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인생은 편도행 기차여행 - 실비아,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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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가 아홉 번째 왕국이 종착역인 티켓을 가진 채 기차에 올라탄다. 소녀는 여행할 준비가 안 됐다며 혼자 기차 타기를 주저하지만, 부모님은 소녀를 기차에 태운다. 소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기차에 탑승하고, 옆자리의 묘령의 여인을 만난다. 그 여인은 목도리를 뜨고 있다. 이 목도리를 받을 아이가 춥지 않게, 아주아주 따뜻한 목도리를. 이 기차를 처음 타는 게 아닌 것 같은 여인은 소녀에게 물음을 건넨다.
“과거가 미래를 바꾼다고 생각하니?”
“네, 당연하죠.”
“그럼, 미래가 과거를 바꿀 수도 있을까?”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랬으면 좋겠어요.”
“나도.”
미래가 과거를 바꿀 수도 있기를 바라는 둘. 이 둘의 이름은 모두 실비아. 이 극은,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시대를 관통하는 여성서사
실비아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태어난 여성이었다. 그녀의 시인으로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 비평가에게 ‘아버지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성숙한 여류시인’이라고 평가받는다. ‘남류’시인은 없어도 ‘여류’시인은 있는 그런 시대에서, 실비아는 자신의 마음을 꼭 알아주는 빅토리아라는 시인을 만난다. 실비아는 빅토리아의 시에서 맹렬한 야수 같은 감정을 느끼고, 둘은 고충을 털어놓으며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시에 누구보다 열망이 있었던 실비아. 그러나 그녀는 테드와 결혼하며 자신의 시인 인생에 전념할 수 없게 된다. 가족 내에서 아내와 엄마의 역할에 치여 시를 쓸 시간이 없다. 그동안 시 쓰는 것에 전념하는 남편 테드는 승승장구하고, 실비아는 ‘시인’이 아닌 ‘유능한 시인의 아내’로만 불리게 된다. 자신의 처지를 명확히 직면하게 되는 출판사 직원과의 식사 자리에서, 그녀는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낀다. 무례함에 대한 수치심, 자신에 대한 비참함, 동시에 제대로 엄마와 아내의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자책감 때문에.
왜일까? 왜 화가 나야 하는 상황에서 자책감을 느낄까? 실비아의 어머니는 권위적인 아버지를 선택해 결혼했으며, 실비아에게 품행을 단정히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처럼은 절대 살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며 오히려 그 말에 반항이라도 하는 듯 방탕하게도 살았지만, 이는 외려 마음속 깊은 죄책감을 더 자극했다. 어릴 때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가장이 되어 자신은 희생하며 자식을 뒷바라지해준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그렇기에 그녀의 신념과 달랐던 엄마의 신념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실비아, 엄마를 증오해도 돼.”
이런 실비아에게 빅토리아는 엄마를 증오해도 된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실비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린다. 엄마를 증오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실비아는 이내 웃음과 눈물로 마음속 응어리를 해소한다. 이는 약 60여 년 전의 미국을 배경의 이야기지만, 지금 한국 사회의 이야기와 관통한다. ‘엄마’, ‘아내’, ‘딸’로서의 역할에서 주체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여성의 이야기. 여성이 아닌 하나의 직업과 능력으로 나아가려는 움직임. 시대를 관통하는 서사이다.
유리 덮개 <벨 자>와 유리천장
실비아가 한층 발돋움한 순간, 그녀는 충격적인 사실을 맞는다. 남편 테드의 외도. 그는 사실이 밝혀지자 외려 뻔뻔하게 집을 나가고, 그녀는 그 분노와 깨달음을 바탕으로 야성적인 작품을 써내려간다. 아버지의 죽음에 따라가기 위해 자살 시도를 했던 아홉 살의 과거를 극복함과 동시에, 아버지와 닮은 점이 많았던 테드를 극복하기 위해 둘을 죽이는 의미의 시 <아빠>를 쓴다. 웅장하고 엄숙한, 그러나 강렬한 넘버로 이어지는 이 시를 통해 실비아는 시인의 혼을 태운다.
시뿐만 아니라, 유리종 ‘벨 자’에 갇혀 사는 여자의 이야기인 소설 <벨 자>도 집필한다. 벨 자는 유리병을 뒤집은 모양의 유리 덮개이다. 투명한, 그러나 왜곡되어 보이는 유리종 안에 사는 소녀의 이야기. 안쪽에서도, 바깥쪽에서 왜곡하는 세상에 갇혀, 자기 자신이 끔찍해서 견딜 수 없는 소녀의 이야기. 세상은 언제든지 소녀의 인생에 벨 자를 씌울 준비를 하고 있고, 그 덮개가 씌워지면 소녀는 혼자가 된다. 소녀는 그 덮개를 스스로 열 수 있을까, 아니면 평생 갇혀 살까. 실비아는 아직 결말은 정해두지 않았다고 말한다.
유리 덮개인 ‘벨 자’를 보며 ‘유리천장’이 생각났다. 유리천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암묵적인 사회적 차별과 편견’을 뜻한다. 벨 자에 갇히면 세상은 왜곡되고, 세상에서 고립된다. 유리천장에 닿으면 부당하게 세상으로의 발걸음이 제한되고, 더 나아갈 수 없게 된다. 특히 유리천장이라는 단어가 여성에 대한 성차별 상황에서 많이 쓰인다는 것이 공교롭게 느껴졌다. 여성으로 차별받았던 그녀는 자신의 우울함이 더해져 세상 속 벨 자를 느꼈다. 현재 여성들은 세상의 유리천장을 깨기 위해 노력한다.
