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일은 우리가 떨어져 걷는다 해도 [미술/전시]

오늘은 서로의 안위를 살필 수 있는 사이가 되길 바라며
글 입력 2023.05.21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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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을 앞둔 청년들이 기획한 전시 하나를 소개할까 한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에는 지금도 동시다발적으로 수많은 전시가 생산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동덕여자대학교 큐레이터학과 4학년 학생들이 기획한 전시, 《내일은 우리가 떨어져 걷는다 해도》는 개인주의 확산에 따라 한국 사회에서 잃어버린 ‘정’을 떠오르게 하는 작품들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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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란 개념은 기성세대의 것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이 전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정은 과거 학연, 지연, 혈연을 중심으로 하는 가부장적이고 부담스러운 끈끈함이 아니다. 그보다는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고 보장받으면서도 언제든 뭉치고 헤어질 수 있는, 그러나 함께 있을 때만큼은 서로에게 따듯하게 안부를 건네는 정을 말한다. 마치 매일 같이 인사를 나누는 이웃이 언제 이사를 가버려도 이상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혹자는 이 전시에서 되찾고자 하는 ‘정’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실제로 근래 미디어에 비치는 ‘요즈음 청년들’은 누구도 자기 삶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고, 남을 배려할 줄도 모르는 사람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20대인 필자뿐만 아니라 주변의 청년들을 보면, 이들은 개성을 존중받기를 바라는 것이지 영원히 혼자 살고 싶은 것이 아니고, 서로의 사생활에 깊이 관여하지 않을 뿐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도 아니다.


이에 전시를 기획한 동덕여자대학교 큐레이터학과 4학년 학생들은, 《내일은 우리가 떨어져 걷는다 해도》를 통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오늘날의 연대 방식을 보여준다. 전시는 5월 31일(수)부터 6월 6일(화)까지, 일주일간 온수공간(마포구 월드컵북로 7길 14)에서 진행된다. 참여작가는 권병준, 권아람, 권혜수, 노뉴워크, 서해영, 송지형, 이신애며, 이들은 사운드, 설치, 영상, 웹, 출판 등 다양한 매체로 관람객에게 말을 전한다.


전시 서문은 기존 미술계의 전시 서문 작성 문법에서는 조금 벗어나, 편지 형식으로 쓰였다. 이는 기획자의 목소리가 관람객 한 명 한 명에게 가닿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럼 24명의 청년이 뜻을 모아 부친 편지를 끝으로, 오늘의 소개를 마친다.

 

*

 

친애하는 당신에게

 

여름을 코앞에 두고 평안히 지내고 계신가요? 한숨이 푹 나오는 현실을 보고 있자면 평안하냐며 인사 건네기도 무색합니다.

 

과거에는 가족, 국가, 사회를 위해 몸과 마음을 희생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곤 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원치 않는 우리는 그 불편한 굴레에 더 이상 엮이려 하지 않죠.

 

게다가 가부장제에서 비롯한 전통 가족 개념이 점차 붕괴하면서 혼자 살기를 결심하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고요. 인간관계를 지속하는 데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급기야 위급한 상황에 놓인 사람을 돕는다거나 안부를 묻는 사소한 교류마저 외면합니다.

 

이쯤에서 애써 숨겨두었던 외로움과 불안함을 들여다볼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나요?

권혜수는 아파트 공고문을 일방적인 공지글이 아니라 나와 당신을 잇는 연결고리로 봅니다. 서해영은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와 거리를 그물에 빗대어, 벌어진 틈새를 서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색실로 엮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우리’는 어떤 모습인가요?

송지형은 과거 여성들이 한데 모여 애환을 씻어내곤 하던 빨래터나, 현재 독일의 주거공동체처럼 서로를 보살피는 현장을 웹에 꾸준히 기록합니다. 권아람은 네 명의 퀴어가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집에서 벗어나, 나를 있는 그대로 돌볼 공간을 마련하는 과정을 그립니다. 노뉴워크는 누구나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가벼운 천으로 공간을 만들어,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연대의 장을 마련합니다.

 

어쩌면 그냥 지나쳤을 인연을 부러 잡아본 경험이 있나요?

권병준이 제작한 헤드폰은 전시장을 거니는 사람들이 마주한 순간, 서로의 소리가 얽히다가 교환되는 소통의 매개체가 됩니다. 이신애는 서점에서 일하면서 체득한 소소한 업무용 팁을 엮은 책자를 만들어, 미래의 인턴에게 전달하는 사랑스러운 배려를 보여줍니다.

 

외로운 나날을 보냈던 우리는 비로소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공감하고,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확인합니다.

 

내일은 우리가 떨어져 걷는다 해도, 오늘은 서로의 안위를 살필 수 있는 사이가 되길 바라며,

 

전시를 준비하는 동덕여자대학교 큐레이터학과 학생들 드림

 

 

[이세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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