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성인이지만 어린이입니다 [도서/문학]

글 입력 2024.01.05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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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이 유명한 구절은 뭇 사춘기 아이부터 인생의 변곡점에 놓인 어른까지 선택의 기로에 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떠올리는 문장이다.

 

익숙해진 관습과 가치관을 깨고 삶의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고자 할 때 이보다 적절한 문장이 없다. 그 덕에 그간 얼마나 많은 데미안들이 알을 깨라고 외쳐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양산형 감성 에세이부터 유명 연예인의 TV 강연까지. 그들은 ‘알을 깨라, 세계를 깨라, 네 세상을 넓혀라’고들 한다.

 

내 알은 뭐지? 나는 무슨 세상을 갑옷 삼아 그 뒤에 숨어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지? 문득 불안해져 투명한 알껍데기를 콩콩 두드려 보았다.

 

현대인들은 영화 <무드 인디고> 속 구름처럼 저마다의 알을 UFO 삼아 타고 돌아다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통된 인간 발달의 단계를 거친다지만 속사정은 각자 다른 법이다. 같은 스무 살에도 누군가는 사회생활에 뛰어드는가 하면 다른 누군가는 설렘과 함께 대학교 정문을 넘는다. 각자가 처한 환경과 상황에 따라 주어지는 발달 과업은 천차만별이다.

 

그러니 각자가 깨야 하는 알도 다 다른 모양과 색깔이다. 알의 개인화라니, 다마고치도 아니고. 문득 가슴속에 변신용 알 컬렉션을 품고 다니는 모 마법 소녀 캐릭터를 생각하다 우스워져 금세 그만두었다.

 

그래서 여기 아주 평범한 김 모 씨의 알은 무엇인가. 2024년 1월 기준 스물넷, 대학교 4학년인 그는 새내기의 풋풋하고 설레는 감정 따위 전 세계적 역병의 등장과 함께 갈아 마셔버린 일명 ‘코학번’이다. 파란만장한 대학에서의 일상을 꿈꾸며 서울로 상경했지만 좁은 방 안에 틀어박혀 노트북 화면 속 디지털 교수만 들여다보는 일은 서울이 아니어도 가능했다. 교수는 사실 사이버 가수 아담 같은 존재라 화상 회의로만 만날 수 있는 걸까 생각했다.

 

선배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바지춤에 몰래 족보를 찔러 넣을 시간에 넷플릭스 속 남자 배우와 캔맥주로 건배를 했다. 동기들과 가평이며 을왕리로 엠티를 떠나 웃음꽃 피우는 대신 철 지난 예능 프로를 돌려 보며 깔깔댔다. 괜히 사람 만날 필요도 없고 편하다고 떠벌렸지만 그저 고독 안에 게으르게 퍼질러 누운 것뿐이었다.

 

방생한 인간관계와 지리멸렬한 집중력에 대한 책임은 역병으로 돌리면 그만이었다. 그 결과 자연히 사회성은 바닥을 치고 말 못 할 우울한 감정들이 일기장을 가득 채웠다. 그때 그가 깨고 나와야 할 세상은 ‘게으른 고독’이었다.

 

김 씨는 팬데믹 상황이 점차 호전되며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친구와 선후배를 만나고 동아리 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잠시 잊은 듯했던 대인 관계 능력과 함께 고등학교 졸업식에 두고 온 줄 알았던 활발한 성격도 어느 정도 되찾았다. 그러나 당시 미처 깨고 나오지 못한 알은 투명한 천장이 되어 새로운 지면으로의 도약을 가로막았다.

 

게임 캐릭터가 성장하는 고전적인 방법은 경험치를 쌓는 것이다. 비단 디지털 세계에만 적용되는 규칙은 아니다. 생애의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경험들이 있다. 나는 게으른 고독이라는 이름의 껍데기 안에 웅크리느라 하지 못한 경험들이 많았다. 대학생만이 할 수 있는 도전과 그에 따른 실패, 그 경험을 통한 내적 성장의 단계를 어영부영 뛰어넘었다.

 

그 덕에 성인의 반열에 오른 지 한참이지만 여전히 어린이 이름표를 달고 있는 꼴이 되었다. 졸업장을 받았는데 안의 내용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다. 시든 꽃다발을 안고 터벅터벅 단상을 내려오는 모습을 상상하자 고개가 절로 도리질 쳐졌다.

 

적절한 시기에 적당한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한 새는 어떻게 되는가? 오래되어 매끈하고 악취를 풍기는 껍데기 위로 또 다른 껍데기가 생길 뿐이다. 대학 졸업 후 취업 시장에 뛰어들 나의 근미래에는 새로운 껍데기가 기다리고 있다. 성인이지만 치기 어린 행동을 해도 용인되던 대학생 신분도 더 이상 방패가 되어 주지 못한다.

 

제때 첫 번째 알을 깨지 못한 나에게 앞으로 다가올 무수한 껍데기들은 보다 단단하고 막막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 정말이지 대신 알을 깨 주는 도구라도 팔았으면 좋겠다. 무른 주먹이 아프다. 이게 다 굳은살이 배기지도 않은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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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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