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람들은 미술이 바위라고 생각한다 - 김범의 바위가 되는 법 [미술/전시]

이 세상에 모든 것은 편집되었다.
글 입력 2023.12.22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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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의 SNS 피드의 통일성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이상하게도 인스타그램에 업로드되는 사진들의 색감이나 분위기가 맞지 않으면 사소한 절망감에 빠지곤 한다. 이건 완벽한 ‘편집의 실패’다. 나도 실패자가 된 것 같고, 미적 감각이 사라지는 것 같고, 그리고 무엇보다 남들에게 그렇게 보이기 싫다. 이것이 바로 나의 ‘편집 행위’의 시작이다.

 

여러분의 일상 속 편집은 이루어지고 있는가. 나는 언론을 전공하면서 많은 미디어를 접한다. 그리고 미디어는 현실 세계에 대한 매개를 담은 것이라고 배웠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현실을 매개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보태기도 혹은 지워버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우습기도 슬프기도 한 편집을 시작하게 된 것일까.

 

이번 리움미술관에서 7월부터 진행한 김범 작가의 전시 <바위가 되는 법>을 깊이 감상하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다른 사람과 논의해보고 싶은 쟁점이 생겼다. 지금부터 <바위가 되는 법>에서 찾은 ‘사람들이 미술을 바위로 보는 이유’의 과정을 밝혀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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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 작가는 글을 잘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던 것일까. 그의 작품 속엔 텍스트가 가득하다. 감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작가의 텍스트에 집중해서 관람하는 것을 추천하신다는 교수님의 말씀 아래 내 신경도 그의 글에 곤두서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의 가정>이라는 작품을 보며 나도 한 가지 가정을 내리게 되었다. 가설처럼 느껴지는 가정이지만 아래와 같은 것을 제시해 본다.

 

 
“그는 과거 누군가에 의해 강압적인 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
 

 

이 작품은 작가가 ‘폭력적’이라고 일컬은 한 남자의 집에 초대된 관람객, 즉 우리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화분, 물뿌리개, 그리고 도끼 등 물체가 작은 방 안에 의미심장하게 배치되어 있고 이 사물들 옆엔 누가 썼는지 가늠조차 가지 않는 작은 글씨로 텍스트가 작성되어 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도끼’이다. 아마도 작가가 사전에 우리에게 폭력 프레임을 씌웠기 때문이겠지만, 텍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을 ‘그’라고 가정하지 말아 주세요.”

 

내 생각을 어떻게 알았지, 더 부끄러운 것은 이것이 내 고정관념이었다는 점이다. 작가에게 내 일차적인 욕구를 들킨 것만 같은 수치심이 일렁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뒤 나는 그 텍스트에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 편집되어 있었다고 느꼈다. 분명 그를 도끼와 동일시하지 말란 말이었지만, 그 글씨를 ‘그’가 썼다고 가정한다면 그 텍스트는 신뢰성을 잃을 것이 분명했다. 결국 “이것을 ‘그’라고 가정하지 말아 주세요. (사실 나거든요).” 이게 처음 그가 작성하려고 했던 본능적인 글이 아닐까?

 

순간 무서워졌다. 이 방을 나가고 싶어졌다. 주인공인 그의 인스타그램 피드 아니 게임의 한가운데에 들어온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손에 놀아나고 싶지 않았다. 서둘러 소름 끼치는 분위기를 그 공간에 버린 뒤 도망치듯이 빠져나왔다. 그의 진심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가 글을 편집만 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차라리 그가 바위였으면 좋겠다. 아무 의미도, 아무런 의도도 없는 그런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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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듯이 나온 그곳엔 아직 내가 도망가야 할 공간이 다시 존재했다. 종종걸음으로 도착한 곳은 작품 <전기 올가미>이었다. 다행히도 이 작품엔 텍스트가 없었다. 한숨을 돌렸다. 이번 작품은 진정으로 바위 같으려나? 하지만 이것은 이번 학기 나의 가장 큰 실수였다. 사실 이 작품은 보자마자 유쾌한 기분을 선사해 주지는 못한다. 누가 올가미를 보며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어린아이와, 설레는 크리스마스를 떠올리겠는가. 오히려 주변에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진지하게 깊은 대화를 나누길 바라겠다.

 

올가미를 보면 긴장감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소름 끼치는 일이 또 발생하고 말았다. 이 올가미는 ‘전기’가 통하는 ‘전기 올가미’이다. 작품의 뒤편에 보면 콘센트가 보이고 실제로 전기 올가미의 끝 부분이 콘센트에 꽂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텍스트도 없고 긴장감 흐르는 이 올가미에 정말 전기라도 흐른다면 내 두려움은 사라졌을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내가 작품을 멀리서 보기 위에 발걸음을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선 순간 내 얼굴이 전기 올가미의 원형 부분에 딱 걸치게 되었다. 순간 내 얼굴에 전기가 통하는 듯했고,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렇다, 관람객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이 힘이 바로 ‘전기 올가미’의 ‘전기’인 것이다. 나는 결국 김범 작가의 올가미에 이렇게 걸려들고 말았다.

