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미술은 철학도 문학도 아니다, 그저 그림일 뿐 [미술/전시]

김환기 회고전 <한 점 하늘>
글 입력 2023.09.0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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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은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하늘, 바다, 산, 바위처럼 있는 거다.

꽃의 개념이 생기기 전, 꽃이란 이름이 있기 전을 생각해 본다.

막연한 추상일 뿐이다

 

『김환기 뉴욕일기』, 환기미술관 2019

 

  

한국 추상미술의 첫 장을 연 화가 김환기의 회고전<한 점 하늘>을 보기 위해 호암미술관으로 향했다.

 

이번 회고전에서는 총 120여 점의 작품과 작가의 시기별 대표작은 물론 초기작과 미공개작, 드로잉과 스케치북 등 다양한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더불어 가족들과 주고받은 편지와 사진, 스크랩북 등의 다양한 자료를 통해 그의 예술을 더욱 깊이 관찰해 볼 수 있다.

 

 

 

그가 사랑한 달과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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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항아리

 

지평선 위에 항아리가 둥그렇게 앉아있다.

굽이 좁다 못해 둥실 떠 있다.

 

둥근 하늘과 둥근 항아리와

푸른 하늘과 흰 항아리와 틀림없는 한쌍이다.

 

닭이 알을 낳듯이

사람의 손에서 쏙 빠진 항아리다.

 

「그림에 부치는 시」 중에서, 『신천지』, 1949년 2월호

 

   

‘조선의 미’를 자신의 미학으로 삼았던 김환기. 그중에서도 특히 그는 ‘조선의 백자’에 푹 빠지게 된다. 그는 화실과 더불어 온 집안을 백자로 채우기도 하였고 그의 여러 작품에 수많은 백자 항아리를 그려 넣는다. 과연 그는 백자의 어떠한 매력에 흠뻑 빠졌을까.

 

당시 백자는 너무도 흔한 것이었고 지극히 평범한 도자기였다. 백자는 화려한 무늬도 정교한 비례와 균형을 갖추고 있지 않다. 조선의 도공은 도자기를 잘 만들기 위해 인위적인 이론, 기교에 집착하지 않았다. 잘 만들고 싶은 마음 없이 그저 ‘닭이 알을 낳듯이 자연에서 출산한 것’처럼 무심히 도자기를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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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글다 해서 다 같지가 않다. 모두가 흰 빛깔이다. 그 흰 빛깔이 모두가 다르다. 단순한 원형이, 단순한 순백이, 그렇게 복잡하고, 그렇게 미묘하고, 그렇게 불가사의한 미를 발산할 수가 없다.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환기미술관, 2005

 

 

김환기는 백자의 고유한 색채의 특색과 초탈한 순박미를 갖춘 백자의 매력에 매료되었다. 그는 이것이 곧 자연미이며 조선의 미, 그리고 자신이 추구해야 할 미의 정수임을 깨닫는다.

 

김환기는 둥근 백자를 보고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떠올린다. 190cm에 가까운 큰 키의 김환기가 위에서 내려다본 백자는 공중에 둥실 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각각 조금씩 다른 둥근 형태의 백자는 매일 밤 변하는 달의 모양과 닮아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의 백자를 '달항아리'라고 불렀고 그의 그림에 달과 항아리를 함께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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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 그림의 달은 대부분 푸른빛을 띤다. 어두운 밤을 환히 비추는 흰 달을 푸르게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시조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둥근 하늘과 둥근 항아리와 푸른 하늘과 흰 항아리와 틀림없는 한쌍’이라고 표현된 것처럼 이들 모두가 하나의 자연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자연과 그 자연을 닮은 항아리, 그 모두를 한 그림에 추상화한 것이 아닐까.

