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독일 연극과 “기후비상사태:리허설”

글 입력 2024.02.15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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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연극에 대해서 배우면서 현대 독일연극의 세가지 중요한 특징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우선 피스카토르와 브레히트가 막을 열었던 서사극 위주의 구성, 당대 독일의 정치사회적 중요 현안을 다룬 희곡, 마지막으로 시대의 변화(가령 네오 아방가르드나 최근의 4차 산업혁명시대) 를 겪으면서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형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러한 독일연극의 특징들이 왜 나에게 이토록 흥미를 가져다 주었는가.

 

생각해보면 지금까지의 나에게 있어 연극은 영화와 달리 무엇인가 작위적이고, 그 장소에서만 볼 수 있다는 점에 있어 상당히 어색하고 불편한 문화였다. 하지만 독일연극에 대해서 배우고 연극이라는 것이 단순히 오락성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언급했던 특징들을 통해서 관객들로 하여금 현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성찰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을 깨닫고 굉장히 흥미로움과 동시에 나의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이 확장되었음을 느꼈다. 그리고 이 확장된 시각을 갖고 바라본 한국의 연극인 <기후비상사태: 리허설> 은, 생각보다 독일연극의 세가지 특징들과 상당히 유사한 부분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해 함께 공유해보고자 한다. (해당 연극은 2022년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된 것으로 현재는 상영하지 않는다는 점 고려해주길 바란다)

 

 

(1) 기후 위기에 대한 인식적 변화: 서사극의 전개방식을 참고하여

 

서사극은 플롯을 거부하고  서사, 즉 에피소드의 제시를 통해 관람자 스스로가 극적 진실을 판단하도록 하는  변증법적인 양식이다... 서사극은 20세기의 복잡한 사회에서 관객의 관찰력과 판단력을 확대시켜 연극의 사회적 교육성을 증진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문학비평용어사전).

 

<기후비상사태:리허설>이 완벽히 서사극적 양식을 따른 것은 아니지만 우선 연극을 만들어가는 리허설이라는 상황을 전제함으로서 dramatic하게 사건을 제시하지 않아 관객들이 기후 위기에 몰입하게되는 것을 방지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순차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 관객들이 기후위기에 대해 냉철하게 생각해본 뒤 점차 인식의 변화를 겪게 된다는 점에서 서사극적인 특징이 드러난다고 생각했다.

 

연극의 초입 부분에서 작가로 분한 배우가 기후 위기에 대해 극을 쓰기 위해 고민하는 독백부분이 나온다. “왜 기후위기 시대에 기후위기에 대한 이야기를 내가 올리게 되었을까? 그것도 명동예술극장에서!” 분명히 많은 책을 읽으므로서 이론적, 이성적으로 기후위기가 우리의 삶에 직면해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이 기후위기가 나의 당장 실생활과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기후 위기에 공감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리고 관객들에게도 동의를 구한다. 이처럼 첫부분에서는 분명히 기후위기에 대해 공감하기 힘들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이후 대본을 마저 작성하기 위해 광주로 이동하고 순차적으로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이 사고가 전환되는 것이 전개된다.

 

작가 역 배우는 대본을 쓰다가 광주 아파트 붕괴 사건이 발생했음을 듣고 현장에 찾아가게 되고, 그곳에서 피해자의 가족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

 

