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때 그곳에서 나눈, 지금 여기, 우리의 기억 [시각예술]

글 입력 2023.02.19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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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억은 이러한데, 너의 기억은 어떠한가? 

 

‘첫사랑’, 기억에서 왜곡하고 또 부풀리는 대표 주제 아닐까 싶다. 박혜수는 구로 공단을 비롯해 공업 단지의 노동자 21명을 인터뷰 대상으로 삼아 각자의 첫사랑에 관한 아주 사적인 기억을 묻는다. 바빠서, 먹고 살기 힘들었던 그 시절을 지내느라 그 사랑과 이어지지 못했다고 말하는 대목에선 다들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겐 후회로 남았던 것 같다. 어떤 인터뷰이의 말에 특히 공감이 갔는데, 바로 ‘첫사랑과 만나고 싶지 않다’는 것. 첫사랑은 마음대로 꾸며버린 기억으로 남겨두는 게 제일 아름다운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크기변환]박혜수 1.jpg

 

 

박혜수의 <기쁜 우리 젊은 날>(2022)은 25분의 영상에 인터뷰이의 모습과 회화 제작 과정을 병치한다. 회화는 함미나가 인터뷰 내용만 듣고 첫사랑에 관한 기억을 새롭게 구현한 것이다. 그가 당시 그렸던 그림은 영상을 보러 가는 길목에 걸려있다. 그런데 저 멀리 위쪽이나, 구멍을 뚫은 가벽에 설치하는 등 그림을 특이하게 전시해서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기웃거리면서 엿보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박혜수는 왜 ‘공장’에 찾아가 기억 저편에 남긴 것을 끄집어냈을까. 영상을 보고 있으면 짐작할 수 있는데, 무표정으로 장시간 공장에서 근무하는 이들은 젊을 적 부끄럽고, 뜨거웠고, 아련한 기억을 구술로 풀어내면서 얼굴에 생기가 돋고 목소리의 높낮이가 수시로 변한다. 그렇게 카메라로, 그림으로 기록한 누군가의 추억은 털어놓는 순간 보는 이로 하여금 그때 그 온기를 불러낸다. 

 

《나너의 기억》은 세 개의 소주제인 ‘나너의 기억’, ‘지금, 여기’, ‘그때, 그곳’으로 전개한다. 전시장 입구에 앤디 워홀의 <수면>(1963)으로 시작하는 ‘나너의 기억’ 은 자연계의 정보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 기억의 불완전함을 상기하고, 더욱이 기억의 주체에 따라 다르게 분류되고 저장되기에 달라지는 경험, 정체성, 생물학적 특징에 대한 작품들을 다룬다. 두 번째 소주제인 ‘지금, 여기’ 에서는 각국의 작업을 통해 현재의 우리는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고,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우리에게 어떻게 발현되는지 고민해야 함을 일러준다. 마지막 소주제 ‘그때, 그곳’ 은 전시를 감상하면서 가장 오래 머물렀고, 이 글에서 주목하는 소주제이다. 앞서 박혜수가 공업단지 노동자들을 첫사랑에 관해 인터뷰한 작업과, 이어서 논할 송주원의 퍼포먼스 영상이 여기에 속한다. 

 

 

[크기변환]송주원.jpg


 

세 명의 남자 무용수들은 남의 머리카락을 잡고 머리를 들이민다든지, 얼굴을 갖다 대면서 서로 절대 떨어지지 않고 복도를 누빈다. 방 안에 두 명의 여성 무용수들은 시선을 거의 맞추지 않고 느린 몸짓을 이어간다. 기묘한 몸짓들이 3개의 화면에서 벌어지는 송주원의 <뾰루지, 물집, 사마귀, 점>(2021)은 국군광주병원 옛터에서 벌어지는 7분가량의 퍼포먼스 영상이다. 이곳은 1980년 5.18 광주 민주항쟁 당시 피해를 입은 시민들이 치료를 받던 곳이며, 아주 어린 나이였던 작가에게 이 사건은 자료로 습득한 간접적인 경험이다. 대부분의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을 살아가는 어린 사람들이나 먼 지역 사람들에게는 뾰루지, 물집, 사마귀, 점처럼 표면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기억들이다. 지우려면 지울 수 있는, 하지만 흔적이 남을 수도 있는 곳에 찾아가서 어딘가로 파고들 것처럼 움직이고 기어이 기록하는 것이 송주원의 기억하는 방식이다.

 

팬데믹이 닥친 이후 실시간으로 모든 상황에 대한 수치가 집계되고 데이터화되면서 어느샌가 더 빠르게, 정확하게, 앞으로 바이러스가 종식될 날만을 기다리면서 나아갔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경험과 성찰로부터 작업을 만들어내는 이들에게 그런 현실은 벅차다. 그리고 어제의 정보와 삶의 방식이 오늘은 용인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서 삶의 모습을 스스로 반추하고, 사고하는 법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 혼란과 격동의 시대야말로 우리가 스스로를 잠시 멈춰 세우고 무엇을 기억할 것이냐고 자문해야 하는 시점이다. 그렇게 잠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쉼이 되어주고 위로가 되는 《나너의 기억》은 우리 잠시만 멈추고 숨을 고르자, 지난 우리의 날들을 되짚어보자며 ‘멈춤(pause)’을 눌러준 전시였다.

 

 

[지소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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