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오랜만에 만나는 추억의 색다른 조화 - 발레 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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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자랐던 지역의 문화센터에서 발레를 배운 적이 있다. 막 바를 잡고 다리를 찢던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내 꿈도 한때는 발레리나였다. 본가의 내 침대에는 아직도 발레리나가 그려져 있다.
그래서 처음 이 공연을 알게 되었을 때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의 내 장래 희망란에 빠지지 않았던 발레리나와 어렸을 적 백 번은 봤던 동화 <심청>이라니. 아주 오래간만에 만나는 옛 동화와 옛 취미가 나를 들뜨게 했다.
공연장에 입장하자마자 내 눈에 띈 건 커튼 위의 효(孝)라는 글자였다. 유니버설 발레단의 공연 <심청>은 한국의 아름다운 정서 효(孝)와 동서양의 아름다운 조화를 추구하는 공연으로, 공연 내내 주제 의식을 제대로 느낄 수 있어 좋았다.
1막에서는 눈먼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해 선원들을 따라 배에 오르는 심청의 간절한 효심이 돋보였다. 주목할 만한 점은 심청의 내적 갈등이 생생하게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늘 동화를 보면서 ‘아니, 아무리 아버지를 위해서라고 해도 본인의 목숨을 버리는 건데. 심청은 무섭지 않았던 것일까?’라고 생각했었는데, 극 중에서 아버지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과 아버지의 눈을 뜨이게 하고 싶은 마음의 충돌을 격렬하게 보여줌으로써 심청의 인간미를 더욱 느낄 수 있었다.
심청이 배를 탄 이후, 바로 다음 장면에서의 선원들의 역동적인 군무가 매우 인상 깊어 감상 중에 수첩에 남긴 메모이다. 박진감 넘치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기존의 발레 작품에서 보기 드문 남성 군무가 각도와 박자, 그리고 생생한 연주와 함께 어우러지며 강렬한 느낌을 주었다. 이게 바로 뱃사람들이구나! 직관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군무가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선원들의 군무 장면뿐만이 아니었다. 마지막 장, 봉사의 눈이 뜨인 이후 기쁨에 찬 이들의 춤사위 또한 기억 속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우리나라 극의 익살스러움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봉사들은 어깨동무하고 함께 발을 차는 등 온 무대를 누비며 과장된 동작으로 자신들의 기쁨을 표현했다. 덕분에 감동했을 뿐만 아니라 신나게 웃고 난 후 기분 좋게 공연장에서 나올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난 후, ‘중간중간 인물 소개처럼 몇몇 인물들이 여러 짝을 지어 짧게 춤을 추고 들어갔던 그 장면’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며 찾아보았다. 찾아본 결과 그건 발레의 ‘디베르티스망,’ 단어 자체로는 ‘기분 전환’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였다.
‘디베르티스망’은 극의 진전 없이 유희 목적으로서 주로 막간에 공연되는 짧은 발레를 의미한다고 한다. 다른 인물들의 짧은 군무(궁녀들의 군무 등)는 무난하게 관람하였지만 3장의 진주, 인어, 물고기들의 디베르티스망이 개인적으로 조금 길었다. 머릿속에 있는 줄거리 안에서 바닷속이 차지하는 분량이 크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조금 지루하게 느낀 것과는 별개로 ‘디베르티스망’이 분위기 환기에 정말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았던 다른 예술들의 경우 (뮤지컬, 연극, 영화 등) 이런 식의 긴 분위기 환기가 어렵다. 그래서 이미 피곤하고 지친 상태의 관객들이 헉헉거리며 흐름을 따라가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친절하고 유희적인 방식으로 관객의 숨돌리기를 도와주는 공연은 처음이었다. 과연 ‘온 가족이 보아야 할’ 공연이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면은 역시 ‘문라이트 파드되,’ 그리고 의외의 ‘봉산 탈춤’이었다. 문라이트 파드되는 유명한 장면이기에 어렴풋이 알고 있는 상태로 공연을 관람하였으나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워 마음에 들었고, 봉산 탈춤은 전혀 알지 못하던 상태로 마주한 신선함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황홀한 선율과 부드럽고 가벼운 발레 동작이 아름다운 한복 의상과 함께 어우러진 문라이트 파드되는 명불허전이었다. 특히 심청 역을 맡은 무용수의 표현이 너무 풍부해서, 2층이었던 내 자리에서도 심청의 감정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봉산 탈춤은 예상 밖의 즐거움이었다. 아무리 ‘동서양’의 조화를 표방한 공연이라고 해도 동양의 설화를 서양의 발레 공연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들이 생략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탈춤을 이 공연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즐거운 마음으로 웃으며 관람했다.
5월이 가정의 달이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그리고 그 시절 발레를 배웠던 꼬마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도 유니버설 발레단의 <심청>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생생한 음악과 풍부한 표현의 발레가 나를 어렸을 적 읽었던 동화로 둥실둥실 데려다준, 멋진 공연이었다.
[박주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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