바란 건 하나야

한 개뿐이야, 달디단, 밤양갱

 

달디달고, 달디달고, 달디단, 밤양갱, 밤양갱

내가 먹고 싶었던 건, 달디단, 밤양갱, 밤양갱이야

 

BIBI - 밤양갱

 

 

주인공 비(Bee)는 '밤양갱'을 부른 가수 비비(BiBi)처럼, 죽음을 노래한다. 가사에서 밤양갱을 '죽음'으로 바꾸면 본 극의 주제곡으로 써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극의 초반부터 후반까지 비는 자신이 원하는 건 오직 죽음뿐이라며, 고집스럽지만 담담하고 순수하게 죽음을 외친다.


내가 비라도 죽고 싶겠다. 비는 무려 8년이나 침상 생활을 했다. 만성 체력 저하증이라는 원인 모를 병으로, 온종일 침대에 누워있는 것도 지겨울만도 하다. 하루 8시간 좁은 사무실에 있는 것도 답답한데, 8년 동안 다리만 겨우 뻗을 수 있는 침대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삶은 얼마나 비참할지.


결국 비는 불효녀가 되기로 결심한다. 세상에 이런 파렴치한 불효녀가 또 있을까. 비는 엄마에게 살인을 요구한다. 자신을 죽여달라고 간청한다. 이 지긋지긋한 파리목숨을 이제는 끊어달라며, 목숨보다도 소중한 자신 딸의 목숨을 직접 거두어 달라고 한다.  


비의 엄마, 캐서린의 심정을 어땠을까? 감히 상상할 수 없지만, 자식이 없는 나는 소중한 반려견 쫑이를 떠올려보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작은 생명체가 눈앞에서 사라질 생각을 하니 억장이 무너졌다. 하다못해 반려견도 이런데, 자식을 해한다면 아마 평생을 죄책감에 몸부림치다 숨질 것이다.


비가 아무리 스스로 원했더라도 죽음을 택하는 건 옳지 않다.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돈도 사랑도, 하다못해 죽음도 마찬가지다.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을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생은 끝내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퇴장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다. 우리는 끝까지 살아 낼 의무가 있다. 나를 위해서도,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렇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엄마는 자식을 위해 못할 짓이 없다. 인간은 본디 누군가를 해치거나 죽여서는 안 되지만, 엄마는 자식의 죽여달라는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기에, 결국 캐서린은 비의 죽음에 가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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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ㄷㅁㅇ이어도 괜찮아



비가 죽음을 맞이하기 전, 바짝 메마른 비의 일상에 단비같이 촉촉하게 찾아온 친구 레이가 있다. 레이는 비의 도우미로 일하며, 비의 내밀한 영혼의 짝꿍이 되어준다. 레이는 비의 죽음을 요청하는 편지를 캐서린에게 건네며, 본인이 더 큰 죄책감을 느끼는 감도 높은 인물이다. 레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우리는 모두 마음맹인이야"


맹인은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컴맹이 컴퓨터를 모르는 것처럼, 마음맹인은 상대방의 마음을 모른다. 레이의 말처럼 우리는 정말 마음맹인인걸까?


공감은 타인을 이해해서 '같은 마음'을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공감이란 허상에 가까울 지 모른다. 인간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상대방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한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타인의' 아픔인 것이다. 나의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팝콘을 먹으며 바깥을 빼꼼히 넘어다보는 정도다. 인격에 따라 팝콘은 먹지 않거나 숨길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겪지 않은 일을 공감하는 '척'은 가능해도, 진정한 공감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 영원히 동떨어진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할까? 아무도 내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차라리 벽을 보고 얘기하는 게 낫겠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나눈다. 


귀기울여 들여주는 것이 아무래도 공감의 최선이다. 나는 타인이 될 수 없고, 타인도 내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잠시라도 상대의 입장이 되어보려는 노력, 이야기를 듣는 순간만이라도 상대를 헤아리려는 노력이 '공감'을 만든다.


죽음을 부탁한 비, 살인 요청에 응한 캐서린, 그 사이를 부드럽게 윤활유 역할을 하는 레이. 이들 모두 자신만의 아픈 서사가 있다. 아무리 가까운 모녀사이여도, 영혼의 단짝친구여도 서로의 깊은 마음까지는 닿지 못한다. 아픔은 여전히 나의 아픔이 아닌 상대의 아픔이니까.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마음맹인이다. 마음맹인이어도 괜찮다. 

 

 

[한대성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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