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평전>을 읽고

아름다운 영혼, 청년 전태일을 엿보다
글 입력 2023.10.08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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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체에게 단 하나의 본능이 있다면, 그것은 생명을 영위하고 죽음을 피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어떠한 상급의 의욕이나 욕구가 있을지라도, 기저에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신체를 온존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자살'을 '죽고 싶은 마음'과 동치가 아니라고 늘 주장해왔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현실적 삶을 영위하기 힘든 사회적 상황에 맞물린 사회적 타살이라는 것이다. 생명체가 자신의 생명을 끊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만이 신념을 위해 죽는다는 것은 매우 신기한 일이다.


그것은 평범한 동물적 관점에서 납득하기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삶을 포기하는 판단을 내릴 정도로 개체 단위로 삶의 고통에 내몰린 것도 아니고, 종을 보존하기 위해 설계된 부분도 아닌 자신의 '신념'을 위해 죽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이질적이다.

 

사실 자살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측면에서 나는 인간 전태일의 다른 노력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어느 정도의 비판적 의사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대체로 살아있으면 기회가 온다고 생각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이 책이 더욱 와닿았다.

 

내 말을 다시 돌려받자면, 인간 전태일 개인에게는 살아만 있다면 사실 언제든 기회가 왔을 것이다. 그는 재단사로서 나름 안정적 가도에 올랐다. 그 나름의 안정적인 수입을 올릴 수 있었고 부모님을 봉양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 옆에는 사회에 대한 불만마저도 함께 토로할 수 있는 동지와 친구들이 있었다. 사회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깨어있으며', 어느 순간 누군가의 희생 또는 사회의 격변으로 다가올 노동법의 준수나 노동자 처우 개선을 바라보며 '이게 옳게 된 세상이지'라고 끄덕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바보회를 만들었고, 근로기준법을 설파했고, 전혀 모르던 재단사들에게 인사를 청하며 연대를 요청하기도 했다. 노동운동을 하다 해고를 당해 다시 일자리가 있는 곳에서 일을 하기도 했으며, 그럼에도 노동자들을 만나거나 노동 실태 자료를 수집했다. 모은 자료를 들고 시청의 근로감독관과 노동청도 찾아갔으나 돌아오는 것은 종무소식이었다. 그는 개인이 바꿀 수 없는 하나의 거대한 압력을 느낀 것이다. 이 압력 하에서 그는 설움을 느낀다. 그 설움은 홀로 바꿀 수 없는 거대한 기득권의 부조리와 담합이고, 이것이 그릇된 줄 모르는 사회의 잘못된 인식이었다. 결국 그는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스스로 산화한다.

 

[누가 바보이며 누가 바보가 아닌가? 우리 사회에서 똑똑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뜻하는가? (중략) 그것은 세상의 '똑똑한' 자들에 대한 불을 토하는 매도였고, 세상의 '약삭빠른' 자들에게 돌려주는 동정어린 비웃음이었다. (중략) 오늘의 현실이 절대로 변화될 수 없는 영구불변한 현실이라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약은' 자들이 참된 현실주의자는 아니다.] - <전태일 평전>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 <전태일 평전>

 

전태일 사상을 '각성된 밑바닥 인간의 사상'이라고 표현한 평전의 구가 마음에 들었다. 밑바닥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히 소외되고 배우지 못한 계층일 것이다. 배움의 불평등성으로 불우하게도 유려한 문체와 화려한 언변을 가지지 못해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개진하지조차 못했던 계층이다. 그보다도, 발언의 장 마저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던 그런 계층이다. 전태일 역시 그러했고 그의 말도 투박했다. 다만 그는 연민을 가진 사람이었다. 본인이 하루짜리 일자리를 전전할 때도 훨씬 힘든 환경에서 노동권 보장 없이 고생하는 여공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기득권의 잘못과 압제를 그만의 투박한 언어로 잘못되었다 외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의 너희가 만든 기준으로 '밑바닥'에 있는 인간이라고, 그 인간의 격마저 밑바닥으로 격하시킬 수 없다. 당연한 권리를 당연하게 보장하라,

 