 

 


 세계적이려면 가장 민족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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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양 사람이요, 한국 사람이다. 내가 아무리 비약하고 변모하더라도 내 이상의 것을 할 수 없다.  내 그림은 동양 사람의 그림이요, 철두철미 한국 사람의 그림일 수밖에 없다. 세계적이려면 가장 민족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편편상」중에서, 『사상계』, 1961년 9월호

 

 

그는 3년간 파리에서 활동하던 시기에도 여전히 한국의 미를 탐구했다. 김환기는 당시 파리의 서양미술 흐름을 따라가지 않고 그만의 독자적인 예술을 추구하여 한국적인 주제를 더욱 구체화하였다. 그가 좋아하던 달항아리뿐만 아니라 하늘, 바다, 산과 같은 자연 풍경, 영원을 의미하는 십장생의 학과 사슴을 주제로 삼기도 하였다. 그는 자연과 예술의 영원성을 그만의 추상 세계를 통해 단순화, 상징화하였으며 그를 통해 자연과 삶의 이상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무한한 '점의 우주'를 창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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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그 점을 찍는 일을 하고 있다. 오만가지, 죽어간 사람, 살아있는 사람, 흐르는 강, 내가 오르던 산, 돌, 풀 포기, 꽃잎 – 실로 오만 가지를 생각하며 내일을 알 수 없는 미래를 생각하며 점을 찍어간다. 그래. 내 그림을 보니 어떻더냐? 나는 오늘의 이 역사 위에 서서 나의 최대한의 노력이 그저 그 정도란다. 예술이란 절정이 없는 산이로다.

 

뉴욕에서 보내온 김환기의 편지

 

 

뉴욕시대 김환기는 점과 선에 의한 다양한 구성을 시도한다. 그것이 점차 ‘전면점화’로 진행되면서 그의 새로운 예술 세계가 펼쳐진다. 전면점화란 김환기만의 화풍으로, 먼저 점을 찍고 점을 에워싼 사각의 테두리를 그리면서 화면 전체를 확대해 가는 것이다.

 

“내가 그리는 선, 하늘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

 

그의 '점의 우주' 속 수많은 점은 그의 그리움이 담겨있다. 그의 고향, 고국의 하늘과 자연, 보고싶은 가족과 친구들. 우리가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며 누군가를 그리워하듯 그는 자신의 점의 우주 속에 그리움 하나하나를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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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도 철학도 문학도 아니다. 그저 그림일 뿐이다. 이 자연과 같이 점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림일 뿐이다.

 

『김환기 뉴욕일기』, 환기미술관, 2019

 

 

모든 것을 비워내고 자연의 것, 본래의 것을 내보일 때 가장 자연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혹은 누군가에게 그 어떤 것도 숨기지 않고 나의 본심을 보여줬을 때 우리는 서로 안정감을 느끼며 친밀해진다. 

 

그의 전면점화, 점의 우주를 들여다봤을 때 그러한 느낌을 받았다. 무언가를 그리워하며 수많은 점을 그려나간 김환기의 모습을 떠올려 보니, 나 또한 누군가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듯했다. 그의 마음을 온전히 알고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감정이 내 마음속에 자연스레 스며든 것이다.

 

내 키를 훌쩍 넘는 거대한 점의 우주를 봤을 때는 광활한 그의 예술 세계에 들어와 마치 내가 하나의 점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한한 점으로 이루어진 드넓은 우주를 자유로이 유영하는 듯한 느낌. 이러한 느낌은 나만 경험한 게 아닌 것 같았다. 많은 관람객이 모두 같은 생각을 하는 듯이 한 작품 앞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작은 점이 되어 오랜 시간 그의 우주를 탐구하고 있었다.

 

 

 

 한 점 하늘 김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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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항아리, 그리고 별과 그리운 이들을 이어준 것은 다름 아닌 하늘이다. 하늘은 그에게 있어서 자연과 삶 그리고, 그의 예술을 함축하는 개념이었다. 

 

자연과 예술의 영원함을 노래하던 김환기. 시대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자신만의 예술을 구축해 나가며 끊임없는 자아 탐구로 예술적 초월 정신을 이끌어 낸 우리의 예술가. 삶과 고독, 그리고 외로움이 묻어난 김환기의 작품을 통해 그의 예술의 여정을 잠시나마 체험해 볼 수 있었다. 

 

이번 김환기의 회고전 <한 점 하늘>은 9월 10일까지 진행된다. 김환기의 삶과 예술을 아우르는 회고전을 통해 우리 한국 예술가의 아름다운 진면모를 발견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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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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