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범위는 뭘까?
영상통화로 안부를 전하는 시대, 인스타 사진으로 누구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시대이다. 사진과 영상 속에 담긴 내 모습의 단편은 진정 나일까? 셀프카메라 속의 내 모습과 이미 찍힌 사진 속의 내 모습은 왜 다르게 느껴질까? 스마트폰은 이미 나의 신체 일부로 확장되었는데, 왜 내 모습을 가진 이미지는 그러지 못한 걸까?
우리는 때때로 미디어 속의 나에 관한 고민을 하곤 한다. 아마 이건 우리 세대만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개인의 모습이 거울처럼 기록된 모든 시대의 사람들 또한 이걸 고민했겠지. 그 중의 한 사람이 페터 바이벨, 이번에 내가 다녀온 전시의 작가이다.
페터 바이벨: 인지 행위로서의 예술
페터 바이벨의 작품들은 20세기 후반에서 21세기 초반을 거치며 정치·사회 현상에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냈으며 당시 예술에 대한 관습적 견해에 도전했다. 작가는 1960년대 미디어 발전 초창기란 조건 아래 언어이론, 수학과 철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확장했고 더 나아가 실험문학에서 퍼포먼스, 해체주의와 실험영화 등의 주제도 다루었다. 바이벨은 작업 초기부터 타자기, 음반, 마그네토폰, 사진, 영화, 비디오 등 기계장치에 기반한 예술의 전 영역을 실험하며 이미지와 실재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에 대한 질문을 던져왔다. 1966년을 기점으로 바이벨은 자신의 작품에 인터랙티브 요소를 포함시키며 더욱 적극적으로 관객과의 소통과 참여를 제안했다.
페터 바이벨은 예술과 과학 사이를 자유분방하게 넘나드는 작가로서 현재까지도 다양한 재료, 형식과 기술을 통해 자신의 문제 인식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작가는 인식에 대한 비판을 시작으로 언어와 미디어, 나아가 실재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는 고유한 작품 세계를 통해 ‘논리적 접근이 지닌 치유의 효과에 대한 믿음(페터 슬로터다이크)’을 기반으로 관객에게 세상을 단순화하여 해석하는 기존의 모델들을 거부하고 새로운 형식을 제안한다. 작가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예술은 인식의 과정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공식 홈페이지)
이미지를 뛰어넘는 '가능한'
작가는 막 텔레비전이 상용화되던 시기의 사람이고, 그가 주로 우리에게 묻고자 하는 것은 보이는 이미지와 실재하는 우리 간의 차이다. 작가는 실재와 이미지의 모호해진 구분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작품을 만든다. 그중 하나가 <가능한>이다.
관람객이 영사기와 스크린 사이를 지나갈 수 있게끔 넓게 설계된 작품은 우리가 그 사이를 지나는 순간 스크린에 투영된 ‘가능한’이라는 글자가 사라지는 것이 아닌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보게 한다. 사람들이 환영이라고 믿었던 '가능하다'는 말이 사실은 실재하는 가능성임을 관람객들에게 전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투사된 이미지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을 실재하는 것임을 깨달을 때, 나는 기묘하게도 지지받은 느낌을 받았다.
규정하고 박제하는 환영을 걷어내기
바이벨이 질문하는 존재란 단지 이미지 속에 인쇄 혹은 박제된 자신만은 아니다. 이미지는 단지 또 하나의 구속 수단일 뿐, 우리를 매어둔 환경 또한 우리를 박제하고 한정 짓기 때문이다. 그는 영상이 가지는 특징을 활용하여 우리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가장 직관적인 이미지가 전시의 초입, 뚱뚱한 구형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는 영상들이다. 텔레비전 안에서는 시대상을 알 수 있는 흑백 영상들이 반복 재생된다. 1970년대에 상을 탔다던 단편 영화, 시가를 피우며 뉴스 헤드라인을 읊는 남성 아나운서……. 영화에서는 텔레비전을 보느라 정신없는 부모가 아이들을 화면 밖으로 쫓아내며 잠을 재운다. 아이들이 잘 자라고 인사하고 문밖으로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부모는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아나운서의 시가는 이내 영상을 희뿌옇게 물들여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화면을 흐린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브뤼셀과 뮌헨의 날씨를 안내한다.
그리고, 바이벨의 영상이 등장한다.
그는 본인이 현재 오스트리아 관세 경계선에 있다고 설명하며, 본인이 있는 곳은 비관세 구역이나 그의 오른편은 관세가 매겨지는 오스트리아의 정식 영토이므로 이 영상에 반절의 관세를 매기어야 한다고 말한다. 영상을 보는 시청자 또한 반절은 오스트리아인 셈이니 시청자에게도 페널티가 부과된다며 영상의 반절을 까맣게 가린다. 그가 이 영상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경계의 무용함과 거짓됨이다.
그는 “왜 누구나 자기 나라의 대사가 되지 못하는가?”라고 묻는다. 왜 누구나 한 국가 속의 독자적인 국가가 되면 안 되는가? 왜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른 법에 따라 평가를 받는 것인가? 왜 우리는 국적이라는 가짜 속성에 의해 평가를 받는 것인가? 바이벨은 국적이 가짜 속성, 즉 환영이라고 말한다. 그가 영상 속에서 오스트리아의 경계 밖에 있다는 사실은 가짜 속성이고, 그곳에서 하는 관세 신고는 가짜 신고이다. 관세의 당위성에 관한 질문이다. 왜 모든 사람은 관세가 없는 이 비관세 구역에 살지 못하는가? 왜 모든 사람이 그런 비용 없이 살면 안 되는가? 그는 이내 오스트리아 관세청에서 변명과 함께 방송 중단을 요구했다며 영상을 종료한다.
환영 속 데이터가 된 우리
바이벨의 작품은 박제된 인간을 다루는 한편, 데이터가 된 인간을 표현하기도 한다. 여태까진 우리가 담긴 영상이 흘렀다면, 이제는 우리가 미디어 안에서 흐르게 된 셈이다. 베른트 린터만과 함께 작업한 작품인 YOU:R:CODE는 알파벳과 정보값으로 분류된 우리를 당연스레 여기고 나아가는 사회, 거울->카메라 영상->알파벳 분류와 얼굴 인식->정보값 분류로 진행되는 디지털 화면의 배치 끝에 우리는 코드, 그리고 디지털 데이터로 쪼개어진다. 영상 속에 박제되고, 편집과 촬영으로 왜곡되며, 이제 곧 데이터가 될 우리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바쁘게 돌아가는 시대, 쏟아지는 온갖 미디어 정보 속에 존재하는 나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