[모든 인간이 서로를 적대하고 있는 이 현실, 강자가 약자를 부조리하게 학대하는 이 현실, '인간 최소한의 요구'마저도 외면당해 짓밟히고 있는 이 현실은 분명히 불의한 현실이었다. 그것은 개조되어야할 현실이었다.] - <전태일 평전>

 

약육강식의 세계를 찬양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이런 궁금증이 든다. 왜 그렇게까지 무식하고 무례한가? 왜 본인은 약육강식의 논리에서 늘 '강자'라고 상상하고 있는지 말이다. 왜 당신 같은 기회를 가지지 못한 약자에게 그렇게 가혹한거지. 가지고 있는 통화, 권력, 물리력으로 인해 당신은 그러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그렇지 못한 인간과 다르다고 정의하는 것인가.

 

[투쟁을 포기하고 연명할 것이냐? 그것은 평화시장의 파괴되고 있는 동심들을 외면하고, 아니 인간성을 파괴하는 현실 앞에 굴복하고, 그 아래에서 굴종의 삶을 감수한다는 것을 뜻한다.] - <전태일 평전>

 

각설, 결국 전태일은 최종의 수단으로 사회에 경종을 울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며 점차 죽음을 불사한 투쟁을 생각한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 <전태일 평전>

 

[그의 죽음과 함께 평화시장 어두운 골방 속의 참혹한 노동에 관한 소식이 세상에 알려졌고, 그것이 발단이 되어 전체 한국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인간 이하의 고통에 대

한 관심이 새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 <전태일 평전>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책을 껴안은 채 산화했다.

 

그것은 그가 바란대로의, 이 부조리한 세상에 울리는 경종이었고, 그 개인으로서는 어떤 방법으로도 바꿀 수 없었던 사회의 거대한 탄압 속에 마지막으로 혼을 담아 태운 맞불이었다. 오로지 인간만이 때로 신념을 위해 죽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당연히 아니다. 전태일은 애초에 죽음에 초연한 초인이었나, 아니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소실된 만화 속의 괴물이었나.

 

전태일은 두려워하고, 고민하고, 투쟁했다. 그러고선 그의 목숨을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버렸다.

 

이런 생각을 했다.

 

전태일이 대단한 사람인 것을 상정하더라도, 전태일과 같은 사람이 만들어져 태어날 리가 없다. 인간을 물질화하고 격을 함부로 나누는, 그에 따라 차별하고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하지 않는 세태가 평범하게 웃고, 농담하고, 가끔 일을 마치고 술이나 마셨을 밝은 청년을 전태일로 만들어냈다. 약자에 대해 연민을 느낄 줄 알고 잘못된 것을 그렇게 느낄 줄 알며 불쌍한 사람들의 토로에 감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열정적인 청년이 '전태일'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도 많은 '전태일'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발 죽지는 말아라. 삶이라는 것은 그 모든 위대한 일과 명분을 인지하면서도, 그럼에도 재차 강조할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말하고, 언제든 연대하자. 모두가 스크럼을 짜면 아무도 죽지 않아도 된다. 역사 속의 약자가 대항한 방식은 늘 스크럼을 짜는 것이었고, 그렇게 뭉쳐진 군중은 결코 약자로 불린 적이 없었다. 연대하고, 서로 기대자.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 <전태일 수기>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남의 고통에 시니컬해지는 것은 굉장히 쉬운 일이라는 것이다. 무기력함과 패배주의가 팽배해지는 사회, 반지성주의가 흥하고 있는 작금의 20대를 볼 때마다 나는 우리 사회가 전태일을 빠르게 잊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계층 상승에 대한 희망이 좌절되고 양극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무기력증이 흥행하고, 약자들끼리 서로의 목줄을 과시하며 상대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며 오히려 비난을 가하는 세태. 자신들이 침해당하는 권리가 무엇인지 알지도, 알고 싶지도 않은 이 시대. 국민의 대부분이 여전히 노동자임에도 노동자를 배려하지 않는 말들이 환호를 받는 광기의 시대. 지금이야말로 다시금 아름다운 영혼, 전태일을 기억해야 할 때다.

 

 

[김우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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