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황혼까지도 타올랐던 활화산 샤넬과의 조우 - 코코 샤넬

글 입력 2023.04.29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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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자극제가 필요했다. 몇 달간 해오던 작업을 멈춘 이래, 바람 빠진 풍선처럼 처져 있는 나를 잡아줄 무언가가. 그래서 기록하지 못한 채 허망하게 날려버린 시간들을 주워 담고자 컴퓨터를 켰다. 그러나 깜빡이는 커서만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쓸 수 없었을 때 그 심각성을 절감했다. 사고 회로가 멈춘 몇 개월 동안 나는 사유하고 쓰는 법을 잊은 것만 같았다.

 

그때 마침 아트인사이트에서 코코 샤넬에 대한 소개를 읽었고 정말 오랜만에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엄청난 열정으로 점철된 세계적인 패션 거장의 이야기를 보면 영감을 얻어 재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부풀어 올랐다. 책을 펼쳐들었을 때 나는 단숨에 20세기로 빨려 들어갔다. 그곳에서 나는, 꺼져 가던 내 열정의 도화선에 다시금 불을 붙이는 활화산 '가브리엘 샤넬'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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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에서 영감을 얻곤 했던 가브리엘 샤넬



“매력적이면서 호감을 주고 인간적인가 하면 혐오감을 주기도 하며 때론 너무 지나쳐 보이기도 하는 여성. 분노, 짓궂은 말, 창작력, 변덕스러움, 극단적 성격, 친절함, 유머, 관대함 등이 샤넬이라는 독특한 인물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작가 장 콕토가 묘사한 샤넬의 초상이다. 상충하는 성격의 단어들이 나열된 묘사는 샤넬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혼란스러움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모순적이고도 이중적인 것이 사람의 특성임을 감안한다면 이렇게 다양한 특성이 혼재된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샤넬이 활동하던 때는 여성에게 코르셋을 조일 만큼 보수적이며 여성 혐오적인 시선이 더욱 팽배했었다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그저 지나칠 수 없었다. 가브리엘이 이렇게도 자기를 표현하고 실현하는 데 도가 튼 자유로운 여성이었다는 것이 잘 암시돼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샤넬은 디자이너로 명성이 널리 알려진 만큼 그의 업적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디자이너이기 이전에 이렇게나 다채롭고 입체적인 인간 가브리엘 샤넬은 어떨까. 이는 샤넬이 자라온 태초의 환경과 과거 기억을 빼놓고는 설명 불가능하다.

 

샤넬이 12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사망했다. 홀로 다섯 명의 아이들을 키울 자신이 없었던 아버지는 세 자매와 두 형제를 각각 수녀원과 다른 가정집으로 보냈다. 아버지는 타고난 역마 기질이 있어 장사하며 전국을 돌아다녀야만 했으나, 아이들에게 예속되는 순간 제약이 커질 것을 두려워한 탓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닮아 폐쇄적이고 억압된 상황을 극도로 싫어했던 샤넬은 수녀원에서 갇혀 지내는 생활을 극도로 싫어하고 괴로워했다. 따라서 아드리엔과 도망쳐 나와 모자를 만들거나 뮤직홀에서 코코라는 애칭의 마스코트 가수로 활동하며 자립하고자 애썼다.

 

가브리엘은 훗날 회고록에서도 이때의 기억을 의도적으로 삭제하고, ‘부유한 부모 밑에서 부족한 것이 없이 자랐다’고 둘러댈 정도로 당시의 기억을 혐오했다. 그런데 샤넬이 유년기의 기억을 의도적으로 이때를 작품 활동을 할 때나 패션업계를 통해 번 돈으로 구입한 여러 저택과 호텔에서 유년기에 보낸 수녀원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을 자주 반영하여 창작했다는 점을 특기할 만하다. 가령 뮤직홀에서 마스코트로 활동할 때 사용한 코코의 이니셜과 같은 알파벳 C 두 개를 교차시킨 모양을 마크로 사용한 것이나, 수녀원에서 본 숫자 5가 행운을 불러온다고 여기며 향수 이름을 '샤넬 넘버 5'로 지은 것이 그러했다. 또 저택을 꾸밀 때 수녀원의 계단을 떠올리며 비슷한 구조로 설계한 것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 시절을 혐오했으면서도 그때의 기억이 평생을 따라다니며 영감을 주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과거 자체는 부정적으로 여길지라도 그것을 떠올리는 것은 그런대로 좋게 여겼다’는 식의 서술로 미루었을 때, 가브리엘은 지울 수 없다면 제대로 활용하는 쪽을 택함으로써 돌파구를 찾으려던 것으로도 보인다. 한편 이렇게 입체적인 특성을 보인 그녀가 패션계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심미안을 지닌 가브리엘이 추구한 독특하고도 창의적인 패션 경향과 연관 지을 수 있다.

