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스릴러로 쓴 세대론 [영화]

코엔 형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8)
글 입력 2023.08.11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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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론은 시대의 필연적 산물이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과정에서 시대가 생겨나므로,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반드시 서로 다른 두 세대(혹은 그 이상)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이 문제다. 호모 사피엔스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대부분 동일한 염색체를 전달함에도 불구하고 세대와 다른 세대는 반드시 어떤 차이를 지니고 있으며, 그 차이에 의해 세대라는 개념은 머리를 맞대고 ‘논(論)’해야 할 사회적 과제가 된다.


어느 한 세대(흔히 MZ라고 불리는)가 우월적 지위로 모든 문화의 중심을 차지해 기존의 세대가 논의의 상대조차 되지 못한 채 밀려나고 있는 최근에서야 제법 오래된 영화 한 편을 봤다. 러닝타임이 끝난 후에도 한참동안 영화의 제목과 내용이 연결되지 않았고, 극단적 선언처럼 들리는 영화 제목이 가진 의미에 대한 친절한 해설을 찾아보고 난 후 비로소 오래 묵혀놓은 책처럼 ‘세대론’을 떠올릴 수 있었다. 영화는 그제야 어렴풋이 다시 시작됐다.


코엔 형제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8)을 본다.

 

 


경험적 정의와 문화적 돌연변이



영화는 보안관 에드 톰 벨(토미 리 존스)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조부와 아버지에 이어 삼대 째 보안관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정의감과 사명감을 품었던 앞선 세대의 의지를 이어받기 위해 “그들이라면 이 시대를 어떻게 꾸릴까”를 고민하는 그의 태도에 우리는 ‘기성세대’라고 이름을 붙이며 거리를 두지만, 그가 젊은 시절부터 쌓아온 보안관으로서의 경험과 연륜은 세대가 지날수록 무자비하고 무의미해지는 시대적 변화에 대항할 자산이기도 하다.


현장에 남겨진 몇 가지 단서를 보고 빠르게 정황을 추론해내는 벨의 솜씨는 관객의 신뢰를 얻는다. 앞서 목격한 살인마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의 충격적 잔혹함은 상징적 정의의 편인 벨과 정확히 대비되며 몰입도를 높이고, 우리는 영화의 흔한 공식처럼 정의의 당연한 승리를 바라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제목을 향해 미끄러져간다. 어찌됐든 벨은 은퇴를 앞둔 노인이고, 따라서 그를 위한 나라는 없다는 것. 벨은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쌓인 지식(know-how)을 가지고 있으나, 도무지 방향을 알 수 없는(no-how) 돌발의 세대를 따라잡기에는 한없이 느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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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영화 속 절대적 악으로 등장하는 쉬거는 파탄난 마약 거래 현장에서 돈을 챙겨 달아난 르웰린 모스(조슈 브롤린)를 추적한다. 추적의 과정에서 그는 살인을 일삼는다. 그는 이전의 영화들에서 등장했던 그 어떤 악역보다 차갑고, 살인을 행함에 있어 일말의 망설임이 없다. 그를 새로운 세대의 보편적 상징으로 규정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다만 사회의 통제에서 벗어나 가장 자유로우며 기존의 윤리적 규율과 도덕적 규칙을 넘어서는 규격 외 존재라는 의미에서 본다면, 안톤 쉬거는 탈질서의 상징이자 문화적 돌연변이다.


쉬거가 르웰린의 집 소파에 앉아 TV에 비친 자신을 응시하는 장면과, 한발 늦게 도착한 벨이 바로 그 자리에 앉아 TV에 비친 자신을 응시하는 모습은 흥미롭다. 영화 내내 쉬거가 먼저 본 것을 뒤늦게 목격하는 벨처럼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의 서순이 이미 뒤집어진 것. 앞선 세대가 목격한 것을 다음 세대에게 전달해주는 것이 지혜의 축적 순서라고 믿던 우리의 통념은 질서를 뒤흔드는 문화적 돌연변이의 등장에 의해 무너진다.


잔혹한 살인마 안톤 시거와 그를 추적하는 늙은 보안관 벨. 두 인물은 각각 선과 악을 대표하는 동시에 서로 다른 두 세대―접점이 존재하지 않는 세대의 상징이 된다. 이런 교차성 속에서 두 인물은 각자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하여 움직이고, 영화는 제목부터 자기 자신의 결말을 스포(spoil)하며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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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강력한 유전



영화를 이끄는 세 번째 인물 르웰린 모스는 영화 속 갈등의 원인이 된다. 사냥을 나갔다가 발견한 마약 밀매의 현장에서 우연히 거액이 든 돈가방을 습득하게 된 그는 위험에 빠질 것을 예감하면서도 물질적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삶과 죽음이 엉켜있는 황무지 위에 일상적 평화와 위험한 쾌락의 갈림길이 놓여있다. 그 위태로운 경계에서 그는 결국 목숨을 건 도망을 감행한다.


