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저 너머의 세계, 눈 앞의 세계 - 미구엘 슈발리에, 디지털 뷰티 시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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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의 디지털 세계와 연결될 수 있다면 어떨까?
스크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무한대로 생성되는 패턴의 세계로 빠질 수 있는 전시가 있다. 디지털 프로그램 혹은 AI와 만나는 상상을 마음껏 펼쳐보게 되는 곳. ‘아마 프로그래밍된 알고리즘과 인간이 만난다면 이런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해 보게 된다.
프랑스 디지털 미디어 아트의 거장, 미구엘 슈발리에의 첫 서울 개인전인 <디지털 뷰티> 시즌 2가 아라아트센터에서 진행 중이다.
미구엘 슈발리에는 80년대부터 활동한 미디어 아티스트로 디지털 예술의 선구자로 불린다. 그의 가상예술은 LED/LCD 화면, 홀로그램, 3D 프린팅 조형물을 매개로 드러나며 그가 펼쳐낸 가상 세계의 풍경은 빛과 움직임으로 가득하다. 그의 첫 서울 개인전인 만큼 최신 작품을 비롯한 약 70여점 이상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전시에는 생성 AI를 활용한 제너러티브 예술 작품이 주를 이룬다. 감상하다 보면 블록체인, 빅데이터, 인공지능 등 정보통신 기술의 융합이 폭발하듯 터진 제 4차 산업혁명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이처럼 <디지털 뷰티>는 이 시대의 현대예술로서 인공지능과 알고리즘, VR 프로그램이 어떻게 예술을 만들고 그것이 어떤 점에서 예술이 되는지 시사할 점을 제공한다.
ⓒ Thomas Granovsky
제너러티브 아트(Generative Art)는 말 그대로 ‘생성되는’ 예술이다.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프로그래밍된 자율 시스템이 전체 혹은 부분을 제작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코딩 예술이라고도 불리고 인터랙티브 아트와 혼용되어 쓰이기도 한다.
쉽게 말하면 작품은 있는데 직접 그림을 그린 사람은 없다. 화가의 작업실에 화가가 없는 것이다. 작가는 팔레트와 붓, 캔버스와 이젤을 준비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완벽한 환경을 조성할 뿐이다.
그리고 작업실에는 작가의 조수가 등장한다. 조수는 그의 가이드에 맞추어 그림을 그려나간다.
ⓒ miguel chevalier 4
이를 제너러티브 아트에 대입하면 조수는 프로그래밍 된 알고리즘을 뜻한다. 스크린은 캔버스가 되고, 알고리즘은 붓이 된다.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은 작가가 아닌 컴퓨터지만, 컴퓨터는 프로그래밍 없이 작동될 수 없고, 알고리즘 없이 이미지를 생성할 수 없다.
알고리즘과 더불어 작품에 새로운 활력을 더하는 것은 관객의 움직임이다. 작품과 연결되도록 만든 센서는 관객의 움직임을 쫓는다. 센서를 통해 입력된 관객의 동적 에너지는 작품에 반영되는 하나의 변수로 작용하여 시시각각 변화하는 예술을 만들어 나간다.
알고리즘을 통해 컴퓨터는 무한히 이미지를 생성하고 프로세스를 반복한다. 이것에 예측불가능한 요소를 더하면 실시간으로 새롭게 탄생하는 작품이 만들어진다.
특정 이미지와 패턴을 수많은 경우의 요소로 재조합하는 프로그램에서 변수로 작용하는 것은 인간의 움직임이다. 이 단계에서 작품과 관객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게 되고 상호작용 과정은 관객에게 다양하게 사유할 수 있는 지점이 된다.
<그물망 복합체>는 전시 전반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첫 번째 순서로 매우 적합했다.
전시장의 3면을 차지하는 스크린에 수십 개의 점으로 이어진 선들이 떠 있다. 컴퓨터 화면 뒤 네트워크의 세계로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디지털 세계가 연상되는 <그물망 복합체>는 다양한 패턴의 그물망을 보여준다. 그리고 한 발짝 디디는 순간 자리에 있던 그물망이 도망치듯 옆으로 뻗어나간다.
작품 속 그물망은 사람의 움직임에 반응하여 퍼진다. 직선으로 이루어진 그물망은 복잡다단한 패턴이지만, 빛나는 모양이 하늘을 수놓은 별자리를 떠올리게 했다.
전시는 지하로 내려갈수록 더 넓고 크게 펼쳐진다. 지하로 내려가 다른 작품을 감상했다. 각 작품은 하나의 방에 독립적으로 존재했다.
<세상의 기원>은 현미경으로 바라본 미생물의 패턴 같은 모양으로 가득했다. 제목처럼 우주가 폭발하고 생명체가 탄생하는 세상의 첫 모습이 연상되었다. 세포처럼 화면을 떠다니는 패턴은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라 퍼지고 조합되며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른 모양으로 전환된다.
