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K-발레를 이끄는 유니버설발레단의 가장 한국적인 멋을 담은 공연 - 코리아 이모션 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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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발레는 나에게 어릴적 로망이 담긴 공연이다. 어린 시절 엄마는 항상 내 손을 잡고 대학로 소극장 공연, 각종 재단에서 진행되는 무료 공연들을 부지런히 보여주셨는데 그 중에서도 나의 기억 한 구석에 강렬히 빛나고 있는 ‘호두깎이 인형’ 발레 공연에서의 황홀했던 경험이 나를 이번 공연으로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마치 입체 동화처럼 동화 속에서만 보던 장면이 무대에서 살아 움직였을 때, 그러니까 캔디로 만든 강에서 눈꽃처럼 하얀 깃털 장식 같은 발레복을 입은 무용수들이 날개 짓을 할 때 어린 나의 마음은 온통 그 장면에 빼앗겨 버렸고, 그날 이후로 나는 집에 돌아와 호두깎이 인형 동화책을 닳고 헤질 때까지 읽으며 그 장면을, 무대를 곱씹고 되새김질했다.
그때부터 정말로 신기했다. 여태껏 보았던 다른 공연들처럼 별다른 대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몸짓과 음악, 무대 표현 만으로 어떻게 그토록 어렸던 나를 포함한 아이들의 마음을 홀라당 가져가 버릴 정도의 몰입을 이끌어 낼 수 있었을까? 그때 내가 본 것은 그저 환상 속 신기루였을까?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무지한 내가 용기를 내어 유니버설 발레단의 40주년 공연이 이루어지는 그 현장으로 향했던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감정, 정(精)을 K-발레로 표현한다
이번 공연은 전통 발레와는 확연히 다르다. 클래식 음악이 아닌 국악에 맞춰 전통 한복을 계량한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이 한국의 정서를 발레 동작으로 표현한다. 유니버설 발레단의 그간 창작 역량이 집약된 만큼 공연은 ‘희로애락’을 모두 포함한, 한국인인 나도 적절히 표현하기 어려운 ‘정’이라는 감정을 절묘한 동작과 무대 표현을 통해 선보이며 80분 가량의 시간 동안 무대에서 한 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하늘을 향해 펼치는 발레, 내면으로 모으는 한국 무용이 가지는 상반되는 두가지 매력을 이번 공연에서는 농밀한 조화를 통해 담고 있다. 저 높이 손을 뻗고 남자 무용수는 여성 무용수를 들어 올리며 한껏 펼치는 동작을 하다 가도 그 손짓과 몸짓을 이내 안쪽으로 감아내며 절절한 감정을 표현한다. 그 누구보다 화려하게 빛나지만, 고고하게 고정된 바른 자세는 단아함을 잃지 않는다.
공연의 서막을 여는 <동해 랩소디>에서 16인의 무용수들이 등장하여 보여주는 군무는 가히 이 훌륭한 공연의 첫 선을 관람객들에게 보이는 만큼 한국의 ‘흥’을 남-남, 여-여의 환상적인 조합을 통해 이끌어 내고 있었다. 남녀가 함께 짝을 이루어 추는 군무를 익히 보아왔던 내게 남남 여여 군무가 정말 신선하게 다가왔는데, 여자 무용수들의 화려한 곡선을 보이는 동작과, 이어지는 남자 무용수들의 간결하고도 담백한 직선적 동작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장관을 선사한다.
4인의 여성 무용가들이 함께한 <달빛 유희>는 가히 이번 공연에서 활용된 개량 한복 의상의 멋을 제대로 보여준 무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야금과 아쟁의 절절한 선율 속에서 4인의 무용수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내듯 때로는 격정적이게 감정을 표출하고, 또 때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그것을 숨기고 절제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들의 몸짓에 따라 마치 꽃잎처럼 펼쳐졌다가 다시 꽃이 오므라들 듯 사그라지는 치맛자락이 정말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가 하면 남자 무용수들이 주축이 되어 이루는 무대는 또 어떠하던가. 남성 4인조로 이루어져 진행된 <찬비가>는 평양 기녀의 심성을 풀어낸 가락에 남성 무용수들의 파워풀한 몸짓이 합쳐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장면을 구성한다. 휘날리는 도포자락, 가락에 맞춰 펼치고 접는 부채의 둥근 면이 무용수들의 날카로운 동작을 융화시키며 신선한 ‘미(美)’의 형상을 보여준다.
앞선 무대에서 선보인 부부간의, 자매 간의, 형제 간의 애정, 한국의 흥과 얼 등 모든 ‘한국적 감정(코리아 이모션)’은 피날레 무대 <강원, 정선 아리랑> 속에서 대향연을 이룬다. 국악, 성악, 클래식과 발레가 한 데 어우러진 이 무대는 그 각각의 요소가 자신의 매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조화롭게 어우러져 유니버설 발레단만이 할 수 있는 K-발레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적절한 조명과 미디어 아트를 통해 장면을 연출하다
전통 한복을 계량한 의상과 더불어 이번 공연을 성공적으로 이끈 요소를 한 가지 더 꼽자면, 그것은 단연 무대 연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사실, 처음 극장 안으로 들어섰을 때 어떤 무대보다 ‘나는 프로시니엄이다!’라고 외치고 있는 듯 용포를 연상케 하며 굳게 닫힌 막이 내린 무대를 보았을 때 어떻게 이토록 고전적인 무대로 ‘한국의 정’이라는 복합적 주제를 풀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앞섰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나의 첫인상과 완전히 상반되게도 이번 공연에서는 어떠한 소품도 없이 오로지 조명과 미디어 아트 만으로 무대가 꾸려졌는데, 그것이 정말 무용수들의 몸짓과 농밀하게 어우러지며 이번 공연의 주제를 너무나 잘 드러내 주었던 것 같다.
특히 <달빛 유희>에서 4인의 여인 각각에게 떨어지는 조명이 각진 사각형을 만들며 그들 각각의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어느새 합쳐져 원을 이루고 밝아지며 차가운 달빛 아래 선보이는 그들의 군무를 보여줄 때, 조명의 활용을 통해 이토록 자연스러운 장면을 구성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장면의 말미에 무용수들이 한 명씩 조명이 비치지 않는 어두운 곳으로 나아가 스스스로 달빛 아래 적막한 풍경 속 그림자가 되어 사라지는 연출도 정말 인상 깊었다.
조명 뿐 아니라 바닥과 벽면, 그리고 병풍처럼 설치된 무대 위 구조물에까지 투영되며 장면의 배경을 구성한 미디어아트 또한 훌륭히 구현되었는데, <찬비가>의 찬란한 도시의 야경이 차가운 빗발처럼 얼어붙은 여인의 마음에 대한 남성 무용수들의 절절한 몸짓과 대비를 이루며 그들의 쓸쓸한 정취를 더해주었고, 사별한 부부간의 애절한 정을 담은 <미리내길>과 <달빛 영>의 장면은 적막한 밤하늘 속 홀로 빛나는 보름달을 표현한 무대 연출이 있었기에 더욱 빛났다.
[박다온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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