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죽어 마땅한 삶이 존재하는가 - 원도

글 입력 2024.04.18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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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 작가의 대표작 <구의 증명> 이전에 나왔던 책인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가 <원도>라는 이름으로 새로 나왔다. 11년 만의 개정판이다. 원도는 주인공 이름이자, 초고의 파일명이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함축적으로 요약하는 문장은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이고, 이 책 자체는 ‘원도’인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 초판에서는 그 책 전체를 요약한 <상실의 시대>로 제목을 가졌다가, 최근 개정판에서 다시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을 찾은 것처럼, 명작의 귀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컴팩트한 개정



초판을 개정판과 비교하며 훑어보았다. 전반적으로 초판의 덜어내기와 다듬기가 개정판인 것 같다. 우선 문장이 훨씬 다듬어졌다.


 

어쩌다 보니 (모든 생명은 어쩌다 보니) 태어났다. 그다지 큰 소용은 (반드시 나여야만 하는 경우는) 없다. 버릴 수도 (있는 것을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어쩌다 보니 태어났다. 반드시 나여야만 하는 경우는 없다.

 

<원도> p133

 


같은 대목을 훨씬 깔끔하게 다듬었다. 그런데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나았을 것이라는, 어쩌면 나는 아무 의미 없다는, 그런 공허한 마음은 여실하게 느껴진다. 실제로 작가도 초판과 개정판이 별 차이 없다고 밝히기도 했듯이, 전반적인 흐름이나 내용 자체가 바뀌지는 않았다. 초판이 만연체라면 개정판이 간결체인 느낌. 개인적으로는 감정을 서술할 때 호흡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만연체를 좋아하는 편이라, 두 버전 모두 마음에 들었다.

 

시간의 흐름에 발맞춘 개정이 더 좋은 부분도 있었다. 전반적으로 직설적이고 거친 표현과 욕설을 덜어내고, 폭력적인 내용이 완곡해졌다. 산 아버지의 ‘후레자식’이라는 단어가 삭제되었고, 원도를 비웃는 소리인 ‘불알 달린 남자 새끼’가 그냥 ‘남자 새끼’가 되었다. 다만, ‘불알 달린 남자 새끼’는 초반부에 등장한 후 후반부에 다시 서술되는데, 초판을 읽고서야 이 대사가 그 선배의 대사라는 것을 알았다. 아무래도 특징적인 표현을 덜어내니 독자가 그 부분이라는 걸 알아차리기 조금은 어려워진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소한 것들이 촘촘히 쌓인 개정은 11년 전과 비교해 변화된 성 인지 감수성의 차이를 잘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초판에서 원도는 군대 선임에게 성적인 학대까지 당하지만, 개정판에서는 삭제되었다. 읽으면서 왜 선임이 ‘알러뷰’에 집착하나 했는데 그런 맥락이 있었다. 전체 내용을 바꿀 순 없지만 불편할 수 있는 일부 부분을 적당히 덜어내는 것도 능력이다.


원도가 자신이 살아온 날을 수첩에 적는 숫자가 다른 것도 흥미로웠다. 초판에서는 좀 더 마구잡이다. ‘44. 12. 88. 44. 528. 365. 2640. 3168. 1584. 192720.’ 그리고 이렇게 많은 날을 살지 않았다고 말한다. 실제로 192,720일은 520년이 훌쩍 넘으니, 말이 안 된다. 그런데 개정판에서는 숫자의 개수 자체가 더 적고, 가장 큰 숫자가 기껏해야 16060이다. 16,060일은 마흔 좀 넘는 나이이니, 실제 원도의 나이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뒤이어 나오는 ‘나는 이렇게 많은 날을 살지 않았다. 채 1,000일, 아니 100일, 그래 열흘, 아니 오늘, 오늘 하루도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대사가 좀 더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물리적으로 많은 날을 살지 못했다는 게 아니라, 어떤 날도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더욱 간결하게, 압축적이게, 그래서 더 파리하게 느껴진다.


