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여행이 내게 남긴 태양의 잔상

해파리로 죽지 않아도 빛이 날 수 있다면
글 입력 2023.09.29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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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여행을 다녀왔다. 이는 현재까지 내가 태어난 곳으로부터 가장 멀리 떠난 여정이 되었다. 한국에서 스페인까지의 거리는 대략 구천에서 만킬로미터가 된다고 한다. 13시간의 비행 끝에 다다른 그곳에서 열흘이 채 안되는 날 동안 머물렀다.

 

나의 첫 유럽여행은 패키지 투어로 이루어졌다. 밥그릇에 담긴 밥알의 숫자를 세는 사람처럼 어딘지 강박적이고, 쓸데없어 보이기도 한 무언가에 몰두해있던터라 고작 일주일의 여행 계획을 세우기도 벅찼기 때문이다. 비행기에 오른 순간부터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마치 다른 자아를 꺼낸 사람처럼, 한국에서 있었던 일, 해야 하는 일, 하지만 그러지 못한 일들에 대해서 절대로 생각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가득 찬 곳에서 보낸 시간들은 모조리 즐거웠다. 그 많은 즐거운 것들 가운데서 유독 기억에 남은 건 그곳의 건조한 기후와 뜨거운 태양빛이다. 살이 타는 걸 그렇게나 걱정했으면서 어쩌다 선크림을 까먹은 날에도 한번 태워보지 뭐,하고 생각했다.

 

종종 주어지는 자유시간에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 다른 한 손에는 휴대폰을 꼭 쥐고 쏟아지는 열에너지를 쬐었다. 반사되는 빛이 눈을 멀게 할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김지선씨가 생각났다. 김지선씨는 자진해서 해파리가 된, 아니 해파리가 되려 했으나 끝까지 인간으로 남아 빛이 된 여자다.

 

그는 여행 가기 직전 읽었던 소설집 '유령의 마음으로'에 수록된 '빛이 나지 않아요'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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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끝내 완전한 해파리가 되지 못한 김지선씨는 추측건대 스스로 인간이길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마음은 '사실은 해파리가 되고 싶지 않아'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사랑하는 대상이 곁에 있을 때 모호하면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새하얗고 선명한 뭉게구름, 그러나 껴안을 수도 떼어 먹을 수도 없는 뭉게구름처럼 말이다.

 

변화한다는 것은 과거로부터 이별한다는 뜻이고, 그것은 생애주기 동안 꼭 겪을 수 밖에 없는 상실의 경험이 된다.

 

그때 알았다. 나는 자꾸만 변하는 내가, 친구가, 환경이, 상황이 무서웠다는 걸. 좋았던 시간은 자꾸만 점처럼 찍히고 그렇지 않은 시간만 선이 되고 면이 되는 것 같아 도망치고 싶었다는 걸. 나도 빛나는 해파리가 되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있는 그대로 내 곁에 남아주길 바라왔다는 걸 말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자취방이 아닌 본집에서 일주일의 시간을 더 보내고 돌아왔다. 모처럼 혼자 남은 주말, 넷플릭스를 켜고 아껴뒀던 '미드나잇 가스펠'의 마지막화를 보기 시작했다. 꼭 필요한 순간 신의 선물처럼 눈 앞에 떨어지는 문장들이 있다. 클랜시의 엄마가 말했다.

 

“고통도 변한단다. 고통의 근원을 더듬어 가보면 그게 사랑이라는 건 너도 알잖니."

 

이곳의 습한 더위도 많이 가셨다는 걸 느꼈다. 모든 게 변하고 계속해서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랑스런 순간들이 생기겠지만 나쁘지 않을 성 싶었다. 김지선씨가 결국 자신의 빛을 마주하며 감탄했던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해파리로 죽지 않아도 빛이 날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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