작품과 함께 전시장을 가득 채우는 음악도 감상의 깊이를 더했다.
마치 우주에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와 비슷하게 <리퀴드 픽셀>은 액체처럼 환경에 따라 모양이 변하는 패턴들로 물처럼 흐르는 듯한 모션을 보였다.
패턴은 어떤 순간에는 찐득거리는 액체 같았고 어떤 순간에는 말캉한 젤리처럼 보였다. 천천히 걸으며 <리퀴드 픽셀>의 움직임과 변화 양상을 관찰하다 보니 스크린 속에서 헤엄치고 싶어졌다.
어느새 화면 앞에서 <리퀴드 픽셀>을 따라 유영하고 화면 속 움직임을 흉내 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기계와 소통할 수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작품의 상호작용 요소는 화면 너머의 프로그램과 소통하고 있다는 판타지를 주었다. 두 작품 모두 빛이 투사되는 화면의 양옆에 거울이 설치되어 있었다. 각기 빛나는 두 세계는 거울을 통해 끝없이 연장되며 무한한 제3의 공간을 연상시켰다.
더 내려가면 미구엘 슈발리에의 동료작가 ‘패트릭 트레셋’과의 협업 작품인 ‘어트랙터 댄스’가 전시되어 있다. <어트랙터 댄스>는 다섯 개의 관절형 로봇팔로 이루어진 드로잉 로봇이 그리는 작품이다.
오각형의 꼭짓점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자리한 다섯 개의 로봇팔이 펜을 쥐고 도화지 위에서 같은 동선으로 움직인다.
로봇팔의 결과물은 꽃잎이 다섯 장인 꽃처럼 보이기도 하고, 발광하는 행성, 에너지, 불꽃 등 다양한 형태의 자연물을 연상시킨다. 동일한 동선과 에너지, 드로잉 도구는 위치만 다를 뿐 같은 형태를 그려나가지만, 다섯 개의 로봇 팔이 그리는 선은 늘 같을 수 없다.
동선의 입력값을 바꾸면 비슷하지만 다른 형태의 작품이 탄생하기도 한다. 동일한 프로그램과 반복적인 운동은 비슷한 스타일의 작품을 그려낸다.
<어트랙터 댄스>는 로봇이 그리는 연작인 셈이다.
아라아트센터의 가장 지하 깊은 곳에서 전시도 클라이맥스에 도달한다. 지하 2층과 3층을 연결하는 14m 높이의 초대형 작품 <디지털 무아레>와 실제 카페트 바닥에 비춰지는 <매직 카페트>다.
<디지털 무아레>는 기하학적인 패턴과 착시를 일으키는 색상으로 꿈틀꿈틀 움직인다. 50~60년대 옵아트에 영감받아 탄생했다.
<매직 카페트>는 천으로 만들어진 폭신한 카페트 위에 영상을 비추어 마법의 양탄자 같은 느낌을 구현해 냈다. 한 발 한 발 뻗을 때마다 패턴이 반응하고 변화한다. 두 작품은 꼭 맞아떨어지는 하나의 세트처럼 지하 공간을 압도하는 스케일과 비주얼로 신비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디지털 뷰티> 시즌 2에서는 관람객의 움직임을 트래킹하여 작품에 반영하는 인터랙션이 감상의 재미를 더할 뿐 아니라 다양한 상상과 사유가 이루어지도록 한다. 이는 작품과 인간의 상호작용으로도, 기계와 인간의 소통으로도 읽히며 함께 유영하고 춤추는 것과 같은 판타지적인 상상을 더 하게 했다.
나의 움직임이 프로그래밍된 알고리즘과 만났을 때, 패턴은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독특하게 변한다. 그 변화의 양상을 관찰하며 화면의 패턴과 합을 맞추고 춤추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또한 전시에 활용된 클로드 미켈리(Claude Micheli)의 사운드는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감상을 더욱 풍부하게 확장시켰다.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디지털 세계의 패턴 속에서 계속 우주, 사막, 호수, 바다와 같은 대자연의 공간이 떠올랐다.
키네틱 아트를 연상시키는 작품의 움직임, 전체가 부분이 되고 부분이 다시 전체가 되는 프랙탈, 그물망 등 그의 디지털 아트는 구조적이고 원초적인 우주의 패턴과 닮았다.
불규칙적이지만 자연이라는 법칙 안에서 움직이는 자연의 구성요소는 결국 인간이 만들어 낸 디지털 세계에서도 무시될 수 없다. 그렇게 감상의 마지막은 자연으로 귀결되었다.
미구엘 슈발리에가 보여준 세계는 저 너머의 세계처럼 보이지만, 결국 눈앞의 세계를 재현하고 있는 것 아니었을까.
[김예린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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