“아파트를 짓는 시공사는 이윤을 남기기 위해 보다 싼 하청 업체에 일을 맡기고, 그 하청업체 또한 더 싼 업체에 하청의 하청을 맡기는 일이 계속되었어요. 하청 업체 사람들은 비용을 줄이기 위해 공사기간을 줄여야 했고, 그 과정에서 다 마르지도 않은 시멘트 위에 시멘트를 덧바르고, 싼 재료를 쓰는 등의 일을 저질렀고, 결국 그것들이 모이고 모여 사고를 발생시켰아요.” 만약 이것이 영화나 혹은 관객들의 몰입을 유도하는 드라마 연극이었다면 긴박감 넘치는 요소들과 함께 사고발생 직전과 사고 현장을 면밀히 묘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연극은 관객들이 그 사건에 몰입하여 그 비극 자체에 매몰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다만 이 비극이 불특정다수의 안전과 생명을 담보로 자신의 물질적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 때문에 발생된 것임을 관객들이 깨닫길 원했던 것 같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연극의 주제가 되는 기후위기 역시도 이러한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한 것임을 관객 스스로가 한발짝 떨어진 시각에서 성찰해보기 위해 이런 에피소드를 삽입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연극의 후반부에 가면 이렇게 한차례의 성찰을 거친 관객들에게 직접적으로 기후위기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불러오는 에피소드가 진행된다. 연극 초반부 작가 배우와 함께 기후위기 연극에 대해 고심하던 섬섬이,가 과로사한 20대 노동자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는 물류 배송 센터 직원이었는데, 혹한 속에서 10시간이 넘도록 일하며 핫팩 딱 하나를 배당받았었대요. 과로 후 화장실에서 돌연사했지만, 이 사건 이후 해당 공장에서 나아진 것은, 핫팩을 인당 1개에서 2개 배분 받게 되었다는 것 뿐입니다... 결국 모든 변화의 타격을 가장 먼저, 많이 입는것은 사회적 약자인 우리인거죠.”

 

이 에피소드와 함께 극단의 배우들이 모두 나와서 코러스를 하고 가구 배치를 옮기는 등의 긴박한 무대전환을 제시한다. 물론 이 일련의 흐름들이 결코 매끄럽거나 친절하지는 않았지만 이 마지막 에피소드를 제시함으로써 연극은 관객들에게 기후위기라는 커다란 문제는 사회적 약자 계층에게 가장 크고 실제적인 타격을 줄 것이며 우리는 아마 그 사회적 약자 계층에 가까울 것이라는 말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 순차적인 흐름을 통해 결국 관객은 기후위기에 대해 공감하지 못했다가 바로 우리의 일임을 깨닫고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중간 중간 삽입된 에피소드에서 배우는 객석을 바라보며 이런 이야기를 한다. “필요한 건 없어요. 다만 지금처럼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세요” 라고 말이다. 관객에게 기후 위기를 비롯한 여러 사회적 이슈에 대해, 특히 사회적 약자 계층에 대해 관심을 가져달라는 메시지를 무대 너머로 직접 전달했던 것이다.

 

이런 구성이 결코 이해하기 쉽지 않았을 뿐더러 일련의 에피소들과 기후위기라는 직접적 연결성이 조금은 미흡하여 아쉬움이 남았다. 또한 완벽한 서사극이라고 하기에는 혼동의 여지가 있다고 느낀 부분은 20대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논하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을 통해 결국 기후위기로 인한 피해는 사회적 약자 계층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한발짝 떨어져서 관객에게 제시했다는 점에서는 서사극의 특징과 부합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지나치게 사회적 약자인 우리들의 문제, 라고 관객들의 감정과 공감을 호소하는 듯한 극의 진행에 있어서는 갑자기 몰입을 유도한다는 생각이 들어 연극이 유지해오던 관객과의 거리가 인위적으로 좁혀진 느낌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분히 이야기의 배경을 전개하는 서사극의 형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관객들로 하여금 거리를 두고 기후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직접 느껴보겠끔 했다는 점이 굉장히 인상깊었던 바이다.

 

 

(2) 한국의 현재: 당면한 사회적 이슈를 바탕으로

 

브레히트의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1941) 은 17세기 30년 전쟁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1941년 발표 당시 누구도 그 희곡을 몇백년전의 전쟁에 대입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배경은 과거로 했지만 브레히트가 그 희곡을 통해 관객들에게 가장 생각해보게 했던 주제는 당시의 2차 세계대전이었을 것이다. 이후로도 독일 현대 연극은 세계대전의 패전국, 동서 분단이라는 큰 역사적 사건들을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그 어떤 나라의 연극보다도 당대의 정치,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가지고 직면하려고 했다. 그렇다면 이 <기후비상사태:리허설>은 어떠한가?