 

 

 

샤넬이 패션계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



먼저 여성을 억압하는 코르셋을 벗어던지고 실용성과 편리성을 추구하는 스타일의 옷을 창출해 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샤넬이 살던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여성들은 코르셋을 조임으로써 S 라인을 강조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스스로 ‘체구가 작고 가슴도 빈약’하다고 여긴 샤넬은 그러한 사회 풍조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성별의 구분을 해체하는 유니섹스 풍조를 고집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여성용 승마복을 입고 승마를 했을 때 불편함을 호소한 경험 역시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승리욕이 강했던 가브리엘은 말을 잘 타기 위해 '남자 셔츠와 넥타이, 스포츠 외투'를 입었는데 결과적으로 더 좋은 결과를 냈고, 이는 값싼 편물로 만든 저지나 여성용 바지와 같은 실용성과 편리성을 제고하는 등의 옷을 제조하는 것으로 이어졌으니 말이다. 훗날 샤넬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성의 몸에 자유를 주었다. 그동안 여성의 몸은 레이스, 코르셋, 속옷, 심을 넣어서 몸매를 강조하는 옷을 입고 땀을 흘리고 있었다.”

 

샤넬은 자신을 첫 번째 고객으로 상정하여 '자신이 입을 수 있고, 입고 싶은 옷을 제작하는 것'을 가장 기본적인 신조로 삼았던 만큼 자신의 신체적 구조나 결점을 보완하는 것을 우선시했다. 그러나 개인의 만족에만 그치지 않고, 일하는 여성들이 조금이라도 더 편하고도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개성을 뽐낼 수 있는 수단의 역할도 해낸 것이다.

 

다음으로 특유의 창의력과 재치로 기존의 관습을 답습하지 않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는 현재까지도 성황리에 판매되고 있는 고급 향수 '샤넬 넘버 5'를 출시해 낸 데서 드러난다. 당시 유행했던 향수들은 4월의 미소, 봄의 욕망 등 시적인 이름을 붙이고 유리병을 화려하게 꾸미는 경향이 있었는데, 샤넬은 육면체의 단순한 유리병을 채택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또 자신의 이름을 넣자는 파격적 제안을 했는데, 협업하고 있던 에르네스트가 말리자 “그래야 다른 향수들과 확실히 구별되죠.”라고 답하기도 했다. 가브리엘의 고집과 확신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여기서 샤넬의 안목이 뛰어남을 알 수 있는데, 당시 샤넬을 시샘했던 한 디자이너는 유명세가 있었음에도 향수에 자신의 이름을 넣지 않았고 그것이 부정적으로 작용해 판매 기록이 저조했다는 것을 보면 그러하다.

 

