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살아남기 위해 택해야 하는 죽음 - 실비아, 살다 [공연]

글 입력 2023.03.18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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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가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기차에 탄다. 좌석도 목적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심지어는 기차에 탑승하는 것 자체도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한 일은 아니었다.


아직 여행할 준비가 안 되어 오늘은 못 가겠다는 소녀에게 어머니는 말한다.


“너무 예민하구나. 그냥 기차 여행일 뿐이야.”


이건 남들이 다 하는 기차 여행.


이 기차의 이름은 인생이다. 소녀는,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세상으로의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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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쥔 것은 돌아오는 것이 불가능한 편도 티켓 한 장뿐이다. 종착역인 아홉 번째 왕국에 도착할 때까지 기차에서 내릴 방법이란 없다. 


머나먼 목적지로 향하는 여정이 생각만으로도 지난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지, 기차에 탄 다른 이들은 꽤나 평온해 보인다. 몇몇 승객들은 기차 여행을 즐기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들처럼 이 여행을 즐겨보려 노력해봤다. 기차의 매점에 가서 주전부리를 사 먹고, 창밖의 아름다운 초록 풍경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보기도 했으며, 까무룩 단잠에 들었을 땐 지루할 새 없이 시간이 흘러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기차 안에서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일은 여전히 갑갑하고 괴롭다. 그냥 내가 기차 여행이 체질에 안 맞는 사람인 건지, 아니면 초록 풍경도 단잠의 꿈도 사실은 모두 기차 안의 것이 아님을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여행을 이어가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면 차라리 어떻게든 기차에서 내리는 게 적당한 선택 같다는 생각을 한다.




실비아 플라스의 기차 여행, 그리고 비상정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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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는, 자신이 탄 기차에서 내리기 위해 세 번이나 비상정차를 시도했던 시인 ‘실비아 플라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9세, 20세 때의 시도, 그리고 31세에는 기차 밖으로 떠나는 데 성공했다.


좀처럼 편해지지 않는 여행을 견디다가 결국 기차 밖으로 향한 이들이 아주 적지는 않지만, 아주 어린 나이였을 때부터 10년마다 반복해서 비상정차를 시도한 그녀의 이야기는 묘하게 충격적이다.


그녀의 여정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실비아 플라스는 1932년 10월에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8살에 보스턴 헤럴드지에 시를 발표할 정도로 어렸을 적부터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으며, 미국의 저명한 잡지들에서 소개되고 각종 문학대회에서 상을 받은 수재였다.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유학길에 오르고, 그곳에서 시인 테드 휴즈를 만나 결혼을 한다.


결혼 후 실비아는 육아와 집안일, 생계를 위한 대학 강의, 남편의 원고 타이핑까지 도맡으며 작품 활동에 집중할 수 없는 환경에 놓인다. 시인으로서 화려한 업적을 쌓아가는 남편 테드와 달리 그녀는 점차 시인이라는 정체성이 잊히게 된다.


그녀는 좋은 딸이자 아내, 엄마, 그리고 동시에 훌륭한 시인이 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고 가정에도 헌신하는 삶을 살았으나, 테드가 외도를 하고 별거 생활을 하며 큰 충격과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전례 없이 추웠던 1963년 영국의 겨울에, 그녀는 가스 오븐 속에 머리를 박고 자살하였다. 이것은 그녀가 9세, 20세였을 때에 이은 세 번째 자살 시도였고, 이전과 달리 이번에는 삶으로부터 영영 멀어지게 된다.


 


살아남기 위해 택해야 하는 죽음


 

옵저버지의 비평가였던 알바레즈의 <자살의 연구>에 따르면 10년마다 반복되었던 실비아의 자살 시도는 죽음이 아닌 새로운 삶을 위한 시도로 해석된다.


실비아의 삶과 작품으로부터 모티프를 얻어 만들어진 공연 ‘실비아, 살다’ 역시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그녀의 죽음 자체와 그 이유보다 ‘살아가는 것’에 초점을 둔 채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극 중에서 실비아는 ‘나로 살아남기 위해’, ‘나를 해방시킬 죽음을 택한다’고 말한다. 죽어야만 살 수 있는 그녀의 세상, 이 아이러니를 단적으로나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죽기 몇 주 전 출간된 자전적 소설 ‘벨 자(The Bell Jar)’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실비아는 그녀 자신과 꼭 닮은 주인공 에스더의 상황을 유리종 ‘벨 자’ 안에 갇힌 삶으로 비유한다. 천장에 매달린 벨 자는 언제든지 아래로 내려와 그녀를 가둘 준비가 되어 있다. 유리종 안에서 바깥세상을 볼 수는 있지만 나갈 수는 없다.


실비아에게 벨 자는 그녀를 둘러싼 세상과 사람들 그 자체이다. 그녀의 재능과 열정, 인격을 온전히 바라보거나 인정할 마음 없이 어떤 역할들 안에 가두려고만 하는 비논리적이고 불공평한 세상의 모든 시선이야말로 실비아의 벨 자이다.


그렇기에 벨 자에서 나간다는 것은 세상을 등지는 것. 유리종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죽음뿐이다.


이는 종착역까지 쉼 없이 달리는 기차 여행과도 같다. 그 안에서 미쳐가지 않고 한층 더 삶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려야만 하는 기차 여행 말이다.

 

실비아는 그렇게 새로운 여행을 위해 비상정차를 한 것이다. 숨을 크게 쉬기 위해, 미치지 않기 위해, 혹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아픔과 진실에 대해 발화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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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살다’는 실비아의 작품 세계와 꼭 닮은 공연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세련되고 정교한 언어로 진실과 불안을 감춘 시들을 경멸했다. 적나라한 표현으로 자신 안의 주제를 대담하게 내보인 실비아의 작품처럼, 이 공연 역시 아픔과 상처의 진실한 모습을 솔직하게 표현한다.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감정에 호소하거나 비극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을 경계하며 적절한 환기를 위한 극적 요소들을 배치한 점이 돋보였다. 이러한 연출은 작품의 주제 의식과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한층 더 명확히 했다. 


자살을 떼어놓고 풀어내기 어려운 실비아 플라스의 인생을 다루면서도 이 작품은 결국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허나 막연하고 무책임하게 삶을 권유하는 대신에, 고통과 아픔의 경험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발화하고 함께 나누는 것에 중점을 둔다. 


‘실비아, 살다’는 불편하고 고된 여행을 이어가며 ‘내가 예민하고, 내가 약한 것’이라며 스스로의 문제로 치부해버리고 마는 이들에게 말한다.


여행이 괴롭게 느껴지는 것도, 기차에서 내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너의 잘못이나 비겁함이 아니라고. 그러니 적어도 자신을 탓하지는 말라고.


우리가 삶의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것 자체가 때로는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비슷한 짐을 진 소녀들을 위한 가사 조각을 남기며 글을 마친다.

 

 

소녀는 세상이라는 기차여행을 하게 됐어

모든 게 무섭고 낯설었지

 

(…)

 

세상은 소녀에게 유리종을 씌웠어

넌 이상해. 틀렸어. 아름다워야 해.


소녀는 용감하게 계속 글을 써내려가

멋지게 근사하게 훌륭하게 받아들여지길

아니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길 원해

글이 소녀 자신이니까


(…)

 

너의 글이 누군가에게 목도리가 되어줄 거야

세상이 추운 소녀들은 봄을 더 빨리 맞이할 거야

 

 

 

송진희 컬쳐리스트.jpg

 

 

[송진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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