전직 용접공이자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이기도 한 르웰린은 활용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자신을 추적하는 잔혹한 살인마를 피해 달아난다. 쉬거와 맞서며 큰 부상을 당하고, 가족마저 위험할지 모르는 상황에 처했음에도 끝끝내 욕심을 버리지 못하던 그는 결국 쉬거에 의해 허무한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는 이 추격전의 마지막 장면마저 보여주지 않으며 극단적 허무를 불러일으킨다.) 르웰린의 죽음은 욕망에 의해 예견된 죽음처럼 무뚝뚝하게 그려지고, 그에 대한 애도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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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를 갖췄지만 느리고 고착화된 기성세대와 자유롭지만 윤리적 규율이 결여된 돌연변이 세대의 중간에 놓인 르웰린은 전형적인 신세대의 상징으로 표현된다. 벨과 르웰린의 범주를 넘어선 안톤 쉬거의 존재처럼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문화적 유전의 변형은 충분히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다만 그 어떤 유전의 과정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 가장 강력하고 근본적인 유전적 형질이 있다면, 그것은 (물질적) 욕망이다. 생명이나 사랑보다 자본을 우선하는 욕망의 세대. 우리의 세대는 어둡고 축축한 르웰린의 표정을 하고 있다.

 

 

 

배제와 속도의 세대론



영화 속 안톤 쉬거의 주된 살인 도구는 강력한 압력으로 견고한 문고리마저 날려버리는 공기총이다. 총알의 종류를 보며 단서를 찾던 벨의 상식을 넘어서는 그의 무기는 인간이 서로를 공격하고 방어하기 위해 고안한 기성의 무기가 아닌, (소를 도축하는 것처럼) 일방의 폭력을 위해 변질된 살인 도구다. 일방성이야 말로 세대가 지날수록 두드러지는 문화적 특성이라는 듯, 쉬거의 총은 흔적 없는 일방적 위협을 난사한다.


인류의 역사는 자유가 확장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일련의 의견에도 충분히 동의하지만, 그 자유가 타인에 대한 배제를 거듭하며 단순히 부피를 키울 때 그것은 공포가 된다. 쉬거는 동전 던지기를 통해 타인의 생과 사를 결정하곤 하는데, 이때 그의 행동은 공정한 반반 확률의 영역을 벗어난다. 동전을 던지는 행위 자체가 이미 거대한 죽음의 확률을 부여하는 것이므로, 가벼운 동전의 앞면과 뒷면에 자신의 운명이 걸릴 때, 삶이 그만큼 초라하고 가벼워질 때, 타인은 가장 끔찍한 공포를 느끼게 되고 마는 것. 동전을 던지기로 결정한 순간 타인이 배제된 일방적 폭력은 이미 발현된다. 신화 속에는 충동에 의해 인간의 존망을 결정한 신이 있었다. 우리는 이런 신의 무책임함을 이성의 이름으로 비판하지만, 동전의 우연에 생명을 맡기는 행위 또한 신들의 무자비한 충동과 다르지 않다. 우리의 자유가 경계 없이 무한해질수록 우리는 우리에게서 신이 된 인간을 본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동체가 향유하는 질서는 변한다. 그것에 막연한 구획을 지을 때 우리는 세대라는 이름으로 나뉘게 된다. 세대는 시간의 개념을 품고 있고, 인간은 유한한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새로운 세대의 등장은 반드시 한 세대의 퇴장으로 귀결된다. 다만 그 등장과 퇴장의 속도는 점점 빨라져 한 세대에게 충분한 퇴장의 시간을 보장하지 않은 채 그저 ‘없어지게’ 만드는 방식으로, 세대의 교체가 아닌 세대의 단절로 나타난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누군가 죽어가는 순간의 고통은 과감하게 생략된다. 총이 발사되고, 누군가 피를 뿜고, 쓰러져 죽는다. 긴박한 배경음이나 절절한 음악조차 없이, 그저 속도감 있게 퇴장하는 것. 세대의 속도감 전체가 빨라지고 있다는 영화적 은유다.


지나치게 빨라진 속도는 방향마저 어긋나게 만든다. 이미 너무 빨라져버린 현대의 세대론은 앞과 뒤가 충돌하는 속도의 갈등이 아니라, 기존의 축과 전혀 다른 새로운 축이 좀처럼 찾지 못하는 접점의 문제로 변한다. 끝에서야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끝에서 마주칠 수조차 없다는 문제다. 르웰린의 죽음을 막지 못한 뒤 “힘이 달려서”라는 나지막한 자책을 내뱉는 벨의 모습은 영화의 결말처럼 씁쓸한 뒷모습을 남긴다. 지나간 것을 위한 나라는 없어졌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스릴러의 모습을 한 세대론이자, 한 세대의 당연한 죽음에 대한 서늘한 애도다.

 


p.s 무고한 사람 여럿을 찔렀던 그들의 칼끝에는 자비가 없고 의미가 없어서 더욱 무섭다. 그 칼끝을 흉내 내는 이들에게는 인류애의 개념도 최소한의 윤리도 없어서 더욱 두렵다. 그들의 행위를 ‘세대’라는 말로 포괄하기엔 가혹하지만, 인간이 가진 최소한의 슬픔까지 잃어간다면, 우리 세대를 위한 나라 역시도, 없다.

 

 

 

컬처리스트 명함.jpg

 

 

[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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