 

더 무서운 것은 이 작품에 어떠한 세부설명도 적혀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작가는 텍스트를 숨긴 뒤 나의 고정관념을 관찰했다. ‘무서움과 두려움’이 이렇게 뻔한 취급을 받을 수 있음을 나는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알았다. 관람객들이 이 올가미에 목을 걸며 사진을 찍는 순간, 작가의 목소리가 서서히 들리지 않았을까. “난 당연히 당신이 그런 행동을 할 줄 알았어요, 그거 일부러 내가 그렇게 설계했거든요.” 누구의 의도에 부합하며 살아가는 것을 극도록 싫어하는 나란 관람객이 그 의도에 정확히 걸려 넘어진 순간이었다. 그래서 10분간 작품과 씨름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버텨보아도 이미 난 올가미에 묶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만큼 무서운 게 없다고 느껴졌다. 그것은 내 생각의 정체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올가미에 걸려 더 이상 아무 작품을 보지 못한다면, 난 지금 이 글을 작성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그 올가미에서 풀어준 한 작품이 있다. 바로 <기도하는 통닭>이다. 걸었다. 정말 멍한 상태로 한참을 걸었다. 다음 교시에 바로 전공 수업이 있지만, 그것은 나에게 정말로 중요하지 않았다. 얼른 올가미가 준 전기로부터 해체되고 싶었다. 그러다 <기도하는 통닭> 작품에 멈춰 섰다. 사실 작품이 끌렸다기보다, 그 앞에 서 있는 많은 학우들과 교수님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나의 SOS 신호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교수님은 나에게 김범 작가가 ‘통닭’을 욕망의 대상으로 표현한다는 단서를 던져주셨다. 그 후, 이 작품에서 통닭이 욕망하는 것이 무엇 일지에 대한 질문도 던져주셨다. 다양한 학우분들도 이에 대해 의견을 주셨다.

 

그 순간 방탈출을 풀 때, 오래 풀리지 않던 문제가 한순간에 풀리듯 내 머릿속에 스파크가 일어났고 누군가에게는 우습지만 나에겐 우습지만은 않은 통닭의 소원이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통닭은 지금 알을 잘 낳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어요!”

 

학우분들과 교수님이 기분 좋은 웃음을 주셨다. 그렇게 생각해보지는 않았다는 말과 동시에 다른 학우분들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도 얻었다. 다른 사람에게 먹히지 않고 싶다는 소원, 한 번 날게 해 달라는 소원 등등 아이디어들이 나에게 힘이 되어 이 작품이 바위 그 자체로 작용하는 경험을 느꼈다. 즉 미술을 통해 내가 ‘나’ 스스로 행동하고 생각하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분명 전기로부터 벗어났다는 뜻일 것이다. 작가가 설계한 의도와 정답을 맞히고 싶어서가 아니다, 적어도 난 그의 편집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전시라는 편집된 공간에서 편집된 작품으로 편집된 생각을 하는 것은 너무 발전 가능성이 없지 않은지 고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라도 편집되지 말아야지 이 공간에서, 편집되지 않을 만한 행동과 말을 해야지!”라고 속으로 외치면서 말이다.

 

사람들은 미술이 바위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작가의 작품을 해석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편집되지 않은 물체 그 자체로서 작용했으면 좋겠다는 바람’ 이유는 정말 당연할 것이고, 사실 미술 작품, 특히 현대 미술 작품은 더욱이 바위로서만 존재할 수 없기에 우리는 미술이 있는 그대로의 바위가 되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정말 바위가 되길 바라는 대상이 미술일까. 아니면 우리일까.

 

앞서 편집이라는 것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우리를 편집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해 주는 누군가를 만나길 원한다. 그러나 자기 PR, 라벨링 등 현대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편집해야만 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좋은 곳에 취업을 하기 위해서 거짓된 모습을 꾸미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사랑받기 위해 자신의 본질을 쉽게 숨긴다. 이러한 우리의 이중성은 우리가 미술 작품을 해석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겠다. 편집되지 않은 미술을 바라보고 싶은 것, 이는 즉 편집되지 않은 나 스스로를 마주하고 싶은 욕망이다. 똑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사람들마다 해석이 다른 이유, 각자가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지. 그래서 미술관에 가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새로운 생각을 찾아내려고 애쓴다. 우리도 누군가에 우리로 비치고ᅟᅵᆫ가요 싶기 때문이다. 물론 앞서 글에서 발견한 나의 모습만 보아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바위는 그저 바위여도 괜찮다. 통닭은 그저 통닭이어도 괜찮다. 편집되지 않은 나여도 괜찮다, 나는 나니까. 이 점을 기억하고 있다면, 이제 미술이 바위처럼 느껴지지 않는 순간도 바위처럼 느껴지게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나에 대한 확신과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은 미술을 나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임주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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