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상상력과 미적지근한 서사

영화 <엘리멘탈>
글 입력 2023.10.1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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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역주행으로 700만을 돌파한 <엘리멘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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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개봉한 영화를 통틀어 국내 박스오피스 2위, 외화 중에선 1위, 국내 총관객은 약 720만 명. 한국에서 상영된 디즈니 & 픽사 애니메이션 중 역대 최고의 성적이며 지난 2019년 개봉한 <겨울왕국 2> 이후로 700만 관객을 동원한 첫 애니메이션 영화다. 바로 <엘리멘탈>의 흥행 기록이다. 개봉 이후 4주 연속으로 관객 수가 상승한 영화는 <보헤미안 랩소디>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 4주차 이후에도 낙폭이 크지 않았고 여러 차례 역주행까지 일어나며 졸지에 한국은 북미를 제외한 <엘리멘탈> 흥행 1위 국가가 되었다. 이러한 이례적인 흥행 가도에는 영화가 특별한 타겟층 없이 아주 대중적이며 남녀노소 누구나 가족과 연인, 친구와 가벼운 마음으로 보러 갈 수 있다는 장점이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인기와는 별개로 감동과 여운보다는 다방면으로 진한 아쉬움을 남긴 2시간이었다.

 

 

 

한국계 미국 이민자 2세, 감독 피터 손의 자전적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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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에 이어 최근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에 출연한 마일스의 룸메이트 강케 리는 한국계라는 설정이다. 그의 침대 옆을 보면 강케 리가 한국계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손흥민의 포스터가 붙어있다. 스파이더맨 세레머니부터 톰 홀랜드와의 인연도 있고, 그의 별명인 SONNY는 대놓고 SONY를 연상케 하니 여러모로 흥미로운 이스터에그인 셈이다. 이때 강케 리를 연기한 성우가 바로 <엘리멘탈>의 감독 피터 손이다. 그의 부모님은 60년대 말에 미국으로 건너가 식료품점을 차려 생계를 이어 나갔다고 한다. 영화 속 앰버의 부모님이 겪은 일들은 곧 그의 부모님이 실제로 겪은 일들인 것이다. 이민자 구역으로 묘사된 파이어타운은 뉴욕의 코리아타운, 앰버가 아버지를 부르는 별칭 '아슈파'는 아빠, 웨이드가 진땀 흘려가며 먹은 숯콩은 한국의 매운 음식을 상징한다. 앰버가 부모님께 절을 올리는 모습은 피터 손의 아버지가 한국을 떠날 때 형에게 절을 올리는 모습에서 모티브를 얻었고, 불은 불끼리 만나야 한다는 앰버 할머니의 유언은 꼭 한국 여자와 결혼하라는 피터 손 할머니의 유언을 그대로 차용했다고 한다. 피터 손의 형제들은 할머니의 유언대로 모두 한국인과 결혼했으나 그는 유일하게 국제결혼을 했는데, 이는 웨이드와 사랑을 맺는 앰버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반영됐다. 이렇듯 감독의 자전적인 경험을 고스란히 녹인 한국과 이민자 가정에 대한 여러 사랑스러운 표현은 영화 곳곳에서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몇몇 장면에 잠깐 지나가는 단순한 시각적 묘사, 혹은 극 흐름과 관계없는 가벼운 디테일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를 보인다.

 

 

 

