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상처 받은 영혼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 바튼 아카데미 [영화]

우리 중 누구도 홀로 태어나지 않는다, <바튼 아카데미(2023)>
글 입력 2024.04.08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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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라는 단어를 나와 연결하여 이야기하기엔 아직 낯부끄럽게 느껴질 정도로 미성숙한 나이이지만, 그래도 한번은 문득, 내가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지금은 이름도 생각 안 나는 영화를 보면서 있었던 일이다. 예전 같았으면 이해하지 못했을 주인공의 답답한 행위를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바라봤을 때, 새삼 내가 참 낯설게 느껴졌다. 해가 지나고 나이가 들수록 왠지 누군가를 판단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비단 사람뿐만이 아니다, 같이 영화를 본 친구와 상영관을 나서며 나누는 대화에서도 나는 종종 혼란스러워진다. ‘그래서 영화는 어땠어?’와 같은 간단한 선호를 묻는 질문에 답을 하는 것마저 어려워졌다. 무엇이 싫고, 무엇이 좋은지. 그리고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나쁜 사람인지. 해가 지날수록 그걸 판단하는 게 더 어려워진다. 싫고 좋고, 그 두 가지 답 중 하나만 골라서 이야기하면 될 텐데.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또 어떤 사람이 싫은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나에겐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일’이었다. 뭐든 확실한 답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기준에서 ‘싫은’, 혹은 ‘나쁜’ 행위를 하는 사람의 심정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해하는 상황이 늘어난다는 것은 참 피곤한 일이었다. 어디에든 내가 꼭 있었다고 해야 할까. 타인에게서 바라본 내 모습은 자꾸 애매모호한 판단을 내리게 했다. 동시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해하는 상황이 더 많아지는 것이구나.’하고.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바튼 아카데미>에는 무엇에 상처받아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버린 세 인물이 등장한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관계 초반의 그들은 자신의 관점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서로를 ‘싫은’ 사람으로 분류한다. 하지만 서로를 이해하는 상황을 함께 겪고, 서로에게서 자신의 일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비로소 위로와 공감이라는 따뜻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관객에게 쥐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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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의 크리스마스, 사립 기숙학교, 상처받은 영혼들, 그리고 만나게 되는 확실한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까지. <바튼 아카데미>의 키워드는 분명 어디선가 본 대안 가족 서사와 연말 힐링물의 클리셰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한 서사가 어떤 전형성을 가졌고, 또 이 영화가 어떻게 그 논리를 따라가고 있는지/아닌지에 대해서 논할 생각은 없다. 그럴 능력도 안 될뿐더러, 그것이 영화를 이야기하기에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바튼 아카데미>에서 논하고 싶은 특이점은 ‘위로’를 바라보는 영화의 담백한 태도이다. 먼저 학교에 남겨진 세 인물을 보자. 지난 삶의 사건들을 통해 상처받아 가족도 친구도 없이 스스로를 가둬버린 선생님, 학비를 벌기 위해 베트남전에 참전한 아들을 잃고 삶의 이유를 잃어버린 조리사, 마지막으로 정신병원에 있는 친부와 새 삶을 시작한 어머니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학생까지. 이들이 가진 슬픔은 각자 다른 모양을 하고 있지만, 모두 상처받은 영혼이라는 것은 동일하다. 


행복은 제각기 같은 모양이지만, 슬픔은 어쩐지 다 다른 모양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상처받은 사람들은 다 비슷한 얼굴을 지니고 있다. <바튼 아카데미>는 이들 개인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그리고 이들이 그로 하여금 얼마나 정서적으로 고립되어있는지를 보여주면서도,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고독함을 매개로 그들을 바튼 아카데미라는 공간적 장소에 묶어둔다. 그렇게 기숙학교 안에서 보내는 몇 주간의 시간을 통해 그들이 서로의 불행과 슬픔을 그저 바라봄으로써 공감하게 한다. 우연히 털리의 우울증 약을 발견한 허넘은 뒤를 돌아 자신의 우울증 약을 바라보며 웃는다. 타인에게서 바라본 나의 모습을 통해 그의 고독한 외로움을 어렴풋이 이해하는 것, <바튼 아카데미>가 가진 위로의 특이점은 바로 이곳에 있다. 영화는 결코 인물들이 각자의 삶에 침투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각자의 슬픔과 고독을 통해 ‘나와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의 존재만으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위로가 되어준다. 그 담백함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진정한 위로란, 어쩌면 나와 비슷한 타인의 존재만으로 가능한 것이며, 그것이 전부이다. 위로란 그렇게 별거 아님을 또 한 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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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튼 아카데미>는 이렇듯 ‘나와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의 존재를 통해 받은 수평적 연대를 보여줌과 동시에 윗세대가 아랫세대에게 전하는 수직적 연대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는 사제 간인 허넘과 털리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깐깐한 교사인 허넘은 자유로운(혹은, 해방되고자 하는)학생 털리를 규칙을 통해 제어하려고 하지만, 점점 그에게 엄격한 규제보단 진정한 삶의 충고들을 통해 진솔한 대화를 이어 나간다. 허넘은 자신이 실패했던 지난 시간에서 경험한 바를 털리에게 전해주며 자기 삶을 되짚는다. 허넘의 조언이자 회상은 그가 단지 ‘한물간 윗세대’가 아닌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동료이자, 기댈만한 어른임을 느끼게 한다.


영화의 후반부, 보스턴에서의 짧은 여행이 결국 문제가 되어 허넘은 털리 대신 책임을 지고 학교를 떠나기로 한다. 학교를 떠나기 전 허넘과 털리가 나눴던 뜨거운 악수가 인상적이었다. 누군가는 학교를 떠나고 또 누군가는 학교에 남겨지지만, 전혀 아쉽지 않았다. 짧은 방학을 통해 얻은 인생의 동료는 각자 자리에서 열심히 삶을 이어나갈 것이다. 마주 잡은 손에서 확신이 느껴졌다. 누군가의 삶에 침투하지 않고도 우리는 서로를 위로할 수 있다. 그저 존재하고, 확신하는 것만으로도. 


진정으로 상처받은 사람만이 상처받은 타인을 알아볼 수 있다. 그리고 자기 삶의 고독을 눈치챈 사람만이 누군가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다. 쓰러지고 나서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떠오른다. <바튼 아카데미>는 그 반동의 경이로움이 나의 삶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어렴풋한 희망을 느끼게 했던 영화였다. 삶이 아무리 닭장의 횃대처럼 옹색하게 느껴진대도, 결국 영화는 한 줄기 희망을 가지고 말을 건넨다. 동굴에 들어가고 싶은 누군가에게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결국 앙트레 누, 우리만의 비밀로 부친 이야기들을 통해 조금의 위안이라도 느끼길 바라며.

 

 

[차수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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