한편 샤넬의 향수에서 단순한 디자인을 채택한 것은 겉모습보다 내용물을 중시한 데서 기인하는데, 허례허식을 싫어했던 그녀의 성격과도 상통한다. 너무 화려하고 불편하기만 한 드레스는 보기에도 조잡스럽고 지속성도 떨어진다고 판단하며 평소에도 편하게 입을 수 있는 검은색 드레스를 고안해 낸 그였으니 말이다. 이렇게 사치를 기피했던 그의 특성은 보석을 지독히도 싫어하면서도 인조 보석을 만들기로 결심한 이유에서도 엿볼 수 있다. “허영에 들떠 있는 시대에는 진짜 보석을 달고 거들먹거리는 것으로 위화감을 조성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시류를 잘 읽어내고 사람들의 니즈를 파악하여 뛰어난 안목으로 시대의 흐름에 맞는 제품들을 선보였다는 것을 그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샤넬이 통과한 20세기는 2차 세계대전을 포함해 몇 번의 전쟁이 치러진 격동의 시기였다. 날카롭고 냉철한 비판의식을 지닌 샤넬은 전시 상황에서는 아름다움만을 치장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님을 알았다. 따라서 단순하고 편리한 모자를 제작했고, 편안하면서도 우아함을 강조할 수 있는 이브닝드레스를 고안해 냈다. 놀랍게도 시의적절한 의류를 생산해 낸 덕분에 그는 어두운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호황기를 맞았다. 요컨대 시시각각 바뀌는 현 시류에 대처하는 감각과 발 빠른 제작은 그의 패션이 더욱 붐을 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고안해 낸 패션을 자신만의 리그처럼 이용하지 않고, 대중성을 제고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샤넬은 자기 옷을 복제하는 것을 달가워했고, 오히려 디자이너에게 보내는 최고의 찬사로 여겼다. 그래서 자기 옷은 얼마든지 복제가 가능하도록 허락했다. 실제로 자기 옷을 모방한 이브 생로랑을 높이 평가하며 크게 될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의외의 발견은 잃어버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라는 그의 잠언에서도 엿볼 수 있는 지점이다. 가브리엘은 자신의 고유성을 지키는 것보다는 여성의 신체적 해방을 위한 의복을 만들고 널리 보급함으로써, 더 많은 이들이 자신이 고안해 낸 편안한 옷을 입는 일을 더 중시한 셈이다. 이는 추후 뉴룩 패션이 등장했을 때 한 기자가 그것과 가브리엘의 패션을 비교한 것과도 맥을 같이한다. '뉴룩은 디자이너 외에 누구도 복제할 수 없는 복잡하고 폐쇄적인 옷'이라는 결점을 지적한 데 반해, 샤넬의 옷은 대중적이었다고 평가한 것 말이다.

 

 

 

샤넬이 사랑한 남자들의 이면을 마주하다



샤넬의 패션은 그가 사랑한 남자들과의 경험에서 착안한 경우가 많았다. 일례로 웨스턴민스터 공작과 선박을 함께 탄 이후에는 선원들이 자주 쓰는 베레모에서 모자를 착안했다는 점, 타 국적을 지닌 이와 교제할 때는 그 나라에 가서 자주 목격한 전통적 특성을 패션에 접목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특히 유니섹스 경향이 짙은 가브리엘의 패션에는 단발이 어울린다고 했을 때 프랑스 전역에서 남자형 커트 붐이 일어났는데, 이 역시 본래는 사랑이 좌절된 샤넬이 머리를 자른 데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샤넬은 사랑하는 남자들과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깨닫고 자립심을 기르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나는 이 점을 짚어보려 한다. 이를 파헤치려면 특히 샤넬이 디자이너로서 성공하기 이전에 만난 남자들에게서 느낀 관계 양상에 주목해야 한다.

 

귀족 에티엔 발장은 가브리엘이 뮤직홀에서 코코라는 애칭의 마스코트 가수로 일할 때 알게 된 사람이었다. (물론 가브리엘은 그를 애인으로 규정하진 않았으나, 샤넬이 추후 겪게 될 일에 결정적 영향을 행사한 중요한 인물이니 언급하겠다) 에티엔은 신랄한 말투나 재치를 지닌 가브리엘에게 매료되었고, 그를 자신의 저택인 루아얄리외에 데려가고자 했다. 가브리엘은 그를 사랑하진 않았지만, 뮤직홀을 전전하고 가수가 되려다 실패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기에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놀라운 것은 둘은 서로를 정부로 규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가브리엘은 그에게 이성적 호감이 없었기에 실망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에티엔이 그를 정부로 상정하지 않은 이유가, 가브리엘의 낮은 사회적 신분 때문이었다는 데 있다. 에티엔은 가브리엘을 좋아한다면서도 가족이나 친구와 있을 때는 가브리엘과 멀리 떨어져 있음으로써, 그를 자신과 다른 위치로 상정해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기득권으로서의 입지를 공고히했다. 그러면서도 가브리엘에게 금전적 지원은 아끼지 않음으로써 자신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는 불평등한 관계를 조성했다.

