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 생의 압도적 한 곡 [음악]

박효신, <야생화>(2014)
글 입력 2023.07.11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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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이제는 바깥으로 나가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 이곳은 안전하지만 불안하고, 답답하다. 네가 보이지 않는다.


꼭꼭 숨어라, 꼭꼭, 더 꼭꼭.


차라리 먼저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꼭꼭 숨어도 숨바꼭질은 언제나 들키면서 끝이 나니까. 잡초처럼 삐죽 자라난 것, 낮아진 자존감, 초라한 열등감, 비현실적으로 삭막한 현실, 꼭꼭 숨어도 숨겨지지 않는 것들은 언제나 눈에 띈다. 어두운 곳에 숨어도 오히려 눈에 밟힌다. 거슬린다, 찾아진다, 찾아낸다.

 

그러니 이젠 밖으로 나가야한다. 마치 도망치지 않았던 것처럼, 숨었던 적도 없는 것처럼. 곧 들키기 전에, 이제는 어깨를 펴고 나타나야 한다. 나타나서 나만의 ‘너’를 찾아야 한다. 그런 순간에는 노래가 필요하다. 낙관적 희망보다 처절한 낙망을 말하는 노래가. “끝에 다시”를 외치는 그런 노래가.


 

하얗게 피어난 작은 꽃 하나가

달가운 바람에 얼굴을 내밀어

아무 말 못했던 이름도 몰랐던

지나간 날들에 눈물이 흘러

차가운 바람에 숨어 있다

한줄기 햇살에 몸 녹이다

그렇게 너는 또 한번 내게 온다

 

 

여기 “얼음 꽃” 한 송이가 있다. 키가 작아 간신히 “얼굴을 내밀어”야 보이는 작은 꽃이다. 얼음이 녹으면 사라지고 마는, 주위가 차가울 때에만 안전한 꽃이므로 꽃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꽃이다. 이 초라하고 위태로운 꽃이 겨우 피어난 곳은 어디인가. 꽃이 얕게 뿌리를 내린 곳은 울퉁불퉁한 “길 위”다. 혹은 “메말라가는 땅 위”다. 날카로운 “바람”이 불 때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면 좋다. 가끔씩 겨우 “한 줄기 햇살”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면 괜찮다. 언제나 차갑고, 축축하고, 아주 가끔씩만 따뜻한 곳에, 야생에, 이 도시에, 우리는 피어있다.

 

 


 

 

물론 꽃을 피워낸 그 과정은 지난했을 테다. 메마른 땅에서 “온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견뎌야 하고, 시간과 함께 “너의 향기”가 희미해지는 슬픔을 맞이해야 한다. 거스를 수 없는 몇 번의 이별, 실패, 그 고통과 슬픔의 “떨림”을 “눈물 머금고” 견뎌야만 한다. 그렇게 비참하지만 꼭꼭 숨어 기다리는 일에 성공한 꽃만이 소박하고 작은 얼굴을 피워낸다. 이 답답한 곳을 벗어난다. ‘너’를 찾아 바깥으로, 나아간다.


 

내 손 끝에 남은

너의 향기 흩어져 날아가

멀어져 가는 너의 손을 붙잡지 못해 아프다

 

 

간신히 얼굴을 내민 꽃의 다음은 어떻게 되었나. 고통 끝에 피워냈지만 ‘너’는 어쩐지 “멀어져 가고”만 있다. 꽃은 황망히 떠나는 그 “손을 붙잡지 못해” 아파한다. 통증을 견뎌내니 이번엔 절망이 밀려온다. 이런 절망은 유난히 압도적이다. 그래서 다음 구절은 이 노래 가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처절해지고 만다.

 

 

살아갈 만큼만

미워했던 만큼만

먼 훗날 너를 데려다 줄

그 봄이 오면 그날에 나 피우리라

 

 

이제는 다시 “살아갈 만큼만” ‘너’를 미워하겠다는 것. 삶의 의지와 미움의 깊이가 비슷하게 크므로, “미워했던 만큼만” 다시 살아가겠다는 것. 이제는 겨울에 “얼음 꽃”으로 피는 것이 아니라 너를 만날 수 있는 “그 봄”에 맞춰 나를 다시 피우겠다는 다짐을 울부짖는다. 겨울과 봄의 온도차를 극복할 낙망적 의지로 야생화는 “끝에 다시” 꼭꼭 숨어 기꺼이 얼굴을 숨길 테다.


야생화. 그 이름이 스스로의 성질에 있지 않고 단지 피어난 환경에 기대어 있다. 모두가 “이름도 몰”라주는 꽃이므로 결국 이름조차 없는 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름―없음이 끝까지 비관적이지만은 않은 까닭은, 그 꽃이 “피고 또 지는” 매순간 겪었던 마음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무책임한 삶이고 무심했던 사랑이었지만 “좋았던 기억”과 “그리운 마음”이 “이렇게 남아 서있”기 때문이다. 


이런 꽃의 노래를 견딜 수 없이 찬란하고 아름다운 꽃이 대신 불러준다. 함께 아파하고 더욱 슬퍼하면서 불러준다. 이 노래를 청중 앞에서 부를 때 가수 박효신은 자주 운다. 자신의 노래를 자신의 노래처럼 부르면서 울고, 자신의 노래를 자신이 아닌 노래처럼 부르며 울어준다. 노래의 가장 높은 곳으로 향할 때, 나에게 그의 목소리는 이렇게 들린다. 


‘날아, 그리고 가’


이런 노래는 내 생의 압도적이고 유일한 한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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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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