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앤디워홀의 영화 - 엠파이어 Empire [영화]

팝아트가 아닌, 워홀의 영화를 살펴보자.
글 입력 2023.08.0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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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은 팝아트로 유명하다. 그는 실크스크린 기법을 사용하여 대량생산이 가능한 미술품의 가치에 대해 재고하게 했고, 상업 예술과 순수 예술의 경계선을 없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고 싶었던 예술은 무엇이었을까?

 

워홀은 신비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가 마티스처럼 되고 싶다는 말도, 신비로운 스타로서 남아있고 싶다는 말이었다. 어찌 보면 화가의 솔직한 모습을 작품으로 표현하는 것도, 해석하기 나름이며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다. 1968년 워홀은 이러한 삶의 모순적 진리를 강력히 주장하기라도 하듯,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앤디 워홀에 대해 알고 싶다면 나의 그림과 영화 그리고 나의 표면을 보아라. 거기에 내가 있다.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워홀은, 팝아트로 성공한 부를 영화에 투자하여 영화를 만들었을 정도로 영화를 좋아했다. 그러나 팝아트에 비해 워홀은 영화로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워홀이 처음으로 만든 영화는 <잠 sleep, 1963>이다. <잠>에서는 시인 존 조르노(John Giorno)가 6시간 동안 자는 모습이 보여진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는 그가 자는 모습을 20분간 촬영하고 나머지는 그것을 반복한 것이었다. 

 

 

“난 영화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어. 너, 스타가 되고 싶지 않아?”

“스타? 좋지. 그럼 내가 맡을 역이 뭔데?”

“넌 잠만 자면 돼. 네가 자는 모습을 영화로 만들고 싶어.”

 

- 워홀과 조르노의 대화 

 

 

앤디워홀, 잠.png

Andy Warhol, sleep, 1963.

 

 

이후, 워홀은 <키스 Kiss>, <머리 깎기 Hair cut>, <먹기 Eat> 등 일상 속 평범한 모습을 담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워홀은 “회화는 더 이상 내게 즐거움이 되지 못하며, 나를 매혹하는 것은 사람들이며 나는 나의 모든 시간을 그들 주위에서 보내며 그들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워홀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만지는 것을 싫어했으며, 촉각적 감각보다는 시각적 이미지에 주목했다. 특히 서사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영화 매체에서 이미지로서만 존재하는 것에 주목하여 영화에 나오는 모든 인물이 피상적이고, 누가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몰개성한 인물로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무(無)의 작업을 알 수 있다. 

 

워홀이 만든 영화는 실제 삶에서 어떠한 연출도 제시되지 않는 것이었다. 특히 워홀의 <부엌 kitchen>에서 등장인물들은 누가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어야 했고, 인물들의 특성조차 없어야 했다. 나중에는 등장인물들은 모두 같은 이름을 갖게 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현실에서 서사가 없는 인물이 존재하는가? 습관과 특성이 없는 인물이 존재하는가? 

 

워홀은 “거울을 들여다본다는 생각에 그리고 그 속에서 아무도,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했다. 이는 워홀이 보여주는 이미지가 궁극적으로 무(無)에 다가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에서 바라봐지는 세계는 보는 사람의 관점과 경험으로 점철된 것이다. 주관이 들어서기 전까지 세계는 무(無)일 수 있다. 그러나 세계와 사람은 다르다. 무(無)에 가까운 사람은 있을지언정, 무(無)인 사람은 없다. 우리는 누구나 사소한 손톱을 물어뜯는 행위더라도, 다리를 떠는 행위라도 개개인마다의 특성이 있으며 각자의 인생에서 모두 다른 서사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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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y Warhol, Cambell's Soup Cans, 1962.

 

 

너무 많이 강조되어서 희미해지는 이미지들은 우리 삶과 유사하다. 지나친 반복으로 오는 강조는 지루함을 유발하기도 하며, 더 들여다보고 뜯어 보며 집중적으로 그 사람의 본질을 낱낱이 파헤치려 하기보다는, 눈을 돌리게 되기 십상이다. 워홀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었다. 무언가 본질적인 것에 대해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워홀의 무(無)로 향하는 작업은 무의미하지 않은 작업이었다.

 

워홀의 영화에서 우리는 실크스크린의 회화 작업처럼 이미지의 반복, 또는 시간의 조작을 발견한다. 삶은 결국 조작될 수 없는 무언가이지만, 사실 공허하고 무상한 부조리한 것임과 동시에 누군가로부터 조작될 수 있는 것이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영화의 서사성에서부터 출발한 우리의 감정의 동요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영화에 홀리듯이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영화의 무차별적인 시청각적 아름다움으로부터 말이다. 그러나 워홀의 영화는, 우리가 영화에 집중하면서도, 우리가 지금 머무는 삶을 완전히 잊지 않는 듯한 절반 정도만 몰입하는 무언가를 제공한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영화를 보며 혼자만의 공상에 빠져도, 옆 사람과 떠들어도 그건 관객만의 하나의 경험으로 자리 잡는 것이다. 워홀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우리의 일상으로 보이는 영화는, 실제 우리의 삶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비논리적인지를 재고하게 해준다. 

 

일상을 보여주지만, 일상보다 비논리적이거나 매우 논리적인 맥락과 시간의 재조작은, 워홀의 영화가 보여주는 삶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다. 특히 워홀의 <엠파이어 Empire, 1964>는 우리가 얼마나 일상을 무감각하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인지하게 해준다. 

 

 

엠파이어2.png

Andy Warhol, Empire, 1964.

