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산책을 통해 위로 받는 이유 [문화 전반]

자연에게 고마운 까닭은, 관찰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글 입력 2023.11.25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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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워내기 위한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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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 꼭 합격했으면 했던 동아리 활동에 떨어졌던 적이 있다. 더 중요한 것들에서도 여러 번 탈락의 고배를 마셔 본 지금의 나라면 쓴웃음 한 번 짓고 말았겠지만, 당시는 불합격이라는 세 글자가 그렇게 뼈아플 수 없었다. 


그날은 추웠고, 또 가는 비가 내려 우중충했다. 하지만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마음만 아니라 몸으로도 불합격이라는 결과에 수긍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싫어 눈물을 벅벅 닦으며 지하철에 올랐다. 목적지는 뚝섬유원지였다. 다 와 갈 때쯤 반대편 창문을 내다보니, 하늘도 푸른색 한 점 없이 흐리멍덩한 게 꼭 지금 내 심정을 비추는 듯했다. 


그렇게 내린 후 산책로를 따라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어디까지 가야겠다는 계획도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강 하류에 다다랐다. 거기까지 가고 나서야 피곤해진 나는 물가에 둑처럼 쌓인 돌무더기 위에 걸터앉았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바다의 파도만큼은 아니었지만 물 밀려오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멍하니 강을 감상하고 있을 때, 물 위로 날아오르는 검은 그림자를 봤다. 그 새들은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참새나 비둘기가 아니었다. 늘씬한 몸에 큼직한 날개를 갖춘 새들은, 사람보다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나는 해가 질 때까지 돌 위에 앉아 이름 모를 새들을 구경했다. 

 

 

 

자연이 주는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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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의 군집을 보고 있자니 언뜻 전에 읽었던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주인공은 카야라는 소녀다. 독자는 책을 통해 그녀의 어린 시절부터 사랑하는 이와 함께 늙어갈 때까지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을 그려냈다는 점을 고려해도, 주인공 카야의 일생은 전혀 평탄하지 않았다. ‘백인 쓰레기’라고 멸시되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비천한 출신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받고 심지어는 이야기 내 중심 사건인 살인 의혹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중점은 자극적인 살인 사건이 아닌 카야가 살아가는 습지, 즉 자연이다. 습지가 가진 어둡고 질척한 이미지는 아름다운 바다나 강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습지의 풍부한 생태계 덕분에 카야는 철마다 날아드는 새를 구경하고, 희귀한 깃털을 모으며 마음의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심지어 믿었던 사람에게 상처받았을 때도 카야와 습지의 관계는 견고했다. 마을 사람들은 카야가 습지 속 판자촌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그녀를 무시했으나, 습지라는 공간은 되려 카야에게 위로를 준 셈이다.

 

주인공 카야와 같이, 나 또한 자연이 왜 나에게 위로가 되는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내 안에 언제나 무언가 주어야 한다는 불안감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나는 상냥하면서 재미있는, 그 사람의 시간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번에 떨어진 동아리처럼, 무언가에 지원할 때면 유능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그것이 좌절된 순간, 나 자신에게 크나큰 실망을 느낀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와 대비되게, 자연 속에서는 그런 의무감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이곳에서 나는 관찰자였다. 주변의 환경을 둘러보며 이 순간을 온전히 즐기기만 하면 되었다. 한강의 철새를 구경하며 받은 위로는 그러한 것이었다.      

 

 

 

관찰만을 위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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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나는 무념무상의 마음으로 걷고 싶어질 때면 항상 뚝섬유원지를 찾았다. 내가 애용하는 길은 강변과 가장 가까운, 하염없이 길게 이어지는 산책로이다. 


물에 근접해 여름에는 몰려드는 하루살이 떼를 피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간만에 자연에 둘러싸여 반가운 마음이 더 크다. 잠실 야구장이나 여러 대교같이 강 위로 우뚝 선 현대적인 건축물 구경도 쏠쏠하다. 


이곳에서 나는 그저 앞으로 걸어간다는 단순한 목적을 따른다. 머리보다 다리를 더 많이 쓰게 되면 잡다한 생각이 생기려다가도 흩어져 버린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너무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을 덜어내는 과정인, 일종의 디톡스인 셈이다. 


이런 비워내는 행위는 남이 아닌 내 감각에 집중하고 싶을 때 도움을 줬다. 물과 바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계절 별로 달라지는 풀 내음을 느끼기까지의 과정이 더욱 더 풍부해졌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가벼운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도 눈에 담는다. 열 지은 보트 무리 사이 수상 스포츠에 열중하는 사람들. 또 낚시하시는 분들. 거리는 멀어져도, 낚싯대 옆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가요가 등 뒤로 따라붙어 얼마간 나를 따라온다. 

 

자연과 함께하는 시간. 관찰자로 존재하는 시간 속에서 매번 위로받고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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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세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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