 

이는 가브리엘이 경제적 자립을 위해 홀로 서겠다는 선언했을 때 더욱 여실히 드러났다. 가브리엘은 그의 저택에서 무력감과 공허감을 느꼈고, 자립하고자 에티엔에게 모자 제작 사업에 필요한 초기 자금을 빌리려 했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다. 요컨대 그는 가브리엘을 자아를 지닌 주체적 여성으로 인식하지 않는 여성 혐오적 시선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이는 후에 가브리엘이 막대한 금액을 벌어들여 경제적 자립을 이루었을 때, “여전히 일하고 있나 보군. 그럼 카펠이 당신을 부양할 능력이 없다는 건가?”라고 물은 데서 더욱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면서도 가브리엘이 카펠과 남다른 애정을 나누고 있음을 눈치챘을 때 그제야 가브리엘을 중요히 여긴 것은 아이러니하다. 돌연히 없던 사랑이 피어난 것일까? 여기서 그가 귀족 핏줄을 타고나 원하는 것은 뭐든 손에 넣어야 했던 그였다는 점을 미루어 본다면 한 가지 합리적 의심을 할 수 있다. 가브리엘을 사랑하게 되어서라기보다는 자신은 더는 가브리엘을 소유할 수 없다는 박탈감에서 기인한 감정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는 아서 카펠이 가브리엘을 마음에 든다고 했을 때, "그렇다면 그녀는 자네 여잘세!"라며 거래하듯 대화한 바 있고, 여기서 여성을 일종의 도구처럼 여기는 면모가 드러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과도한 해석은 아닐 것이다.

 

한편 평생 가장 사랑한 남자였다는 카펠은 그와는 다소 다른 면이 있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제대로 해내어 성공하는 데 큰 뜻을 가지고 있던 가브리엘의 마음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성공에 대한 큰 야망을 갖고 있던 그는 가브리엘의 욕망을 단번에 알아봤고, 가브리엘의 독립을 도왔다. 또한 가브리엘의 직관력을 인정하며 그것 역시 또 하나의 뛰어난 지성임을 깨닫게 도와주었다. 또 카펠은 배움은 짧지만, 직관력이 뛰어난 가브리엘이 부족한 교양을 채울 수 있는 다른 여자들과의 교제가 필요하다 여겼고, 예술가와의 가교 역할을 자처했다. 이러한 그를 두고 가브리엘은 카펠이 애인인 동시에 “나의 오라버니였고, 아버지였고, 가족”이었다고도 했다.

 

그러나 보이 카펠도 그녀와 함께 외출하는 일이 없었다. 이는 사교계 사람들에게 그를 소개하길 꺼렸기 때문임을 감안했을 때, 그녀와 완전히 동등한 관계로 상정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상류사회로 진입하려는 욕망이 컸던 그는 가브리엘을 사랑했지만, 사회적 시선을 정면으로 부딪치는 행동을 감행하지는 않았다. 패션 산업으로 성공을 거둔 가브리엘이 자립에 성공해 그간 카펠에게서 빌린 돈을 전부 입금했을 때 “당신에게 장난감을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내가 자유를 준 셈이 됐군.”이라고 발언한 것은 그의 이러한 면모가 드러나는 충격적 발언이었다. 가브리엘은 자신을 동정하는 듯한 그들에게 분노했으나, 현실을 똑바로 마주했고, 절대 안주하지 않고 자립심을 길러 더욱 크게 성공하자는 의지를 불태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여기서 특기할 점은 방랑 기질이 있었다는 아버지의 특성이 이들에게서 조금씩 보인다는 것이다. 바람기가 심했던 데다, 그것을 묘하게 합리화하고 넘기는 데 별다른 죄책감을 넘기지 않았다는 점, 바깥일은 마치 남성의 것이고 육아는 여성의 전유물인 것처럼 여긴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실제로 가브리엘은 유년기에 읽은 통속 소설에서 남성이 폭력적으로 묘사된 것을 떠올리며 그들을 통속 소설 속 주인공과 겹쳐보기도 했는데, 이는 앞선 특성에서 기인한 것이겠다.

