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이다' 없는 복수극의 필요성 [영화]

영화 <성냥공장 소녀> (1990)
글 입력 2023.02.14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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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다의 세상


 

'사이다 서사'가 유행하는 세상이다. 아니, 유행이라고 하는 게 맞을까 싶을 만큼 이미 당연시되어버린 공식 같기도 하다. 많은 시청자가 열광한 드라마 <빈센조>, <재벌집 막내아들>, <더 글로리> 모두 복수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이다.

 

시청자들이 <재벌집 막내아들>의 결말이 공개되고 그렇게나 크게 분노했던 이유는 진도준이라는 인물의 복수가 끝내 물거품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더 글로리> 열풍과 넷플릭스의 시즌제 공개와 관련된 비판 역시 이런 시청자들의 입맛과 관련이 있다. 주인공 문동은이라는 캐릭터의 동력은 복수심이다. 극 중 문동은의 삶은 팍팍하다 싶을 만큼 아무것도 없다. 학창 시절 폭력에 대한 아픔과 복수를 위한 오랜 계획, 복수의 수단 중 하나인 직업과 바둑뿐이다.

 

살아온 인생의 반이 넘는 시간을 복수만을 위해 바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프고 절망적인 일인가. 그는 공장에서 밤을 새워 공부하고, 바둑을 배우며 여러 승부에서 승리하고, 교사가 되어 순수한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간 동안 박연진에 대한 생각을 지워나갈 수 없었다. 폭력의 가해자들은 문동은을 잊고 자기 삶에 새로운 것들을 더해가며 살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렇기에 문동은이라는 인물의 삶은 비극적이지만, 많은 사람이 그의 복수가 넷플릭스가 <더 글로리> 시즌2를 공개하지 않은 이 시점에선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에 분노한다. 그가 성장하고 직업을 가지며 과거의 피해와 기억에서 허우적대는 동안에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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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최고의 용서입니다


 

인터넷에서 '복수는 최고의 용서입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린 건물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원래는 한 교회에 걸려있던 현수막으로, 원본 사진에는 '용서는 최고의 복수입니다'라는 올바른 문구로 적혀있던 것인데 누군가 단어의 순서를 바꾸어 합성했더니 여러 SNS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 같다.

 

단어의 순서만 바꾸었는데 더 사랑을 받는 문구라니. 그건 아마 작은 차이로도 문장의 의미가 확연히 달라지기 때문이기도, 그리고 바뀐 문장이어야만 더 자극적인 그림이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용서를 통한 복수'는 상대방에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그야말로 '정신 승리'에 불과하지만, '복수를 통한 용서'는 분명 상대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니까.

 

게다가 '용서'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내가 옳았고, 비록 폭력을 통한 응징이었으나 정의를 구현한 것이다'라는 미묘한 우월감도 있다. 원하는 감정적 해소를 이루면서도 '내가 틀린 것이 아니다'라는 묘한 안도감이 복수의 핵심이다.

 

한국 사람들이 복수와 복수극에 환장하는 이유는 역시 복수가 최고의 용서, 모든 '고구마'에 대한 만병통치약이기 때문일 것이다. 태초에 사이다가 있기 전에 고구마가 먼저 있었다.

 

고구마는 사이다와는 반대되는 말로, 쉽게 말하면 '나를 화나게 하는 모든 것들'이다. 그렇지만 내가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일들. 나를 눈치 보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 계층 갈등, 남보다 많지 않은 내 월급, 타임코드 없는 유튜브 동영상, 세 줄 요약 없는 긴 커뮤니티 게시글, 법, 언론, 사회 등.

 

길고 긴 노력 끝에도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걸 깨달은 사람들은 끝내 나 대신 누군가가 해주는 사적인 응징으로 내 '기분'을 풀어주는 데 만족하기로 했다. 그래서 지하철에서 고함 치는 사람에게는 맞서 고함 치는 또 다른 아저씨를, SNS 바이럴 게시글 속 고부 갈등 이야기에는 속 시원한(그렇지만 어떨 땐 이래도 되나 싶은) 자극적인 일침을, 공공장소에서 말 안 듣는 어린아이들에게는 '참교육'과 '노키즈존'을 선사하고 '사이다'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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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다른 복수 이야기


 

어떻게 보면 <성냥공장 소녀> 역시 복수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복수의 끝이 개운하지 않다. 그건 이 영화가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전형적인 복수극과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성냥공장 소녀>가 다른 복수극과 다른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복수의 동기가 되는 '고구마'가 자극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주인공 이리스가 복수를 다짐하는 계기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이리스의 부모가 이리스가 벌어오는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그의 삶을 통제하는 것, 다른 하나는 이리스가 파티에서 만난 남성이 그를 하룻밤 상대로만 대하고 외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리스가 겪는 폭력은 분명 존재하긴 하지만 절대 멋진 복수극을 기대하는 관객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리스가 벌어들인 돈으로 몰래 원하는 옷을 샀을 때 이리스의 아버지가 그의 뺨을 때리는 장면에서 그의 손찌검은 헛웃음이 나올 만큼 어설프고 약한 손짓이다. 여기에 덤덤한 이리스의 태도까지 더해지면 관객은 과연 이리스가 복수를 하고 싶기는 한 걸까 의문을 갖게 된다.

 

<성냥공장 소녀>의 또다른 차별점은 복수의 결과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든 모욕과 수치와 폭력을 견디고 견디던 주인공이 복수하는 것, 그래서 상대방이 (주로 물리적인) 피해를 보고 고통받는 모습, 그를 통해 기쁨과 그 뒤에 찾아오는 허무함을 느끼는 주인공에게 이입하는 것이 관객들이 복수극에 원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이리스가 복수한 뒤의 일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 관객은 이리스와 같은 공간에 존재하며, 이리스가 저지른 일의 결과를 볼 수 없다. 그저 마지막에 덤덤히 연행되는 이리스의 모습을 통해 복수의 대상에게 최소한 무슨 일이든 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복수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이 이야기가 답답하고 퍼석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게다가 영화 속 이리스의 생활은 우습기까지 한데, 그건 이리스의 삶이 주체적이지 못하다가 애매하게 복수를 결심하고, 결국 자신이 처벌받는 결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허무한 복수극이 의미를 갖는 이유가 있다. 허무한 복수의 끝에는 삶의 의미에 대한 성찰이 있기 때문이다. <성냥공장 소녀>를 보고 나면 복수 그 자체가 아니라 이리스의 삶과 그가 복수를 결심한 계기에 대해 생각해보기 위해 영화의 처음, 묵묵히 기계적으로 공장 일을 하던 그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기에 이 영화의 의도가 있다. 기계의 일부가 되어 돌아가는 부품, 일을 해서 돈을 벌지만, 자신의 마음대로 돈을 쓰지 못하는 이리스, 가족에게마저 버림받고 돌아갈 곳이 없어 범죄를 저지르고 수감될 이리스의 운명은 사적인 복수에는 구원이 없다는 냉정한 메시지가 존재한다.

 

영화의 러닝타임은 1시간 9분. 짧은 시간이지만 곱씹을수록 깊은 의미를 갖는 작품이다.

 

 

[류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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