 

나는 이 연극이 형식적, 내용적인 측면 모두에서 상당히 현재 한국의 상황을 시의성있게 담아냈다고 생각했다. 연극이 제일 처음 시작될 때 극장 안 조명이 모두 꺼지고 완전한 어둠이 찾아온다.

 

“암전. 어둠, 완벽한 어둠. 나는 어릴 때 부터 이게 그렇게 좋았다...하지만 코로나 19로 연극이 멈췄고 한동안 이걸 다시 경험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연극은 다시 시작됐다.”

 

우선 세계적 재난으로 문이 닫혔던 극장가의 현실을 말하며 현재 연극계의 상황에 대해 관객들에게 제시한다. 이 부분이 제시됨으로써 극장을 찾은 관객이었던 나는 현재의 어려운 상황을 연극계와 공유하고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의 내용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다소 범세계적인 기후위기로 시작해서 현재 한국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인 양극화로까지 이어짐으로써 충분히 시의성 있는 주제를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서사극에 입각한 (1)의 내용에서 충분히 제시했던 것처럼 결국 기후위기라는 것도 한국의 현재 문제를 야기시킨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하고 있다.

 

“나는 왜 유류세 인하로 인한 주유비를 인류세 인하로 인한 주유비로 읽었을까?”

 

이 대사를 통해 연극은 세계와 한국을 아우를 수 있는 두 가지 현실을 제시한다. 우선 인류세란 인류를 뜻하는 ‘anthropos’와 시대를 뜻하는 ‘cene’의 합성어로서, 인류로 인해 빚어진 지질시대라는 의미다 (이성규, 2019. 05.27, “‘홀로세’ 가고 ‘인류세’ 올까”, the science times). 이 인류세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된 배경은 과거의 어떤 지질 시대보다도 현대에 들어와서 인류는 지구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 영향은 핵실험, 과도한 화석연료 및 플라스틱 사용 등등 부정적인 영향이라는 것에 대한 성찰적 논의라고 볼 수 있다. 결국 기후 위기 등의 범세계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는 인류세가 주유비라는 일상적 용어와 함께 묶여 논의될 수 있을만큼 우리의 실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하나의 경고를 이 대사 속에 녹여냄으로써 기후 위기라는 세계적인 주제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극의 진행 중 갑자기 등장한 “유류세 인하로 인한 주유비” 자체가 무엇이지에 대해 알아보자. 2022년 4월 기준 정부가 유류세 인하 폭을 법정 최고 수준인 30%까지 낮추기로 결정했고, 이는 물가 안정을 위한 정부의 상당히 과감한 조치였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유가가 치솟을 때마다 유류세를 조정하는 대신 근본적인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고, 실제로 이 유류세 인하로 혜택을 보는 것은 자가용 등 차량 운행이 많은 소득 상위계층이라는 통계청의 결과가 있다. 이처럼 직접적으로 한국 정부의 유류세 인하, 라는 제도를 극 속에서 제시하고, 또 이 제도 자체가 국민들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세간에 있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해당 연극은 관객들에게 기후 위기와 더불어 유가나 기타 다른 세계 공통의 시의적인 문제에 대해 다시금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봐야한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해당 연극은 한국 사회의 현재 정치사회적 이슈를 극 중 녹여내려는 시도가 엿보이는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3) 형식적 새로움: 레지테아터 연극과 가난한 연극 이론을 바탕으로

 

마지막으로 이 연극에서 내가 경험한 형식적 새로움에 대해서 논해보도록 하겠다.

 

‘레지테아터’란 감독 중심의 연극으로 원작에 충실하기보다는 연출가가 시대와 배경을 자유자재로 설정하는 연출가 중심의 연극을 말한다. 연출가 연극의 개념은 극을 준비 및 구성하는 과정에 있어 연출가의 비중이 커지게 된 연극을 의미한다. 만약 내가 다른 연극을 감상했더라면 과연 연극을 만드는데 있어 연출가의 비중이 큰 것인지 분간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후비상사태:리허설>은 말 그대로 리허설 형식 연극으로 어떻게 기후위기를 극으로 연출해낼 것인가 자체를 담고있는 연극이기에 대본 자체에서 이미 연출가의 역할을 비중있게 다루고 있었다.

