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랑받기 위하여 미움받는 법 - 2 [문화 전반]

글 입력 2023.09.01 13:35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이번 글도 여러 예술인이 미움받을 수 있었던, 그로서 사랑받았던 방법을 공유하고자 한다.

 

 

 

나의 동업자에게 미움받기, 아니쉬 카푸어



미술가를 상징하는 색에 대해 물었을 때 바로 떠오르는 예술가는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아마 이브 클라인의 모노크롬을 함께한 그 파란색이나 이번 주인공인 아니쉬 카푸어의 반타 블랙이라고 생각한다.


그 유명한 반타 블랙의 이야기이기에 가벼운 설명을 하자면 2014년 영국에서 군사 및 항공우주에 이용하기 위한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색 반타 블랙을 개발하였다. 99.965%의 빛을 포함해 가시광선, 적외선까지 흡수하는 이 염료의 특별한 점은 R&D 투자자에 아니쉬 카푸어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카푸어의 투자 조건은 반타 블랙을 사용할 수 있는 예술가를 자기 자신으로 제한하는 독점권이었다.

 

 

160304_ws_02.jpg

<반타 블랙>

 

 

지금까지 예술사에서 특정한 색을 한 예술가만 사용할 수 있는 전례가 없었기에, 이 소식을 들은 수많은 예술가는 서로 앞다퉈 아니쉬 카푸어에 대해 비난하였다. 특히 스튜어트 샘플이 개발한 Pinkest pink, Black 2.0, Black 3.0을 아니쉬 카푸어나 그 대리인이 구매하지 못하도록 했던 일로 일련의 사건은 더욱 널리 알려졌다.


현재는 반타 블랙에 필적하거나 그 이상의 빛 흡수율을 자랑하는 검은 염료를 모든 예술가가 사용할 수 있지만, 당시의 반타 블랙이 일으킨 논란은 지금까지도 SNS에 퍼지며 아니쉬 카푸어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렇게 모든 동업자와 수많은 대중에게 비난받은 카푸어지만 카푸어에게 돈을 지불하는 미술 애호가와 의뢰자에겐 오히려 카푸어의 이름값이 높아지는 기회로 포착되었다. 실제로 아니쉬 카푸어는 지금까지도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 자리 잡고 있다.


또한 현재 국제 갤러리에서 아니쉬 카푸어의 개인전을 진행하고 있다. 해당 전시에서 반타 블랙을 사용한 카푸어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데. 카푸어의 반타 블랙은 물질의 실존과 허구의 사이를 조명하고, 물질을 초월하는 무엇을 표상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한 명이라도 사랑해 줄 때까지 기다리기, 쿠사마 야요이



지금의 쿠사마 야요이는 아니쉬 카푸어와 함께 가장 부유한 예술가 중 한 명이지만, 지금의 자리에 있기까지 수많은 굴곡을 겪었다. 강박증으로 인한 유년기의 학대부터 미국에서의 삶과 일본에서의 삶까지, 그녀가 살아온 삶은 치열했으면서 그만큼 미움이 함께했다.


쿠사마 야요이가 미국에서 명성을 쌓아 올린 시간은 1960년대이다. 그녀는 작품보다 그녀가 일으킨 이벤트와 해프닝으로 유명해졌는데, 이 유명세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닉슨 대통령과의 해프닝이다. 1968년 11월 11일, 6일 전 선거에서 승리한 닉슨 대통령에게 한 편의 편지가 도착했다.

 


kusamalettertonixon (1).jpg

<당시 쿠사마 야요이의 편지>

 

 

"우리 지구는 평화롭고 고요한 천체들 사이에서 증오와 분쟁으로 가득 찬 수백만 개의 다른 천체들 사이에서 하나의 작은 물방울무늬와 같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 모든 것을 바꾸고 이 세상을 새로운 에덴동산으로 만들어 봅시다."


"사랑하는 리처드, 우리 자신을 잊고 절대와 하나가 되어 모두 함께 힘을 합치자. 하늘을 날아오르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물방울무늬를 칠하고, 영원한 영원 속에서 자아를 잃고, 마침내 더 많은 폭력을 사용한다고 해서 폭력을 근절할 수 없다는 적나라한 진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진실은 내가 당신의 딱딱한 남성적인 몸을 사랑스럽고 부드럽게 장식할 구체에 쓰여 있습니다. 부드럽게! 부드럽게! 리처드에게 남자다운 투지를 진정시켜요!"

 

 

해당 편지는 닉슨 대통령에게 베트남 종전을 대가로 자신의 몸을 준다는 내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이는 아마도 미국 대통령과 진지하게 소통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적극적인 베트남 반전 스턴트로 기획된 이벤트였을 것이다. 까닭으로 쿠사마 야요이는 이에 대한 반응을 기대하지 않았던 듯, 뉴욕 맨해튼에서 '닉슨 난교' 이벤트를 열었고 편지와 해당 이벤트는 대중에게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격한 쿠사마 야요이의 해프닝은, 닉슨 대통령 당선 이후 더욱 보수적으로 변한 미국에선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미국에선 점점 그녀를 앤디 워홀, 잭슨 폴록의 다음에서, 인기 없는 선정적인 예술가로 취급하였다.

 

또한 일본에선 그녀의 행보가 선정적으로 보도된 탓에 그녀의 이미지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녀의 고향인 마쯔모토에선 그녀가 마을의 수치라고 인터뷰하였고, 그녀의 고등학교는 그녀를 졸업자 명단에서 제명할 정도로 당시 그녀에 대한 취급은 심각하였다.


끔찍한 취급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자살 기도를 하였으며, 다행히 살아남은 쿠사마 야요이는 정신병원에 찾아가 지금까지 생활하고 있다. 정신과 의사의 제안으로 치료목적의 작품 활동만을 계속하던 쿠사마 야요이에겐 예술가로서 활동은 끝난 듯하였다.


하지만 1989년 후지 TV 갤러리에서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큐레이터 알렉산드라 먼로가 그녀의 작품을 보게 되었고 강한 충격을 느꼈다. 그녀는 곧바로 일본으로 가 쿠사마 야요이를 만난 뒤 국제현대미술센터(CICIA)에서 '쿠사마 야요이: 회고전'을 전시하였다.


해당 전시는 뉴욕을 넘어 전 세계의 대중에게 큰 충격을 안겼고, 이에 따라 그녀의 작품이 다시금 재평가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선 일본 대표로 쿠사마 야요이가 선정되었으며 역대 최초의 여성 단독 개인전이 개최되었다.


즉 쿠사마 야요이는 미국과 일본의 모든 대중과 예술가에게 미움받고 버려졌지만, 일본으로 돌아간 지 16년 만에 단 한 명이 그녀의 가치를 알아봐, 미국과 일본을 넘어 전 세계가 가장 사랑하는 여성 예술가 중 한 명으로 그녀를 변화시켰다.

 

 

[신효창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5.01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