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허물은 벗어 던지고, 헤엄쳐 나아가기 ‘래기스’ [영화]

어떤 사람이 성장하는 방법
글 입력 2023.11.0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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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래기스>(Laggies, 2014)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계속 성장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특히 20대는, 어느 정도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음을 깨닫기도 하고, 성인이 되며 변화함을 느끼는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 먹고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 등이 가장 폭발하는 시기인 듯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와 주변의 친구들이 그랬고, 무엇보다도 20대에서도 후반이 된 지금의 내가 여전히 그렇기 때문이다.


나는 20대 후반이며, 대학교 졸업은 이미 했고, 아직도 앞으로의 진로가 막막하다. 인간관계는 물론이고 ‘어른의 일’ 같은 사회적인 활동 같은 건 여전히 어렵다. 심지어 어려운 건 일단 피하고 보기 때문에, 그런 두려움과 어색함은 나아지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이렇게 제자리에서 몸을 사리면서도, 이제는 어려움을 마주해서 깨고 나오고 싶기도 하다. 어쩌면 너무 겁이 많아 누군가가 뭔가를 깨주길 바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나여서, 이 영화의 주인공 ‘메간’을 보며 이상한 위로를 받았다. 그가 우유부단하게 이리저리 갈등하고, 그러다가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을 하고, 그렇게 꼬여버린 관계들에 휩쓸려 버리는 걸 보면서 말이다.

 

나 같은 사람들은 분명, 메간의 머릿속에 있던 거추장스럽고 복잡한 감정이 뭔지 알 것이다.


 

 

어떤 성장 


 

어떤 인물이 성장하는 모습을 담은 영화들이 많다. 우리는 그런 성장 영화들을 보며 자신감을 얻기도 하고, 나이와 상황, 그리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등에 따라 성장의 모양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되기도 한다.

 

이 영화는 20대 여성의 보통의 성장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 답답하게 느껴지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공감을 하게 만드는 주인공이 나온다. 자신의 가치관과 인간관계가 서로 제대로 꼬여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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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간은 스물여덟 살이고, 정신상담 분야를 공부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정확한 진로를 정하지 못하고 아빠의 직장에서 간판 드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친구들은 하나둘 결혼을 하고, 어른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에 성공한 것 같은데 혼자만 여전히 성장하지 못하고 머물러만 있는 느낌이다.

 

그에게는 인간관계도 어렵다.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과 계속 잘 지내긴 하지만 어딘가 불편해진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오래 잘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 ‘앤서니’를 사랑하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그 관계가 더 확장되는 건 부담스럽다. 그러다가,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아빠의 외도를 우연히 목격하게 되며 아빠에게도 실망하고, 그 와중에 앤서니에게 예상치 못한 프러포즈를 받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 상황을 일단 회피하는 것을 선택한다. 일단 청혼을 받아는 놨지만, 결국 일주일 동안 자기 계발 세미나에 간다는 거짓말을 하고는 집을 나와버린다. 자신만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다는 이유로.


메간은 이 기간에 세미나를 가는 대신, 아빠의 외도를 목격한 날 우연히 만났던 10대 소녀 ‘애니카’의 집에서 지내게 된다. 애니카와 그의 친구들과 함께 놀고, 그들을 도와주기도 하면서 오랜만에 인간관계에서의 편안함과 즐거움을 느낀다. 또, 애니카의 아빠 '크레이그'와도 가까워지면서 사람과 통한다는 느낌을 받게 되고, 둘의 관계도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면 다시 남자친구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그는, 너무나도 잘 통하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와 자신과 진정으로 어울리는 관계가 아니었기에 그저 머물러 있을 뿐이었던 오래된 관계의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그렇게 고민들이 작게 폭발한다. 다행히도.


 

 

"난 뱀이야. 허물을 오랫동안 질질 끌고 다닌 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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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메간은 인생의 세미나를 다녀온 셈이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치면 회피하는 것이 최선의 수단이었던 그는, 이 방황의 일주일을 지내면서 지금까지의 테두리를 벗어나 인간관계나 앞으로의 일상과 인생에 있어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마침내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허물을 오랫동안 질질 끌고 다닌 뱀이라는 걸.