 

연극의 초반부에 여러명의 배우들이 영국 보리스 총리, 그레타 툰베리,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등등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기후 위기와 관련해 발언한 내용으로 극을 시작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하고, cop 26가 열린 글래스고에서 영국 존슨 총리는 "지구종말 시계는 자정 1분 전이며, 우리는 지금 행동할 필요가 있다" 라고 말했던 것 처럼 관객들에게 지구 종말 시계를 1분전으로 다시 돌려보자고 말하자는 등등의 의견을 내놓는 장면이 있었다. 이 장면을 통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연출가 연극의 리허설에서 어떻게 연출가들이 극을 준비하고 구성하는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연출가 연극이라는 형식 자체를 내용으로 언급했다는 점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무대 세트 자체도 굉장히 인상깊었는데 최근에 배운 가난한 연극이라는 개념과 어느정도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로토프스키는 가난한 연극의 개념을 의상, 장치, 음악, 조명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고 perform 하는 배우를 필요로 하는 연극이라 정의 내린 바 있다. 가난한 연극이라는 이런 개념적 정의에 비추어 보면 사실 <기후비상사태 리허설>은 완벽히 가난한 연극이라 볼 수는 없다. 디스플레이를 통해 화려한 영상을 제공하거나 즉흥연기를 함에 있어서 과거의 영상을 틀어주기도 하는 등 배우 이외의 여러 요소들이 가미되어 있다. 하지만 그 외의 무대 소품들이나 다른 장치들을 고려한다면 나는 상당히 간소하고 절제되어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특히 기후 위기를 주제로 하는 만큼 의상이나 기타 다른 소비재들을 사용하지 않으려 의도적으로 노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극 중 계속 무대 위를 차지하고 있는 가구들은 배우들이 창고에서 있던 것을 재활용한 것이며, 의상도 같은 일상복을 거의 계속 착용하며 바뀌어도 잠옷으로 갈아입는 등등에서 그런 점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연극답게 디스플레이를 통해서 단원의 오디션 영상을 틀어주는 동시에 무대 위에서 실제로 같은 장면을 재현했던 것, 그리고 단원들이 노래와 랩을 하며 이리저리 가구를 재배치하는 것을 역동적으로 전개하여 마치 코러스와같은 효과를 주는 장면 등등을 통해 배우들의 perform 적인 측면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가난한 연극이라는 개념이 현재의 한국에서 새로이 해석되어졌다는 생각을 한 바 있다. 이처럼 형식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새로운 시도들을 많이 찾을 수 있었다.

 

사실 여태껏 상업, 대중 연극까지 관람하지 못한 나에게 있어 독일현대 연극과의 유사성을 배제하고서라도 이 연극은 굉장히 새롭게 다가왔다. 우선 통속적인 로맨스나 호러, 와 같은 일종의 오락성이 강한 주제가 아니라 기후위기라는 상당히 시의성이 높은 사회적 이슈를 다뤘다는 점에 있어서 신선했다. 그리고 독일 현대 연극과 유사한 점이 많아서 오락의 느낌보다는 확실히 예술, 소통의 장에 보다 가까웠다는 점 것 역시 나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물론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기후변화를 언급할 때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 밖에 없는 이익집단의 이해관계 및 정치적인 문제들이 조금은 편향되게 그려졌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점이 일정 부분 관객들에게 거부감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느꼈다.그러나 정말로 변화해가고 기존의 틀을 깨부수는 현대 연극이 한국에서도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내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기에 개인적으로 정말 좋은 경험이 되었고, 앞으로도 더 많은 경험을 통해 연극에 대해 보다 발전된 분석과 비판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으며 글을 마친다.

 

 

[김정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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