뜨거운 상상력과 미적지근한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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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아이디어에 비해 이야기는 아주 평이하게 흘러간다. 플롯은 올드스쿨하며 주제 의식은 뻔하다. 쉬운 이야기는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할 수 있던 요인이기도 하나 단순하고 관습적이며 인물 간의 갈등이 봉합되는 과정이 흑죽학죽에 그친다. 이를 전달하는 방식조차 픽사의 이름값을 고려하면 퍽 초라하다. 영화는 불 가족의 이민과 정착 과정을 보여주며 이민자 및 인종 차별, 계급 갈등 등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깊게 다룰 것 같은 태도를 보이더니, 정작 갈등을 해결하는 단계는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겉핥기에 그칠 거였다면 피터 손 감독 본연의 삶을 녹인 이민자 서사가 플롯의 큰 기둥으로 자리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나아가 중반부터 급격히 앰버와 웨이드의 로맨스에 치중하다 보니 각 시퀀스가 분절되어 이야기가 툭툭 끊기는 듯한 인상마저 준다. 영화가 반드시 특정 이슈에 그럴듯한 해답을 내놓아야 할 의무는 없다. 이를 다루는 방식이 반드시 진중해야 할 필요도 없다. 다만 그렇다면 왜 굳이 이민자 서사를 넣었는가? 장대하게 출발한 이민자 서사는 어느 순간 극 흐름에서 완전히 이탈한다. 결국 여러 사회적 문제에 대한 피상적 접근뿐이다. 영화 내 제시된 갈등 구조는 크게 봐도 3가지나 된다. 불과 타 원소 간의 인종 갈등부터 앰버와 부모님 간의 세대 갈등, 앰버와 웨이드 간의 계급 갈등까지. 철저히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첨예한 갈등들은 미시적으로 나열되다가 흐지부지 미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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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 간의 차별 우화를 훌륭하게 엮어 낸 <주토피아>, 아시안 소녀가 부모의 요구를 거부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담은 <메이의 새빨간 거짓말>, 가슴 사무치는 한국 이민자 서사를 담담하게 표현한 <미나리>, 그리고 한국계 미국 이민자는 식료품점을 운영한다는 클리셰를 코믹한 시트콤으로 풀어낸 <김씨네 편의점> 등 <엘리멘탈>은 기존 작품들의 수많은 설정을 그대로 가져왔다. 그러나 주토피아가 인종 차별에 대한 우화를 작품 전면으로 꼼꼼히 녹여낸 것과 달리 원소 간의 갈등과 차별 문제는 앰버와 웨이드의 로맨스에 잠깐 등장했다 스리슬쩍 빠지는 간단한 시련으로 전락한다. 여러 사회적 문제를 영화 안으로 끌어온 뒤 로맨스로 관객의 눈을 돌려놓고 나 몰라라 하는 꼴이다. 그들의 로맨스에 동반되는 주제 의식마저 매우 전형적인데 '사람은 저마다 다르지만, 인류는 평등하니 사이좋게 지내자' 같은 허울 좋은 원론에 머무른다. 무거운 주제를 평범하게 다루는 노선을 택했다면 최소한 극 중 인물들이 겪는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은 보여주었어야 한다. 엘리멘탈 시티의 외부인으로서 철저히 도외시되며 고난 끝에 외지에 힘겹게 정착한 앰버 부부의 서사는 앰버와 가업 인계 문제로 대립하는 가족 서사 내에서 이렇다 할 전환점 없이 두루뭉술하게 마무리된다. 앰버는 우리 말을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둥 웨이드 가족에게 은근히 타자화되는데, 대부분의 이민자 2세대는 한국땅 한 번 밟아본 적 없는 사실상 완전한 미국인임에도 생김새와 출신 성분으로 인해 숱한 차별을 받기 때문이다. 이 장면 역시 웨이드 일가가 특별한 악의 없이 매사에 친절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성격이라는 설정과 앰버의 순간적인 대처를 통해 참으로 간단하게 뭉뚱그려진다. 화목한 상류층 미국 가정에서 우환 없이 자란 백인 남성과 아시안 미국 이민자 2세 여성이 서로 '반대에 끌리는' 로맨스라는 설정도 스테레오타입을 그대로 따왔다. 웨이드가 앰버에게 사랑을 증명하는 장면 또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앰버를 지키는 구도로, 강자인 남성이 약자인 여성에게 헌신하여 이뤄지는 수직적 로맨스의 전통을 따랐다. 결국 계급과 인종이라는 명백한 두 가지 장벽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제시되지 않고 얼렁뚱땅 해소되어 버린다. 불과 물 사이의 로맨스가 가장 중요한 주제로 강조된 나머지 사회적 문제는 그저 그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찰나의 장애물 정도로 취급된다. 

 

 

 