 

 

사랑이 필요하다는 호소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끝없는 고독 속에서 사랑받고자 했던 원도의 절실한 호소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작가는 초고를 쓸 때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에 등장하는 ‘인간은 과연 구원을 호소하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는가? 이 문제가 바로 나의 관심의 전부다.’라는 이 두 문장을 주제로 삼았다고 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사랑과 구원을 호소하지 않을 수 있냐, 즉, 완전히 혼자일 수 있냐. 지금의 작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런 부분이 <원도>에 잘 녹아있다.


<원도>를 구성하는 여러 크고 작은 장들의 시작과 끝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다만 그 시작이 바뀐 부분이 딱 두 부분이 있다.


 

당신에게 가족이 있다는 게 싫어. 당신에게 과거가 있다는 게, 당신에게 습관이, 말버릇이, 취향이 있다는 게 싫어.

가진 것이 있고 하고자 하는 일이 있고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게, 당신 속에 내장이 있고 똥이 있다는 게 싫어.

그녀의 말이다.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개정판인 <원도>에서는 ‘그녀의 말이다’로 시작한다. 이전 부분은 삭제되었다. ‘그녀의 말이다.’ 이후에도 그녀의 사랑론이 나열되고, 종래에 사랑은 병이라고 귀결된다. 이 부분을 읽고 <구의 증명>의 느낌이 물씬 난다고 느꼈다. 그리고 삭제한 이후의 느낌은 <단 한 사람>과 가깝게 느껴졌다. 거칠지만 직관적인 느낌에서, 차분하지만 모호한 느낌으로.


 

…결국 나도 인간처럼 쓰레기나 만들고 앉았구나 싶고, 쓰레기가 쓰레기를 만드는 어이없는 꼴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프다 못해 잘 익은 홍시 까뒤집듯 벌컥 뒤집히고, 그렇게 피할 수 없는 좌절과 우울과 허무에 빠져 선택을 미루고 미루다 보면 결국 신도 어쩔 수 없이, 도대체 사는 게 뭔가,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을 텐데…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시작이 바뀐 또 다른 부분은 ‘어릴 땐 궁금한 것이 많았다’로 시작되어 신과 사랑에 대한 무수한 사유를 담고 있는 초판의 내용이 통으로 사라진 것이다. 이 부분은 통으로 만연체다. 마침표가 없고 쉼표로 끊임없이 사유가 이어진다. 앞서 말했듯, 이런 호흡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흥미로웠다. 신에 대한 사유. 그러나 반대로 신이란 작자가 만든 이 한심한 나를 전지적 시점에서 깔아뭉개는 사유. 이는 이성을 좋아하는 감정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이 대목을 없애고 ‘엄마 하나면 충분하던 시절’로 새로운 장의 처음을 여는 것이, 엄마에게 사랑과 진실을 끝없이 갈망한 원도의 전 인생을 더욱 잘 부각한다. 원도가 인생 전반에서 그토록 갈구했던 것은 성적인 사랑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가장 사랑해 주는 그 마음, 넓디넓은 ‘사랑’이라는 상태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원도의 인생에 유일한 정답이 있다면 그것은 실패일 것이다.

사랑의 실패.

 

p189

 

 

비루하고 비굴하고 비열한 삶을 살아왔지만, 그러나, 그가 죽어 마땅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만 제대로 받았더라면. 엄마에게, 엄마가 아니라면 죽은 아버지에게, 죽은 아버지가 아니라면 산 아버지에게, 산 아버지가 아니라면 친구에게, 친구가 안 된다면 선생에게, 선생이 안 된다면 단 한 명의 그녀에게만이라도. 그러나 역설적으로 단 한 명의 그녀에게 사랑받지 못한 이유는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 아니었을까.


단언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성공이 실패인 삶에 대해 우리는 생각한다. 사랑의 실패에서 출발했기에 모든 사랑이 실패할 것이라는, 그것 하나는 자명하다는 삶이 있다면, 그것은 없어져도 괜찮은 삶이냐는 것이다. 끊임없는 사랑의 결핍. 사랑의 결핍은 곧 생의 결핍이고, 생이 너무 많이 결핍되면 이는 죽음이다. 사랑이 필요하다는 호소, 그 하나만을 위해 생을 걸어 호소하는 사람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가? 아니다.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리고 지금 여기, 당신.