 

 이후 가브리엘이 만난 남자들의 경우도 비슷한 면모가 보였다. 특히나 방랑 기질이 있다는 것이나 바람기가 있다는 것은 공통이었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성공한 가브리엘은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 무위도식하는 생활이 지겹지만 웨스턴민스터의 공작의 바람대로 그의 생활에 맞춰주면서도, 상대로부터 열등감을 끌어내고자 프랑스어만을 사용했다는 점이 그러했다. 가브리엘은 사실 영어를 구사할 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은, 상대의 우위에 서려는 의도적 전략이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을 심리적으로 조종하려는 이리브의 태도를 분명히 인식하고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이리브는 가브리엘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한다고 비판했다가도 막상 가브리엘이 하숙집으로 옮기자 "자신이 그런 빈민굴에서 살 수 있을 거로 생각하냐"며 돌변했는데, 그에게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즉 주체적 판단에 의해 사리 분별을 하고 자기 자신을 지키는 데 가장 큰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샤넬의 위기와 재기, 거기서 용기를 얻다



한편 샤넬의 세계적인 성공을 이룩했으나 입지가 흔들린 순간도 있었다.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프랑스 사람들은 전쟁터로 나간 직후였다. 가브리엘은 드레스를 찾는 시대는 끝났다는 느낌이 들었다며 메종 샤넬의 문을 닫았다. 그러나 그는 안정감은커녕 지속적인 무력감과 허무감에 시달렸고 15년이 흐른 후에야 메종 샤넬의 문을 열었다. 이는 최고의 입지를 차지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가브리엘의 강박과 끊임없는 성공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자, 당시 패션계를 장악한 새로운 뉴룩 패션에 대한 과감한 도전장이기도 했다. 종전 직후 디오르의 등장으로 다시금 여성의 몸을 억압하고 신체적 자유를 박탈하는 뉴룩 패션이 선풍적 인기를 끌었는데, 샤넬은 '옷 안에 여성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디자이너의 이기적이고 안일한 방식의 디자인을 못 마땅히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샤넬의 첫 복귀 작품 발표회에서 그녀의 패션은 시대를 역행하는 과거 유물처럼 여긴 이들 사이에서의 분위기는 썰렁했다. 그러나 곧 실용성을 중시하는 미국인들로부터 주목받기 시작했고, ‘20세기 가장 실력 있는 패션 디자이너’에게 주는 네이먼 마커스 상을 받는 등 최고의 입지에 다시금 오르는 쾌거를 기록했다.

 

이러한 샤넬은 예술계 사람들이나 친구들이 다 죽고, 형제들과 연락도 끊은 이후에 극심한 고독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증손녀에게 이렇게 말을 하기도 했다. “타니, 네가 옳았어. 너한테는 남편과 자식들이 있으니까. 나는 혼자고 내 인생은 실패야.” 그런데 정말일까? 물론 그는 최고가 되고자 필사적이었고 그러한 엄청난 욕심은 주변 사람들에게 높은 기술력과 강도 높은 노동과 인내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눈부신 성공을 이끌어냈고, 그의 날카롭고 매서운 말투 이면에 담긴 야망을 읽어낸 이들은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이는 가브리엘과 작업한 이들이 "그녀의 괴팍한 성격을 떠올릴 때마저 눈을 반짝이며 말할 정도로 그녀에 대해 기분 좋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대목만 보아도 그렇다. 단순히 가족을 이루는 것뿐 아니라 그저 직업적으로도 성공했고, 거기서 그를 존경하며 주위에서 따른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을 봤을 때 실패한 인생이라는 것은 다소 편협한 판단이 아니었을까.

 

책을 읽는 내내 쾌감에 사로잡히긴 했지만, 황혼에 이르러서 다시금 세계 1등의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었던 샤넬의 말년을 보았을 때는 그 어떤 부분보다도 짜릿함을 느꼈다. '쉴 때가 더 피곤하다'며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경험을 했던 샤넬에게서 깊은 영감을 받았고, 용기를 얻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1년이 안 되는 기간동안 쉬다가 책을 든 탓인지 글자가 떠다녀 곤욕을 치렀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까지도 계속해서 미끄러지길 반복했다. 그러나 샤넬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렇게 하다 보면 제 페이스를 찾을 날이 오리라 믿으며 도전하리라 다짐했다.

 

그리하여 그녀가 황혼에 이르러 도전했을 때 최악의 평을 받았는데도 물러서지 않고 당당히 외쳤던 그 말을 곱씹으며 다시금 일어서려 한다. “두고 봐! 다시 시작할 거니까.......”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될 거라는 옮긴이의 말에 깊이 공감하며, 잃어버린 열정을 되찾게 도와준 저자에게 감사하며, 글을 마친다.

 

 

[추예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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