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와 요코 <은밀한 결정>

글 입력 2023.10.15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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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결정, 요가와 요코.jpg

 

 

주인공 ‘나’는 소설가이다. 한때는 그랬다. 소설이 사라지기 전까진. 소설 속의 고립된 한 마을은 아침마다 차갑고 싸늘한 느낌과 함께 새로운 “소멸”이 찾아온다. 하루는 새가 없어지고 하루는 장미가 없어지고 어느 날은 소설이 없어진다. 마을 사람들은 소멸이 일어나면 그에 대한 기억도 감정도 모두 사라진다. 비밀경찰은 소멸이 일어난 사물을 철저하게 처리하고 몇몇 기억이 남아있는 사람들은 잡아간다. 그들은 기억 사냥을 위한 강제 불시 검문을 서슴지 않는다. 사물을 넘어 육체의 소멸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왼 다리, 오른팔, 뺨에 대한 감각과 기억을 잃고 점점 자신이 무엇인지를 잃어간 채 목소리를 끝으로 마지막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소설 속엔 또 다른 소설이 등장한다. 바로 소설가 ‘나’가 쓰고 있는 원고다. ‘나’가 쓰는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타자기를 배우다가 점점 타자기에 의존하게 되어 결국 타자기 없이는 말하지 못하게 된다. 타자기 안에 자신의 목소리가 갇혀버리고 목소리를 잃어버린다. 


이 두 소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사물, 육체, 목소리의 소멸은 그에 대한 소멸로 끝나지 않고 자아를 잃는 것이나 다름없다. 달력이 없어졌을 때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불편하다는 소리 없이 익숙해질 거라는 생각으로 달력을 다 불태웠다. 기억이 소멸하지 않는 사람들은 나서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은신처로 숨는다. 모두 비밀경찰에 저항하지 않고 산다. 그렇게 자의식 없이 하나하나 소멸에 순응하며 자신을 잃어버리고 온통 공허한 구멍만 남게 된다. 소설 속의 주인공도 결국 소멸 속에서 자신을 찾지 못하고 자신도 사라져 버린다.

 

이 소설이 1994년에 처음 출간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조금 놀랐다. 소설 속에선 그 세월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설을 읽는 동안 시대적 배경을 가늠할 수 없었다. 공간적 배경도 외딴섬 마을이라는 것뿐이었으며 주인공 이름도 나오지 않고 주변 인물은 할아버지, R씨라고만 칭한다. 이런 모호한 시공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더욱 잃기 쉽게 한다.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저항했다면, 하물며 이미 소멸한 페리를 어찌저찌 고쳐서 섬을 떠난 자들처럼 소멸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했다면 어땠을까.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는 요즘 시대는 “나”를 잃어버리기 쉬운 세상이다. 사고 회로는 만연한 알고리즘에 갇혀있고 루머, 가짜 뉴스, 여론몰이를 주체적인 판단도 없이 곧장 믿어버린다. 사람들은 이제 생각하는 것을 귀찮아하며 전부 검색창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 이 소설은 컴퓨터에 자아를 위탁하는 현대 사회의 풍조를 돌이켜 보고 그 속에서 진정한 나는 어떻게 지킬 수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했다.

 

"기억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무서운 겁니다. 소멸의 타격이 점점 커져서 손쓸 시기를 놓치고도 본인은 그 중대함을 알지 못해요."

 

 

[박주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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