지금까지 원도의 기억을 쫓아온 당신도 한 번쯤은 이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

이런 인물이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은가?

 

p239

 

 

그렇기에 우리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렇기에 반대로 우리도, 죽는 게 나을 수는 없다.

 

 


최진영 유니버스



 

도처에 죽음이 널려 있다.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p182

 

 

너무나 최진영스러운 문장이다. 너무 좋다.


앞서 말했듯, <원도>를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는 <구의 증명>이 많이 생각났다. 10년 전의 최진영 작가의 느낌은 역시 이런 거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읽을수록 <단 한 사람>이 느껴졌다. 개정을 하며 11년 후 지금의 손길이 거쳤으니 그런 것도 있겠지만. 최진영 작가의 책을 두 갈래로 짓는다면, <고백록>-<원도>-<단 한 사람>과 <구의 증명>-<해가 지는 곳으로>-<오로라>로 지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암청색과 적갈색의 느낌이랄까.


개인적으로 장민석이 원도보다 더 마음이 아프다. 결국, 이 이야기는 원도의 이야기이기에 민석의 이야기는 끝났기에. <단 한 사람>의 금화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금화를 흑화시키면 장민석이 되고, 금화를 조금 더 하얗게 쓰면 장민석인 것 같다. 다만, 사라지기 전 금화는 원도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원도는 이제 목화와 목수 두 사람이 되었고, 더 순진해졌고, 세상을 구하겠지. 원도의 엄마나 목화의 엄마나 비슷하다. 원도의 부모님은 <구의 증명>에서 구와 담의 부모님도 생각나고. 부모 역할을 제대로 못 해주니까. 그러나 구와 담이는 또 이모에게서 사랑받았지.


최진영 작가가 항상 사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녀의 사랑에 대한 세계관이 점점 넓어진 게 느껴졌다. <원도>를 다 읽은 후 머릿속에 남아있던 수많은 물음표에 대한 힌트는 오히려 초판에서 찾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원도>의 초반부에서 약간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향기가 느껴졌는데, 초판은 더욱 느껴진다. 이에 등장하는 장민석을 보며, 김도언 작가의 <소년, 소녀를 만나다>도 문득 떠올랐다.

 

 

 

몰이해의 이해



 

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제일 싫더라. 자연스럽지 못하잖아. 그건 분명 폭력적이야.

 

p90

 


장민석의 대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가장 좋아하는 나로서는 흠칫 놀랐다. 자연스럽지 못한가. 그러나 나는 또 너희를 보며 떠올리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민석과 원도가 사랑받았다면 어땠을까, 이런 상황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친구가 되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자연스러운 결핍보다 가공 받은 사랑이 더 좋다고, 결국은 느껴지기에.

 

드라마 <작은 아씨들>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산 사람도 죽어 있을 수 있다는 거, 몰랐어? 
 


현재의 원도를 보며, 그리고 원도가 떠올린 죽은 아버지를 보며, 이 대사가 생각났다. 사랑을 받지 못해 시들어갔던 사람들. 살아 있지만 마음이 죽어 있었던 사람들. 그렇기에 죽은 아버지는 '만족스럽다' 다섯 글자만 남긴 채 죽어버렸고, 원도는 끊임없이 죽은 아버지의 자취를 쫓아야 했다.

 

원도의 엄마는 끝까지 원도를 안아주지 않는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지도 않고, 아버지에 대해서도, 장민석에 대해서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원도는 나아간다. 나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마지막 대목에서, 원도는 ‘나 혼자요’하고 대답한다. <노르웨이의 숲> 마지막에 와타나베는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라고 자문하며 끝난다. 대답과 질문이지만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방황하던 주인공이 나의 ‘선택’에 수용하고 살아갈 앞날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원도는 누구에게도 답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의 선택을 취한다. 타인의 몰이해를 이해한 것이다. 멀리 도망치던 원도(遠逃)는 이제 원하던 길을 찾아 원도(願道)에 이르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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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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