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를 인간성으로 중독시키기 위하여 [문화 전반]

책을 태우지 않은 <투모로우>의 사서들
글 입력 2024.01.03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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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 자연재해로 지구가 종말할 것이라는 종말론이 인기를 끈 적 있다. 2013년이 도래함에 따라 자연히 거짓으로 판명된 2012 지구종말론은 그 출처라고 알려진 고대 마야의 신비성과 더해져 상당한 붐을 일으켰다. 그때 나는 고대 문명과 세계의 미스터리 등등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진 아이였는데, 마침 동네 공원에서 여름 특선으로 지구 종말에 관한 재난영화들을 상영하는 야외행사를 하길래 가족들과 함께 보러 갔던 기억이 난다. 돌이켜보면 굉장히 기묘한 콘셉트의 행사지만 어쨌든 그것이 나의 <투모로우> 첫 관람이었다.

 

<투모로우>는 2004년 개봉한 미국의 재난영화로, 기후위기의 영향으로 갑작스런 빙하기가 시작되어 전 지구가 위험해진다는 내용이다. 이제는 비슷한 소재를 다룬 <2012(2009)>나 <지오스톰(2017)> 등과 함께 OCN의 단골 재난영화 중 하나가 되었기도 하다. 사실 자연재해라는 소재를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 <투모로우>는 특정 시기와 당시의 흥미가 맞물린 기묘한 특이점에 가깝다. 그리고 2012 지구종말론은 그것 자체를 소재로 한 <2012>라는 영화가 있는 터라 종말론으로 이 영화를 소개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수도 있다. 그저 그 시기, 나의 일상적 맥락에서 2012 종말론과 관련된 영화는 <2012>가 아닌 <투모로우>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여태 <투모로우>의 제목을 분명히 기억하는 이유는 아니다. 나는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 <투모로우>를 몇 번이고 다시 보았다. <투모로우>에서 주인공들은 해일과 추위를 피해 뉴욕 공립 도서관에 들어간다. 그곳에는 이미 몇몇 사람들이 있고, 주인공들과 사람들은 몸을 녹이기 위해 책을 태우자는 의견을 모은다. 그러나 한구석에 사서들이 있었다. 사서들은 책장에서 무자비하게 책을 쏟아버리는 사람들을 향해 도서관의 책을 태울 수는 없다고 외친다. 오래된 책을 껴안은 한 사서는 인류가 멸망하더라도 이 책을 지키고 싶다고 말한다. 그가 껴안은 책은 최초로 인쇄된 구텐베르크 성경이고 그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 마치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종자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 하에 말 그대로 식량을 눈앞에 두고 스스로아사한 파블롭스크 실험국의 종자 연구원들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다.


인류의 멸망은 곧 모든 책이 그 독자를 잃어버린다는 것을 뜻할 텐데, 비록 자신을 비롯한 모든 독자가 자멸했더라도 그곳에 인류의 지성이 있었노라고 증명하고픈 마음은 불가해한 범위기에 존경스럽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자를 잃어버린 책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차라리 그것을 태워서 사람의 몸을 녹이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사서들의 신념이 다른 생존자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에도 반박할 길이 없다. 그렇다고 전 인류를 위한 그들의 신념을 한낱 개인의 이기심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이기와 이타, 신념과 생존이 충돌할 때, 어느 하나도 버릴 수 없는 것들이 반목할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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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맥락에서 이 질문을 비롯한 도서관 장면, 그리고 <투모로우> 자체는 다소 다르게 읽힌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23년 12월 9일의 서울 최저기온은 약 12도, 최고기온은 약 16도였다. 한국의 겨울 추위가 본래 어떠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에게는 12월에 평균 기온이 약 14도인 날이 있다는 것이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이제 기후위기가 실제적인 삶의 문제로 다가온다는 것을 부정하긴 어렵다. <투모로우>는 바로 그 기후위기의 문제를 다룬 재난영화라는 점에서 개봉 당시에는 누구도 바라지 않았던 현실성이 더해진다. 그렇다면 재난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태도는 어떠한가. 어느 순간부터 이타적이거나 이상적인 신념의 캐릭터에게 씌워지는 가장 흔한 호칭이 ‘민폐 캐릭터’라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투모로우>의 사서들은 민폐 중의 민폐다.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데 고작 책 몇 권을 태우는 것 때문에 힘을 빼다니. 이미 지구의 절반이 죽었고 신은 인간을 굽어살피지 않았는데 미련하게 믿지도 않는 종교의 경전을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기다니. 결국 타협점을 찾아 몇몇 책을 태우기는 했어도 그들의 행위는 쉽게 지탄받을 것이다. 어쩌면 관객보다 먼저 그 장면 안의 캐릭터들이 사서들을 때려눕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사이다’로 소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타인의 삶을, 자신과 다른 신념 혹은 가치를 가진 사람을 쉽게 적대시하게 된 것은 대중들의 탓이 아니다. 지금의 사회적 콘텍스트는 대중들의 시선을 개개인의 이득에만 매어두고 나 아니면 타인의 사이에서 선택하길 종용한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답이 존재하지 않는 질문이며 선택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2023년이라는 사회적 콘텍스트에서 <투모로우>의 도서관 장면은 현대인이 살면서 마주치는 답이 없지만 답을 해야 하는 것들, 선택할 수 없지만 선택해야 하는 것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대개 엄청난 고민이 수반된다. 해당 장면의 갈등이 고작 대화 몇 번으로 쉽게 풀어진 것이 일견 사치 혹은 판타지로 보이는 이유다.


