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언덕 위의 그 사람은 신화가 될 수 있을까 - 언덕의 바리

글 입력 2024.01.19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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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신화의 주인공은 개인적인 욕망과 안위를 포기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국가적, 사회적 과업을 완수함으로써 평범한 인간의 굴레를 벗어난다. 그들은 숱한 유혹을 이겨내고 나라를 지키거나 누군가를 구하고야 만다.


오래전부터 전해내려온 신화 말고 비교적 최근 역사를 배경으로 한 신화를 만들어보자면, 그 주인공으로 단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떠오른다. 한 치 앞 미래도 알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던 이들에게는 분명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가 있다. 고연옥 작가와 프로젝트 내친김에 김정 연출, 그리고 극단 동이 함께한 연극 <언덕의 바리>는 안경신이라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을 무대 위에 펼쳐 보이며 그의 이야기가 신화가 될 수 있을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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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신은 '여성폭탄범'이라 불리던 독립운동가로, 대한애국부인회에서 활동하다가 상해로 가 대한광복군에 합류해 훈련을 받고 폭탄을 옮긴 혐의로 체포된 인물이다. 안경신에 관해 알려진 바는 많지 않지만, 체포 당시 태어난 지 한 달이 안 된 아기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여러 상상을 가능하게 만든다. 언제, 왜 아이를 갖게 되었고 임신한 상태로 어떻게 독립운동을 해 왔을까.


그리고 이러한 질문은 여성인 채로 독립운동과 같은 공적, 사회적 영역에서 활약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보여준다. 예를 들어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이 국가나 사회 같은 '대의'를 위해 가정을 떠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희생으로 받아들여진다. 반면 여성은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아이를 낳고 가정을 돌보는 일이 마땅히 여성의 '사회적 과업'으로 여겨지는 이곳에서, 여성은 어떻게 나라와 세상을 구하고 초월적인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까.


<언덕의 바리>는 이러한 질문과 함께 우리나라 무속신화의 대표적인 여성 주인공 바리데기를 소환한다. 바리데기는 딸이라는 이유로 부모에게 버림받았지만 훗날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그를 구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저승으로 향하는 인물이다. 갖은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목적지로 향하는 바리데기의 굳건한 모습과, 무장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아가는 안경신의 모습이 겹쳐진다.


둘은 목표를 향해 가는 여정에서 임신을 경험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바리데기는 저승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무장승이라는 이에게 그의 아이를 세 명 낳아주는 조건으로 아버지를 살릴 수 있는 꽃에 접근이 가능해진다. 안경신은 무장독립군에 합류하기 위해 상해로 갈 때 도움을 준 행일과 잠깐 같이 사는 사이 임신을 하게 된다. 둘의 차이가 있다면 바리데기의 임신은 일종의 '능력'으로 취급되어 거래를 성사시키는 데 도움이 된 반면, 안경신의 임신은 그가 독립운동을 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순사만큼이나 이 극의 긴장감을 조성하는 건 안경신이 잉태한 아이의 존재다. 엄마라는 자아보다 독립운동가라는 자아가 더 강한 그는 출산에 임박하자 아이에게 태어나지 말라고 말하기도 한다. 마땅히 아이가 차지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폭탄이다. 안경신은 폭탄을 자신의 아이보다 소중히 여기고 폭탄을 위해 목숨을 건다. 사람을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도구와, 이제 막 태어나려는 아이를 함께 품고 다니는 안경신은 그 자체로 모순적인 존재이다.


<언덕의 바리>는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안경신은 행일 덕에 상해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임신을 하게 된 것도 그를 만났기 때문이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던 행일은 사실 다른 여자의 철없는 남편일 뿐이었다. 폭탄은 사람을 죽이는 용도이지만, 안경신은 그 폭탄이 결국 더 많은 사람을 살릴 것이라 믿는다. 다양한 입장을 가진 인간군상이 서로 충돌하고, 이들의 관계와 대화는 배우의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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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열 달이 지나 세상에 나온 안경신의 아이 머리가 두 개였던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는 모순 속에서 탄생해 자라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극 전체에서 발견되는 모순은 이야기의 끝에 이르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체포된 안경신이 아이를 향한 모성애를 근거 삼아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은 진심일까, 아니면 여기서 살아남아 더 큰 거사를 모의하려는 전략적인 행동일까.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두 가지 모두 진실일 수 있고, 하나가 거짓이라 할지라도 누구도 그를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극중 중요한 장소인 언덕 역시 이중적인 성격을 띠는 곳이다. 언덕은 땅과 하늘 사이에 있다. 이 연극은 젊은 안경신이 독립운동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과, 노인이 된 안경신이 꿈 속에서 계속 언덕을 헤매는 모습이 교차되며 진행된다. 언덕 위에는 안경신에게 길을 안내해주는 또 한 사람이 있는데, 초반에 정체가 불분명하던 그는 후반부에서 안경신의 아들로 암시된다. 어머니의 길을 가로막던 그가 이제는 여러 망자에게 길을 안내한다.


기록에 따르면 8년의 수감생활 후 아들을 만난 안경신은 아들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통탄했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 안경신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날을 후회했을까. 오래된 신화 속 영웅과 달리 그는 사회적 영역에서도, 가정의 영역에서도 공적 사적에서도 성취를 이루지 못한 존재로 스스로를 여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알고 있다. 안경신을 비롯해 불가능 속에서 가능을 꿈꾸고, 온갖 모순을 견뎌온 이름 없는 사람들 덕에 오늘이 있다는 것을. 신화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그것을 전하고 향유하는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신화라고 믿는지 여부다. 우리가 언덕에 머무는 이들의 이야기를 신화라고 믿는다면, 땅에서 하늘로 오르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분명히 신화로 남아 후대에 전해질 것이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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