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종적 인간의 1인용 광장 - 소설 회색인 [도서/문학]

글 입력 2023.12.11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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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나는 항상 세상을 이분화해서 보는 버릇이 있었다. 유난히 큰 냉장고 소음에 잠 못 이루던 밤에는 세상이 냉장고 안과 밖으로 나눠져 있는 게 아닐까 상상했다. 모든 결정권이 맺힌 진원지로부터 그렇지 못한 세상으로 하달되는 소음에 대해 밤새 생각했다.

 

또 한번은 선물 받은 스노우볼 안의 모형이 너무 정교해서 세상이 꼭 그 작은 구 안과 밖으로 나눠져 있는 듯 싶었다. 그들의 세계는 지름 6cm의 지구를 내려다 보는 신놀음을 즐기게끔 했다. 가볍게는 밖과 집, 양지와 음지, 나아가서는 나와 타자, 병원과 무덤 등…. 마치 마트 계산대에서 물건들 사이에 상품 분리바를 내려놓듯, 나는 쉽게도 세상을 나누고 분절했다.

 

이것은 아주 편리한 분류법인 동시에 안정감을 주는 사고 체계였다. 어쩌면 개구리처럼 안일했지만, 그 덕에 유년의 우물은 비교적 따뜻하고도 축축했다. 그러나 점차 공고해지는 것은 두 세계 중 어디에도 좌표를 두지 못하는 내 처지였다. 스노우볼 안도 밖도 아닌, 겨우 그를 분절하는 유리 구의 두께마냥 얇은 일명 '에고'가 괴로웠다. 1950년대를 사는 청년 독고준과 2021년의 나 사이에 연결된 실은 그렇기에 무시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회색인’이라는 점이 끝내 실에 매듭을 묶게 한다. 독고준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이 이런 나의 오랜 버릇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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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 작가의 소설 <회색인>은 지식인 독고준의 관념 세계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4.19혁명 직전을 배경으로 당시 지식인들의 현실, 고뇌와 우울을 그린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드라마틱한 사건보다는 독고준의 사변적인 독백이 주를 이루는데,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대표작인 <광장>보다도 더 마음이 가는 작품이다.

 

<회색인>에도 수많은 이분화된 세계가 등장한다. 남과 북,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현재와 미래, 남성과 여성, 문학과 미술 등이 그 예이다. 근대화의 향락 앞에 쾌락주의에 빠지지도, 그렇다고 일말의 낙관을 갖고 혁명가가 되지도 못한 독고준은 그 사이의 막연한 회색지대를 찾아 몸을 뉘였다. 그렇기에 회색인으로서의 독고준은 ―소설 속 표현을 빌리자면― 당구대 위의 당구공들처럼, 작은 외압에 언제든 밀려날 수 있는 처지이다. 여기서 <회색인>이 지닌 독특한 방향성에 대해 논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소설을 아주 거칠게 분류하자면 종縱적인 작품과 횡橫적인 작품이 있다고 생각한다. <회색인>은 일단 횡적인 선분 하나를 쫙 펼쳐놓은 후에 이를 둘로 나눠 한쪽에는 검은 지대, 다른 한쪽에는 흰 지대가 존재함을 기본 구조로 삼는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발 딛지 못한 독고준은 단순한 선분을 ‘좌표 평면’으로 치환해버린다. 가로축 아래로 세로축을 길게 그려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종적으로, 자꾸만 아래로 상념의 세계를 심화해가는 것이 흑백 세상에서의 그만의 생존법이다.

 

작품 속 인물 모두 선분 위 각자만의 위치에서 y축을 늘려가지만, 독고준의 가로선은 그 누구의 것과도 쉽사리 겹치지 않는다. 종국에 <회색인>은 아주 촘촘한 격자무늬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작가의 또 다른 소설 <광장>에 등장하는 ‘광장’과 ‘밀실’의 논의를 끌어오고 싶다. 각각의 격자는 인물 하나하나의 밀실처럼 보인다. 개인의 사념 속으로 회귀할 뿐, 인물 사이의 대화에는 진정한 의미의 ‘우리’가 배제되어 있다는 점에서 어딘가 씁쓸해진다. 물론 독고준이 그 안에서도 정신적 연대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는 묘사가 등장한다.

 

덧붙여 갇힌 세대의 결집과 혁명을 꿈꾸는 김학이라는 인물상 역시 또 다른 서사적 가능성으로 작용한다. 대화와 교류를 통해 잠시 밀실 사이의 통로가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1인용 광장’ 그 이상의 공간이 되지는 못한다. 개인적으로 별 다른 진전을 이루지 못한, 아니, 오히려 나와 타자 사이를 가르는 벽의 두께만 불어난 오늘날이 겹쳐 보인다는 결말에 닿았다.

 

매체의 발달 등으로 인해 얼핏 다양한 광장이 마련된 세상으로 발전했다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곳에는 의견이 아닌 파편화된 감정만 팽배하다. 많은 이들이 각자의 목소리로 발화할 수 있는 상황은 이상적이지만, 문제는 난무하는 ‘입’ 사이에서 ‘귀’는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모두가 시대에 의한 자신의 피해자성을 주장하는 상황 속에서, 가해 주체의 실체 없음에 괴로운 개인들은 분노의 화살을 서로에게로 겨눈다. 이것은 어쩌면 끝없이 내면으로 침잠해 현실과 유리되어 버리고 마는 독고준적 삶의 방식보다 더 위험하다. 우린 더욱 퇴보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입안이 쓰다.

 

한 가지 치기어린 낙관을 가지자면, 회색인들의 정신적 망명을 마냥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겠다는 점이다. 회색은 희지도 검지도 못한 상태라는 한탄을, 흰 색과 검은 색 모두를 품고 있다는 가능성으로 치환하는 것이 시대의 과업처럼 느껴지는 탓이다. <회색인>의 결말, 즉 결국 이유정의 밀실에 문을 내는 독고준의 모습은 흑백도 회색도 아닌 저만의 빛깔을 찾고자 하는 작은 시도처럼 보인다. 노스탤지어의 형상으로 맺힌 김순임을 담아둔 채 현실의 시간에 발 맞춰보려는 독고준의 모습은 방법만 다를 뿐 ‘에고’를 지켜가겠다는 궁극의 목표는 같다. 가능하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파편화된 개인들의 y축 역시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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