그렇다면 부정적인 감정으로 울렁이는 초개인화, 파편화의 콘텍스트에서 거대하고 이상적인 가치와 질문을 다루는 대중문화는 더 이상 필요치 않은가? 나는 아니라고 답하고 싶다. 사실 아니길 바라는 쪽에 가깝다. 대중문화를 이루는 것은 결국 서사의 힘이다. 대중문화 상품 창작자의 서사, 상품 자체의 서사, 그 상품을 받아들이는 향유자의 서사, 이 모든 서사의 원인이자 과정이자 결과인 콘텍스트가 융합되어 대중문화라는 거대한 개념을 완성한다. 대중문화가 아주 개인적인 태도부터 사회적 현상까지 유동적인 맥락에서 해석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대중문화에서 자극적인 이야기가 주류인 때다. 좋은 이야기는 반짝였다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인간의 이기심 내지는 폭력성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채운다. 비단 이야기들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정보들이 대부분 그렇다. 이렇게 대중문화를 둘러싼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콘텍스트가 부정적일수록 그 반대의 방향을 가진 서사가 사회에 공급되는 것이 중요하다.


대중문화는 그 최초 생산자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기본적으로 불특정 다수의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특성이 있다. 그것을 막을 수 없다면, 대중들이 대중문화로부터 영향을 받고 그것을 자신의 무의식적 맥락으로 학습시켜 내면화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특성 중 하나라면, 부정적인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대중들은 무엇을 학습해야 하는가? 살면서 누군가가 가르쳐주지는 않지만 잊어서는 안 될 가장 근본적인 것을 학습해야 하지 않을까? <투모로우>의 사서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책을 지킨다. 그러면서도 타협점을 찾아 결국 책을 태우기도 한다. 인류 지성의 증거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신념이다. 내 존재가 위협받더라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지만 미래의 누군가에게는 분명 도움이 될 것. 그러나 이 신념은 눈 앞에 있는 사람과의 공존을 위해 굽힐 수 있다. 나는 이것이 <투모로우>가 2023년의 대중들에게 보여주는 인간성의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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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고민케 하는 많은 것들처럼, 인간성에는 정답이 없다. 정답이 없지만 풀이는 내야 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다. 목적지는 없어도 방향은 있다. 방향을 설정하는 것은 자신의 주관 내지는 신념이기에 타인의 영역이 될 수 없다. 스스로의 생각을 정립하고 나아가는 것은 자아의 영역이다. 그리고 그런 자아를 가장 무해하고 은밀하게 인간성의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대중문화다. 다시 말해, 결국 대중문화의 방향은 최소한의 인간성을 지키는 방향으로 흘러가야 하고 그것은 대중문화가 대중들을 인간성으로 중독시킬 힘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이 힘들 때일수록 적어도 인간에게서 희망을, 무언가 다른 삶을 상상할 기회를 빼앗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살면서 하는 경험에 따라 세상의 추악한 면모는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으니 대중문화는 그것이 아닌 다른 세상을 경험케 해야 한다. 개인적 콘텍스트가 부정적이어도 외부 속성, 즉 대중문화의 긍정적 텍스트가 개입하면 사회적 콘텍스트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 선한지 악한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이 어떠하든 인간이 허무와 분노에 빠지지 않고 어떻게든 공존할 수 있기 위해 찾아야 할 방향의 문제다. 또한 대중문화 상품이 무조건 낙관적이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폭력과 분노와 기타 등등의 자극으로 점철된 대중문화 상품도 이에 기여할 수 있다. 어떤 텍스트를 그 방법으로 선택하느냐는 생산자 혹은 향유자 개인의 맥락에 달린 문제겠지만, 보다 기초적인 개념에서 대중문화는 그것이 어떤 형식과 텍스트이든간에 인간성의 최후를 지키는 방향으로 흘러가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사람이 전혀 나오지 않아도, 세상이 끔찍하게 망하고 모두가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으로 타인을 상처입히는 걸 당연하게 생각해도 대중문화는 우리는 좀 달라야 한다고, 우리가 다를 수 없다면 다음 세대를 그렇게 키워내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세상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해도 우리는 남을 고통스럽게 하면 안 되지 않느냐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들과 우리는 좀 달라야 하지 않겠느냐고. 이것이 우리의 끔찍한 현실이라면 우리는, 적어도 우리 다음 세대는 이렇게 살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니겠냐고.


<투모로우>의 도서관 장면에서는 주인공 중 하나가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지는 부분이 있다. 아무도 그 원인을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책을 태우지 말라고 하던 사서가 의학 서적을 들고 나타난다. 책은 그가 패혈증이라는 것을, 그리고 치료를 위해 필요한 약의 종류를 알려준다. 그들이 태우지 않은 책이 그들을 살린 것이다. 지금 우리의 맥락에서 우리가 버리려고 하는 것,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우리를 살릴 수 있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살아가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도 모르는 채 우리에게 학습시킬 수 있는 것은 대중문화다.


따라서 대중문화는 파편화된 세상에 던져진 인간이 힘겨운 삶에도 불구하고 향해야 할 방향, 개인의 삶을 넘어선 필연적인 거대한 공존을 알려주는 마지막 보루가 되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우리가 사는 이 거대한 집은 뼈대가 무너지면 돌이킬 수 없고, 우리는 이 집 밖으로 벗어날 수도 없으므로, 대중문화는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비추는 가장 최후의 등대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갈등과 절망, 우울과 죽음이 파도치는 2023년의 맥락에서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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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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