불? 물? 체질이라는 게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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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멘탈>은 꾸준한 역주행으로 엄청난 뒷심을 보여준 것에 비해 스토리텔링의 뒷심은 굉장히 부족한 편이다. 초반부 비행기에서 내리는 물과 공기를 표현하는 재치나 엘리멘탈 시티의 아름다운 전경은 4원소 각자의 이야기와 앞으로 펼쳐질 드넓은 세계관을 기대하게 했다. 그러나 정작 공기와 흙은 그야말로 비중이 공기 수준이며 도시에 대한 설명도 단편적인 비주얼 묘사에 불과했다. 비주얼이 훌륭하다는 분명한 장점을 폄하하는 건 아니다. <엘리멘탈>은 웨이드와 앰버가 데이트하는 장면마다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했다. 다만 문제는 픽사의 지난 작품들과는 달리 스토리텔링이 아닌 비주얼텔링에 과하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중 가장 실망스러웠던 부분은 아이러니하게도 앰버와 웨이드가 손을 맞잡는 장면이다. 불과 물은 절대 섞일 수 없다며 펄펄 성내던 앰버의 부모님이 무색하게도 관계의 가장 큰 걸림돌인 원소의 차이는 아무런 설명 없이 해소되어 버린다. 손을 맞잡은 뒤 "우리 체질이 바뀐 거야!"라는 웨이드의 대사 하나로 말이다. 아니, 그래서 체질이 어떻게 왜 바뀐 건데? 금단의 만남을 극복하는 묘책으로 무엇을 보여줄지, 어떤 기발한 상상력으로 관객을 놀라게 할지가 <엘리멘탈>을 보기 전 가장 기대했던 지점이었던 터라 실망이 컸다. 특히 중후반부 플롯의 중심축이 앰버와 웨이드의 사랑이었기에 불과 물의 화합만큼은 조금 더 신선한 아이디어를 보여주길 바랐다. 더구나 이 클라이맥스는 로맨스의 절정일 뿐만 아니라 원소로 비유한 서로 다른 사람 간의 장벽을 뛰어넘는 방법론을 제안했어야 할 영화의 핵심부다. 서사의 디테일이 부족하고 초반에 늘어놓은 여러 갈등을 전부 미흡하게 처리했으니 뒷심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아주 적합하지 싶다. 눈을 즐겁게 하는 유려한 비주얼과 원소의 특성을 활용한 유머는 평균 이상은 되지만, 서사가 밋밋한 탓에 상대적으로 비주얼이 더욱 강조된다.

 

 

 

디즈니피케이션(Disneyfication)의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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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가 한국 시장 따위는 거들떠보지 않았던 그 시절, CJ와 드림웍스의 결탁으로 인해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이 상영관을 독점하던 2000년대에도 픽사의 국내 콘크리트 팬층은 꽤 탄탄한 편이었다. <릴로 앤 스티치>가 불후의 명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밀려 고작 서울 12만에 그치고 명작으로 평가받는 <로빈슨 가족>이 전국 10만을 간신히 찍은 동시대에 <니모를 찾아서>, <인크레더블>은 전국 100만을 넘겼다.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면 애니메이션 영화가 100만 명을 동원한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엄청난 일이었다. 때문에 기존의 코어팬들은 과거 디즈니가 픽사를 인수합병한다는 소식을 듣고 픽사만의 독창성이 디즈니에 잠식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런데 픽사는 합병 이후 <라따뚜이>, <월-E>, <업>, <토이 스토리 3>라는 미친 라인업을 선보이며 전 세계적으로 대흥행을 거뒀다. 디즈니 역시 <공주와 개구리>로 점차 반등의 기미를 보이더니 <겨울왕국> 시리즈로 화려한 부활을 알렸다. 전국에 렛잇고 열풍이 분 지도 올해로 딱 10년이 됐다. 그렇다. 인수합병 이후 거의 20년이 다 되어간다. <엘리멘탈>이 '디즈니스러운 픽사' 작품이라는 비판에 공감하지만, 어쩌면 그 말 자체가 논점 일탈의 오류일지도 모른다. 현재 디즈니와 픽사는 부정할 수 없는 한 몸이다. <주토피아>를 보며 유독 픽사스러운 뉘앙스가 담긴 디즈니 작품이라 느낀 지도 7년이 지났고, 묘하게 디즈니스러웠던 픽사의 <버즈 라이트이어>의 바로 다음 작품이 이번 <엘리멘탈>이다. 구체적으로 <주토피아>는 픽사스러움을 풍기면서도 과거 픽사의 명작들과 견주기에는 화법이 다소 디즈니스럽고, <엘리멘탈>은 픽사 특유의 상상력은 살짝 부족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퀄리티는 보장하는 정제된 공산품 같다. 이제 더 이상 두 회사 사이에 예전과 같은 뚜렷한 경계는 없다. 이 시점에서 픽사의 디즈니화(Disneyfication)를 논하기엔 아득히 멀리 왔달까. 디즈니피케이션은 도시가 디즈니랜드처럼 관광객을 위한 테마파크로 변모하는 현상을 뜻하는 용어다. 기술적으로 영화에 쓰는 말은 아니지만, 이미 디즈니피케이션은 문화 콘텐츠 전반에 걸쳐 발생하고 있다. 마틴 스콜세지가 마블 영화는 '테마파크'와 같다고 했을 때 반대 의견을 논리적으로 펼친 인물이 있었는가? <블랙 팬서>가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보다 부족하지 않다고 말한 밥 아이거? 아님, 톰 홀랜드? <엘리멘탈>은 픽사의 사랑스러운 상상력과 디즈니의 테마파크스러움을 적당히 섞어 만든 공산품으로서 국내에 약 700만 관객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픽사 스튜디오가 디즈니라는 우람한 프로파간다의 선전도구로 활용되는 모습을 본 팬들의 마음은 유독 쓰라릴 터이다.

 

 

[최태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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