 

 

앤디 워홀의 영화 <엠파이어 Empire, 1964>는 8시간 동안 미국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모습을 편집이나 연출 없이 그대로 담아낸다. 건축물의 모습은 주로 빛에 의해서 변화한다. 이 영화는 단순히 건축물뿐만 아니라, 화면 속 공간에 대한 모든 것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담아낸다. 

 

“이것을 봐라!”라고 외치는 듯한 화면 정중앙의 엠파이어 빌딩은 사실 그렇게 주목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인가? 동료들이 앤디 워홀에게 왜 하필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찍겠다는 거냐고 물었을 때 워홀은 이렇게 대답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스타이니까.” 영화의 시사회에서 사람들은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퇴장하기 시작했고, 상영시간을 채운 50여 명 남짓의 사람들은 영화관을 들락날락하며 맥주를 마시거나 잠에 들기도 하고, 워홀과 이야기하며 가끔 화면을 바라봤다. 이렇게 영화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의 삶과 영화의 환상성이 뒤섞인 경험으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영화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영화들은 단지 시간을 흡수하는 방법일 뿐이다.” 그가 말하는 시간의 흡수는 무엇일까? 영화 속에서 영화의 컷 편집이 적을수록 영화 속 시간은 우리의 현실과 비슷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워홀은 영화가 흘러가는 시간 동안 관객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관객은 영화를 봄으로써 오히려 영화 속에서 무언가를 찾으려는 시도가 아니라, 자신에게서 떠오르는 생각의 나열 혹은 확장을 경험할 수 있다. 공원에 가서 움직이는 풍경 속 자신만의 생각을 하듯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비행기가 날아오고 해가 지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각자 인식하고 있는 시간성의 경계와 우리가 무심히 흘려보낸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엠파이어1.png

Andy Warhol, Empire, 1964.

 

 

그러나 관객이 보는 <엠파이어> 속 시간은 조작된 것이다. 워홀은 1초에 24프레임으로 영상을 만들지 않고 1초에 16프레임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즉, 현실의 시간을 늘린 것이다. 관객은 각 프레임의 시간을 늘린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현실과 유사해 보이는 이 영화도 사실은 시간의 확장을 통해 시공간이 재창조된 것이었다.  

 

워홀의 영화 <엠파이어>에서 관객들은 마치 텔레비전을 보는 듯한 편안함으로 영화에 집중하게 된다. 또는 영화에 집중하지 않게 된다. 워홀의 영화의 환상성은 환상적이라기보다, 현실보다 더 현실을 직접적으 바라보게 해준다. 우리가 평소에 보지 못했던, 또는 주목하지 않았던 것들을 보여준다. 엠파이어 빌딩에 새가 날아오고 비행기가 지나가고, 해가 지는 모습 전체를 연속적으로 볼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평소에 봤으나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되면서, 우리는 일상이기도 한 순간에 앉아 있게 된다. 일반적으로 영화를 보는 순간 몰입은 그 영화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러나 <엠파이어>는 현실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온전히 벗어나지는 않으면서 지금 여기 있다는 이 순간을 생생히 느끼게 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결국 무(無)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리를 박차고 실제 엠파이어 빌딩을 보러 나갈 수도 있다. 워홀의 영화는 현실과 영화가 이토록 거의 구분이 불가능하면서 유사한 속성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게 해준다.

 

영화에서 워홀이 보여주는 것은 결국 완벽한 현실 속 일상이 아니라, 시공간을 뒤틀었지만, 뒤틀었다는 것을 관객이 인지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스타’의 진짜 모습을 우리는 알 수 없다. 워홀은 이처럼 ‘스타’라는 상징성에 기반하여 표면적 이미지에 주목함과 동시에 그 신비한 아름다움을 감추면서 드러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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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y Warhol, Empire, 1964.

 

 

워홀의 팝아트 작품에서도 워홀이 이야기하고 싶은 예술은 예술가 자신을 보여줌과 동시에 감추면서 신비스러운 것으로 남겨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워홀의 실크스크린 기법은, 이미지들을 반복적으로 제시하면서 보는 이들에게 강조함과 동시에, 이미지들이 무디어지게 한다. 반복적인 이미지의 나열은 금방 익숙해져서 눈앞에서 사라질 수도 있고, 그 강조성으로 인해서 각인될 수도 있다. 워홀의 작업은 이처럼 강조와 동시에 숨기는 듯한 모순적인 방식을 사용한 것이다. 

 

우리가 왜 예술을 해야 하냐고 물었을 때, 예술은 삶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삶 속의 아름다움과 고통을 느껴서 이러한 서정을 표현하는 것은 예술로써 드러난다. 그러나 ‘예술’이라는 기의는 예술가에게 다소 무겁고 진중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가 밥을 먹고 머리를 자르는 행위 또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현대에 이르러서 이러한 예술 등을 행위 예술로 의미 부여하는 경우도 많이 발생했다. 그러나 목적과 수단이 전복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누구나 이번 달에 전시해야 하는데, 뭐가 좋을까? 라는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다. 반면, 자신이 평생에 있어서 아주 사소하고 특별한 것을 만들어 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 수도 있다.  

 

워홀이 보여주는 것은 예술이 너무 엄숙하고 진지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이란 기의가 겉껍질같이 포장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삶 그 자체가 예술이기 때문에, 모순적으로 워홀은 피상적인 표면만을 보여준다. 워홀은 반복과 편집, 또는 시간의 조작을 통해서 영화가 현실과 유사하면서도 삶을 일부 뒤틀리도록 표현한 예술임을 보여준다. 예술은 결국 우리 삶 그 자체이며, 인간은 누구나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예술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며 만들어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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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y Warhol, Empire, 1964.

 

 

 

에디터 심선용.jpeg

 

 

[심선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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