실비아, 살자
실비아는 세상에 비관하며, 세 번째 비상정차를 선택한다. 10년마다 해오던 관례처럼, 비상정차를. 그러나 그때 빅토리아가 등장한다. 정말 그 비상정차에서 다시 돌아오지 못했던 실비아인, 그녀가. 그녀는 과거를 바꾸기 위해 미래에서 왔지만, 그러나 그 고통의 삶과 나날도 모두 유의미했다고, 그 선택과 경험으로 쓴 자신의 시와 작품들까지도 사랑한다고. 그랬기에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고, 그랬기에 너는 더 살라고 말한다. 인생은 편도행 기차여행이니까, 비상정차를 하면 다시 돌아올 수 없으니까.
빅토리아가 실비아라는 것은 극 중에서 반복된 암시를 통해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세 번이나 비상정차를 택할 만큼 우울과 불행으로 점철된 삶을, 다시 살 기회가 생겨도 바꾸지 않은 선택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120분의 극을 보며 함께 슬프고 아팠던 관객들에게, 이렇게나 불행한 삶 속에서도 소중함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을 전해주니까. 죽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 죽음을 택한 사람이 살라고 하는 말은, 극 중이지만 깊은 위로를 준다. 자신을 구하는 건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 역시 나를 더 굳건히 만들어준다.
극은 수미상관을 이룬다. 극의 마지막, 아홉 번째 왕국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이제는 여인의 자리에 실비아가 앉아 있고, 과거 실비아의 자리에 어린아이가 앉아 있다. 실비아 역시 목도리를 뜨고 있고, 왜 뜨냐는 말에 같은 대답을 한다. 아이가 춥지 않게, 어느 소녀에게 선물할 거라고. 실제로 실비아가 오븐 속에 머리를 넣고 죽었음을 생각할 때, 목에 둘러주는 ‘목도리’라는 소재는 더 눈물짓게 한다. 그리고 첫 장면과 마찬가지로 소녀에게 꼭 종착역까지 가라고 실비아는 이야기하는데, 끝에 한 마디를 덧붙인다. 비로소 미래가 과거를 바꾼 그, 한 마디.
“같이 가자. 나도 종착역까지 가 볼 거거든.”
비상정차의 끈을 쥐고, 왕복이 아닌 편도행 인생에서
이 극을 다 본 뒤, 왜 종착역이 아홉 번째 왕국인지 궁금했다. 이는 실제 실비아의 책 <메리 벤투라와 아홉 번째 왕국>에서 차용된 것이었다. 인생은 왕복이 아닌 편도행, 그 사이에서 비상정차를 선택한다는 설정이 너무 좋아서 책도 찾아보았다. 그런데 뜻밖에, 책에서는 여인 실비아가 소녀 실비아에게 비상정차를 응원하고, 소녀 실비아는 비상정차를 선택하며 끝난다. 아마 그 책의 저자였던 실비아는 놓여진 인생에서 주체적 선택을 하는 것이 비상정차라고 여겼던 것이 아닐까. 그녀가 죽은 뒤, 그녀의 인생에서 비상정차는 죽음의 시도가 되었지만.
이 극에서 가장 좋았던 넘버는 ‘술 탄 물’이다. 굉장히 신나는 빠른 비트에, 배우들은 무대를 누비며 에너제틱한 안무와 다이나믹한 동선을 보여준다. 관객의 박수를 이끌 만큼 흥겨운 멜로디여서 좋은 것도 있지만, 더 좋았던 것은 뼈 있는 가사이다. 우리 모두 술 탄 물인 줄 모르고 물을 마셨다는 것이다. 근데 마셔보니 술이네? 술을 마시면 진상 부리는 건 당연한 것. 누가 술을 탄 줄 모르고 실수로 마실 수도 있고, 마시면 인생이 쓴 것도 당연하다. 이제 알게 되었으니, 그냥 한 번 토하고 끝내면 된다는 거다.
스스로 한심해서 견딜 수 없을 때가 있다. 나 자신이 보잘것없어서 봐 줄 수도 없는 마음. 이때까지의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그렇다고 지금부터 바꾸자기엔 지금의 나를 도저히 사랑할 수 없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마음. 극 중 실비아가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거 그냥, 술 탄 물 한 잔 마신 거라는 말이 정말 좋았다. 술 마시면 취하고, 좀 헤매지만, 이제 다시 안 마시면 된다. 토하고 리셋하자! 이 말이 정말 좋았다. 그 수많은 내면의 상처를, 인생에서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닌 산뜻한 훈장으로 남겨주는 말 같아서.
때로는 누군가의 고통을 아는 것만으로도 위로 될 때가 있다. 직장인들은 늘 품에 사직서를 안고 산다는 말처럼, 우리도 편도행 기차임을 알면서도 늘 비상정차의 끈을 한 손에 쥐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럼에도 종착역까지 가라고 말해주는 응원을 들었기에. 힘든 나에게 따뜻한 말을 해주고 싶을 때, <실비아, 살다>가 꽤 오래 생각날 것 같다.
[주영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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