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어디서 온 지 모를 천에 휘감겨 목이 조여간다 - 숄 [도서]

글 입력 2023.12.29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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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담함은 무력함의 그림자다. 무력함은 참담함의 그림자다.

 

그림자가 사라질 수는 없다. 빛을 피하는 찰나에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밝은 빛으로 나오는 순간 그림자는 내 뒤편에 어두컴컴하게 누워있다.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도무지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제 몇 년 전인지조차 가물가물하지만, 살면서 처음으로 지진을 겪었다. 친구들과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고층 건물이 무너지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흔들렸다. 밖으로 나오니 도로와 건물은 금이 가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또 한 번 지진이 찾아왔다. 그런 울림은 난생처음이었다. 자연의 위대함과 공포를 그때 이해했다.

 

[생존자. 무언가 참신하다. 그들이 인간을 말할 필요가 없다면 말이다. 과거엔 난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존재는 없다. 더 이상 난민은 없고 생존자만 있다. 번호와 다름없는 이름―평범한 무리와는 따로 셈해지는 존재. 팔에 찍힌 파란 숫자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 그들은 어쨌거나 당신을 가리켜 여자라고 하지 않는다. 생존자라 한다. 심지어 당신의 뼈가 흙먼지 속으로 녹아들 때도 여전히, 그들은 인간을 잊고 있을 것이다. 생존자와 생존자 그리고 생존자. 언제나, 언제까지나 생존자. 누가 그런 단어를 지어냈을까, 고통의 목구멍에 붙은 기생충 같은 단어를!] ([로사], 59쪽)


그 뒤로 한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비행기 날아가는 소리나 조금만 큰 소리가 들려도 몸이 움츠러들었다. 나를 겁먹게 하던 건 내 안의 무력감이었다. 그 커다란 진동의 범람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 지진이 찾아올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는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도망뿐이지만 그마저도 더 큰 것이 온다면 소용이 없다는 현실. 내 의지는 아무 상관이 없는 흐름.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대로 휩쓸려 갈 수밖에 없다는 그 무력감에서 오는 공포가 한 달은 족히 나를 옭아맸다.


무엇 하나 다를 것 없는 일상을 보내는 자신을 상상해보자. 나는 오늘도 어제와 다름없이 학교, 혹은 직장을 가려고 집을 나선다. 그런데 갑자기 앞이 안 보인다.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모를 커다란 천이 나를 뒤덮는다. 열에 아홉은 놀라서 발버둥친다.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지고 정체 모를 것이 나를 휘감고 내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상황.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 보려고 허우적거릴수록 천은 내 몸을 더 견고하게 구속한다.


그 천이 내 몸과 비슷한 정도라면 금방 풀고 벗어날 수 있다. 기껏해야 내 머리 정도만 묶을 테니. 거실 바닥을 다 덮을 정도라면 그것보다는 좀 더 오래 걸릴 것 같다. 하지만 축구장을 다 덮을 정도로 거대한 천이라면 어떨까. 내 몸을 휘감다 못해 숨이 막혀 질식할 게 뻔하다. 용케 살아도 바닥을 힘겹게 기어 벗어나는 내내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릴 게 뻔하다.


어떻게든 벗어나 주변을 둘러보면 이제는 허탈함을 마주한다. 나는 그렇게나 무섭고 힘겨웠건만 세상은 평안하다. 나에게 이 천을 던진 사람이 누군지는 알 수 없고, 남들이야 내가 거기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 도리가 없다.

 

오직 나만 그 공포를 계속 떠안고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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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린 [숄]과 [로사]는 1980년과 1983년 [뉴요커]지에 각각 발표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두 작품 모두 최고의 단편소설에 주어지는 가장 권위 있는 상인 오헨리 상을 수상(1981년과 1984년)했으며, 나중에 한 권으로 묶여 소설집 [숄]로 나오면서 각각의 울림과 무게를 더욱 증폭시켰다.

 

작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단편 [숄]은 엽편소설에 가까울 만큼 매우 짧지만 그만큼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특이하게도 홀로코스트를 다룬 작품임에도 '나치'나 '수용소' 같은 단어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그 대신 '코트에 꿰매어 단 별'이라든가 '아리아인' 같은 단어에서 이 작품이 강제수용소로 향하는 행렬과 수용소에서의 참혹한 삶과 죽음을 다루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시적인 문체로 간결하게, 그러나 강렬하게 묘파되고 있는 사건은 그 자체로 오래 기억되고 또 널리 회자되어야 할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뒤이어 이어지는 작품 [로사]는 [숄]의 배경이 된 시대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후를 다루는 일종의 후일담으로, [숄]이 주는 강렬한 인상 때문에 상대적으로 평범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비대칭성이 오히려 작품 전체의 완성도를 담보하는 요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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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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