 

메간은 후반부에 결국 드러나 버린 거짓말로 인해 진심으로 좋아했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그리고 다시 원래의 일상과 남자친구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마지막에 앤서니에게 진심을 말하고 애니카와 크레이그를 찾아가며, 오랫동안 질질 끌고 다닌 허물을 벗어던지게 된다.

 

누군가 대신 결정을 내려주도록 기다리는 습관을 끝내고 ‘나 그룹에서 빠질래’라고 선언하며, 관계 자체에 묶여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사람들의 관계에서 나가려는 용기를 드디어 낸 것이다. 이기적이고 잔인하지만, 지금 내뱉지 않으면 안 되는 선언이었다.

 

그는 우연히 잘 통하는 사람들을 만났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경험도 했다. 진짜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자신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 모호함을 질질 끌고 다니는 것은 마치 다른 사람인 척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건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짓이라는 걸 느꼈을 것이다. 왠지 마음 한쪽 어딘가에서는 기다려왔을 것 같은 이런 폭발을 통해, '나는 왜 이럴까?' 하는 자괴감과, ‘사람들이 취해 있는 것인지, 내가 취해 있는 것인지’ 하는 혼란스러움의 과정을 지나, 오히려 '그래,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드디어 인정하게 된 것이다.


‘Laggies’라는 제목은 단어 ‘lag(지체)’에서 나온, ‘목적이 없는 무기력한 청년’을 뜻한다. 원래 있는 단어는 아니다. 린 쉘턴 감독에 따르면, 이 영화의 각본가인 앤드리아 시걸이 이 단어가 잘 쓰이곤 하는 단어라고 말했고, 나중에 알고 보니 널리 쓰이는 단어는 아니었지만 그대로 ‘Laggies’가 정식 제목이 되었다고 한다. 대신 영국에서는 ‘Say When’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Say When’은 보통 음료를 따라주거나 음식을 누군가에게 덜어줄 때, 충분하다 싶을 때 그만!이라고 말하면 그만 줄게, 같은 말이다. 이 말과 함께 메간을 떠올려보니 이 영화의 제목으로 너무나 적절하다고 느껴진다. 내 유리잔에 물이 어느 정도여야 충분한지 아닌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이고, 그만해야 할 때가 언제인지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이며, 아마 꼭 그래야 할 것이다. 이제 진짜 꼼짝없이 어른이 되어야 할 시기이기 때문에.

 

아마 메간도 그 사실을, 이 인생의 세미나를 통해 가까스로 마주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목적 없이 물 위에 떠다니는 걸 그만해야 한다는 걸, 그리고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끼는 관계를 질질 끌고 다니는 것을 중단하는 ‘그만! 지금이야’라는 말을 해야 한다는 걸 말이다.

 

*

 

우리는 살아가며 나, 사람들, 관계, 변화 등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메간이 '누가 취해 있는 건지 모르겠다'라고 한탄한 것처럼, 너와 나 중 그 누구도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누군가의 삶의 방식에 대한 정답은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혼란스러워하고, 누군가에게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후반부에 '그만!'을 선언하면서 ‘물에 떠다니는 느낌’을 지우고 이제는 물을 힘차게 헤엄쳐 나가려는 메간처럼, 먼저 스스로에게 귀를 기울이면서 솔직할 수 있기 시작한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수시로 변화하는 인간관계 속에서 계속 노력을 쏟는다는 건,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 위함이니 말이다.

 

그러다 보면 메간과 애니카, 크레이그처럼 진정으로 통하는 귀한 관계를 새로이 만들 수도 있을 테고, 또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 관계의 변화를 겪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가 언젠가 또 똑같은 습관이 생겨날 수도, 또다시 물에 떠다니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때에는 조금 더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 있을 수도, 이러한 방황도 부드럽게 걸어 나갈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더 잘 아는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성장하곤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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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xels

 

 

[강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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