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모어 바깥으로 - 여행하는 말들 [도서]

초국적, 혼종적 사회언어학 에세이
글 입력 2023.04.17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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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정보 속에 둘러싸인 채 살고 있다.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을 확인한다. 거리를 걸으면 간판과 이정표, 전단지가 나를 따라다닌다. 학교나 사무실에 가면 책과 서류 속 글자들에 파묻혀 하루를 보낸다.

 

내가 할 줄 모르는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에 가면 어떠한가? 적어도 거리에서만큼은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다. 그동안 정보를 가져다주던 문자가 순식간에 그림으로 바뀐다. 간판만 보고는 이 가게가 미용실인지 헬스장인지 알 길이 없다.

 

‘모른다’라는 두려움이 휘몰아칠 수도 있고, 어쩌면 자유로워질 수도 있다. 하루 종일 대량의 정보를 수용하며 지내야만 하는 삶이라니, 얼마나 피곤한가? 언어를 모른다는 것은 정보를 읽는 대신 글자를 미학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나를 둘러싼 색과 향에 집중해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내가 할 줄 모르는 언어의 세상으로 가보는 것을 포함하여 모어 바깥으로 나간 상태 전체를 ‘엑소포니(exophony)’라고 한다. 엑소포니 문학의 대표 주자인 ‘다와다 요코’는 독일에 살며 독일어로 글을 쓰는 일본인 작가이다. 그의 수필집 <여행하는 말들>을 읽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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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는 말들>은 저자가 전 세계 다양한 도시를 여행하며 언어에 관련해 경험하고 관찰한 내용을 담은 책이다. 각 장마다 하나의 도시에서의 일화가 등장한다.

 

 

 

외국어로 글쓰기


 

세상에 외국어로 글을 쓰는 사람은 아주 많다. 대다수의 대학원생들이 영어로 논문을 쓰고, 외국어로 시나 소설을 쓰는 사람도 있다. 미국인인 타일러 라쉬는 한국어로 <두 번째 지구는 없다>라는 책을 썼다.

 

나도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로 글을 썼다. 학교를 다니면서 글을 쓸 일이 많았는데 1학년 초반에 다와다 요코라는 작가를 알게 되어 다행이었다. 적재적소에 올바른 단어를 사용하고 문법을 전혀 틀리지 않은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원어민이 쓴 글처럼 보이도록 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잘 전달하는 글을 쓰면 되는 거였다.

 

 

외국어로 창작을 할 때 어려운 것은 언어 자체보다 편견과 싸우는 일이다. 외국어를 익히는 것을 ‘유창하다’, ‘서투르다’의 기준으로 측정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독일에도 일본에도 많다. 일본어로 예술을 하는 사람에게 “일본어를 참 잘하시네요” 하고 말하는 것은 고흐에게 “해바라기를 참 잘 그리시네요” 하고 말하는 것과 같아서 참 이상한데,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꽤 있다. 창작자가 외국인이면 바로 ‘유창하다’, ‘서투르다’의 기준으로 바라보나 보다.

 

<여행하는 말들> 26p

 

 

외국어를 배우다 보면 이따금씩 모어로 딱 맞아떨어지게 번역할 수 없는 단어를 마주친다. 이런 순간에 비로소 우리는 생각과 언어가 일치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외국어를 통해 사고가 확장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같은 한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이라도 각자의 한국어는 다르다. 누군가의 한국어는 명징하며 분석적이고, 다른 누군가의 한국어는 다채로우며 감각적이다. 하물며 다른 언어를 모어로 하는 사람의 한국어는 어떻겠는가. 각자가 살아온 삶과 성격, 경험이 모두 다르기에 각자의 언어가 다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경계의 주민


 

언어와 문화는 뗄 수 없는 관계다. 외국어를 배우면 그 나라의 문화도 함께 배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반말을,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존댓말을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다르다. 공적인 관계에서는 상호 간 존댓말을, 사적인 관계에서는 상호 간 반말을 한다.

 

한국어 ‘부탁합니다’를 프랑스어로 하면 ‘S’il vous plaît’인데, 이것을 뜻 그대로 풀이하면 ‘만약 그것이 당신을 기쁘게 한다면’이 된다. 프랑스인들은 빵집에 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바게트 하나 주세요, 만약 그것이 당신을 기쁘게 한다면.”

 

 

바눈이 통역해 주었는데 두 번에 한 번은 난감한 얼굴을 한다. “통역은 할 수 있지만 그런 말은 독일어로 하면 아주 이상하게 들리니까요”라며 바눈은 미리 양해를 구하고 주의 깊게 통역을 시작한다. 바눈의 망설임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나는 경계를 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경계의 주민이 되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경계를 실감할 수 있는 그 망설임의 순간에 언어 이상의 중요한 무언가를 느낀다.

 

<여행하는 말들> 55p

 

 

이주자로 살다 보면 과거에 살았던 곳과 현재 살고 있는 곳, 양쪽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기분이 든다. 이런 상태를 ‘경계의 주민이 되고 싶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외줄타기를 하듯 두 발을 한 줄로 모으고 발끝에 힘을 꽉 준 채 서 있다가, 원할 때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팔을 뻗어 양쪽의 사람들과 악수하는 것이다.

 

 

 

꿈은 어떤 언어로 꾸세요?


 

 

꿈은 어떤 언어로 꾸는지 묻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그 질문을 받으면 언제나 좀 화가 난다. “하나 이상의 언어를 말하는 사람은 정체를 알 수가 없어. 한쪽은 거짓말이고 한쪽은 진심이겠지”라고 말하는 것 같다.

 

<여행하는 말들> 60p

 

 

프랑스에 간 지 몇 주쯤 되었을 때, 자고 일어났더니 룸메이트 친구가 말했다. “너 프랑스어로 잠꼬대하더라.” 뭐라고 했냐고 물었더니 “Je ne sais pas grammaire(나는 문법을 몰라)…….”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살 때는 프랑스어로 자주 꿈을 꿨다. 내가 외국어로 꿈을 꾼다는 걸 처음 알아차렸을 때는 좀 신기했다. 그러나 꿈속에서조차도 처음엔 사람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서야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얼마 전에도 프랑스어로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깨어나서 다시 떠올려 보니, 이런 내용의 대화가 오갔다는 건 기억이 나는데 어떤 문장을 말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꿈속에서 언어가 오간 것이 아니라 형태가 없는 어떤 느낌만이 오간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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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적 자아


 

어학원에 다닐 당시에 한 미국인 친구는 언제나 수줍은 미소를 띠고 높은 목소리로 프랑스어를 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카페테리아에서 다른 미국인 친구와 대화하는 그 친구를 보고 놀랐다. 아주 쿨하고 무심한 말투와 낮은 목소리의 영어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어적 자아가 달라서 그렇다.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각각의 언어를 구사할 때의 자아가 조금씩 달라서 목소리나 말투, 표정까지 달라진다. 자라온 환경에 따라 각기 다른 자아가 형성되듯 그 언어를 배울 때의 환경, 그리고 그 언어로 말한 경험에 따라 언어적 자아, 즉 성격이 달라지는 것이다.

 

 

모어 바깥으로 나가는 건 이질적 음악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닐까. 엑소포니는 새로운 교향곡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여행하는 말들> 105p

 

 

모어가 아닌 외국어를 배우고 사용해 보는 엑소포니의 경험은 나의 세계를 한층 확장하는 일이다. 새로운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세계 여러 도시에서 작가가 관찰한 이야기들은 문화, 역사, 철학 등 언어에 얽힌 다양한 주제를 관통한다.

 

언어와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김지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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