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고전과 세련됨, 그 사이 완벽한 풍자 - 연극 '스카팽'

글 입력 2022.12.30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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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좋아한다'라고 말하기에는 민망한 순간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이를테면, 고전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니지만, 몰리에르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본다든지, 뮤지컬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니지만, 중소극장은 살면서 딱 두 번 가봤다든지 말이다.

 

그러나 이런 무지에 대한 인지는 곧 새롭게 알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스카팽>을 보는 것은 나에게 그런 새로움을 향한 기회로 다가왔다. 몰리에르도 처음, 국립극단도 처음, 명동예술극장도 처음, 연극도 처음이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12월 22일 저녁, 나는 설렘 반 긴장 반으로 관객석에 앉으며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카팽은 나에게 '고통' 그 자체였다. 재미있다. 너무 즐겁다.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치고 싶다. 모든 장면이 끝날 때마다 환호성을 지르고 싶다. 그 끓어오르는 흥과 즐거움을 극이 끝날 때까지 삼켜내고 중간중간 짧은 웃음을 내뱉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스카팽으로 접한 나의 여러 '처음'들은 행복감에 젖어 나를 무겁게 적시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게 끝난 후, 극장에서 나오며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이 마성의 극은 도대체 무엇이기에 나를 이토록 행복하게 만든단 말인가.


 

 

너무도 매력적인 마성의 캐릭터들


 

[국립극단] 스카팽(2022) 공연사진19.jpg

공연 사진: 국립극단 제공

 

 

어릴 적부터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즐겨보고, 캐릭터 디자인에 유독 집중했었던 내가 스카팽을 보며 가장 행복함을 느꼈던 부분 중 하나는 각기 다른 매력적인 개성을 가진 캐릭터들이었다. 고전적인 분위기를 살리면서도 현대적이고 세련된 스타일을 가진 11명의 캐릭터 중 몇몇을 자세히 뜯어보고자 한다.


몰리에르는 이 극의 저자이자 무대와 객석을 연결 짓는 소통 창구 중 하나다. <스카팽>에서 몰리에르는 단순히 글만 쓰는 작가가 아니다. 극을 진행하는 캐릭터들과 직간접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때로는 직접 극으로 들어가서 부족한 캐릭터를 보완하거나 사회자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극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중간중간 끼어들며 극 속 캐릭터들에게 환호성이나 야유를 보낸다.

 

이 몰리에르의 초상화를 살펴보면 갈색의 곱슬거리는 장발, 얇고 긴 콧수염, 그리고 붉은 옷이 인상적이다. 초상화만 보면 인자하고 현명한 측면이 특히 눈에 들어올 수 있다. 하지만, 실제 몰리에르는 '비극만이 예술이라 평가받던 17세기, 풍자와 위트가 가득 찬 공연으로 연극사를 바꾸고 사회를 뒤흔들며 프랑스 ‘희극’의 출발점이라 평가받은 최고의 희극 배우이자 극작가'다.


<스카팽> 속 몰리에르 또한 작가로서의 근엄함이나 진중함보다는 광대적인 측면이 더욱 부각되어 있다. 그는 무대 밖에서 작가로서 극을 관객들과 함께 바라보다가 이따금 <캐릭터>로서 무대 위로 오른다. 이때에는 붉은 할리퀸 가면을 쓰고 나오는데, 그럴 때면 광대적인 측면은 더욱더 부각된다. 각종 마임과 말솜씨로 관객들에게 말을 거는 그는 유쾌하지만, 그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그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무게를 담고 있다. 유쾌하다. 하지만 절대 우습지는 않다. 그의 강렬함은 관객석을 압도하고 있지만, 관객들의 숨통을 조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과장된 웃음 속 현실을 속삭이며 관객들도 모르게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옥따브는 패셔니스타 사랑꾼이다. 과거에도, 현대에도 파격적이었을 칼단발에 눈썹을 아슬아슬하게 닿는 처피뱅. 그의 검은 흑발은 테가 굵고 짙은 검은 안경테와 함께 어우러져 더욱 독보적이다. 오트밀 색 정장 자켓과 바지로 깔끔함을 더하고, 흑발과 채도 낮은 오트밀 색에 자칫 밋밋해 보일 수 있는 패션에 화려한 하늘색 와이셔츠로 포인트를 줬다.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강한 척하지만, 뒤돌면 단발의 청순한 검은 머리를 흔들거리며 얇은 목소리와 빠르고 투정 어린 어투로 자신의 고민에 대해 하인에게 어리광 부리는 귀엽고도 매력적인 캐릭터다.


실베스트르는 옥따브의 하인이다. 폭탄이라도 맞은 듯한 부스스하고 윤기 없는 머리카락, 언제든 울상을 짓고 있는 눈썹. 고전적인 느낌이 강한 패턴의 무늬에 와인색이나 겨자색 등 진중한 이미지가 짙은 딥 톤의 옷만 보면 굉장히 무게감 있거나 무서운 캐릭터일 것만 같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하인은 주인을 닮는다더니, 어째서인지 실베스트르는 옥따브보다도 더 얇고 투정 짙은 목소리로 옥따브보다도 더 칭얼거린다. 반전 매력 속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다 하는, 순진하고도 착한 실베스트르.


레앙드르는 옥따브의 친구이자 옥따브에게 절대 지지 않는 사랑꾼이다. 짙은 와인색의 핏이 딱 맞는 (어쩌면 조금 꽈악 끼는…) 정장 바지와 파마기가 있는 오대오 장발이 특히 매력적인 그는, 사랑꾼인 만큼 애교쟁이고, 정장 바지가 딱 맞는 만큼 언제나 발끝의 엣지를 살리는 섬세하고도 캐릭터다. 마르고 길쭉한 몸이 그의 과장된 몸짓을 더욱 살려주고 있었으며, 그의 손에는 하모니카가 떠나지 않아 모든 그의 대사에서는 감미로운 하모니카 소리가 시시각각 함께 울려 퍼지고 있었다.

 


[국립극단] 스카팽(2022) 공연사진11.jpg


 

옥따브의 연인 이아상뜨와 레앙드르의 연인 제르비네뜨! 그들의 상반된 매력은 바다보다 더 깊다. 섬세하고 감정이 풍부한 이아상뜨는 '사랑스러움' 그 자체다. 채도 높은 주황색 겉옷과 폭이 넓은 하늘색 패턴 원피스. 리본을 사용해 양갈래로 묶은 갈색 긴 곱슬머리. 사랑하는 옥따브에게 다른 결혼 상대가 나타났다는 말에 아름다운 목소리로 걱정하고 그의 품에 안기는 귀여운 연인이다.

 

그런 이아상뜨와는 정반대로 정열적이고 터프하고 통쾌한 매력이 있는 제르비네뜨! 깔끔하고 사랑스럽게 입은 이아상뜨와는 정말 정반대다.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집시답게 머리에는 붉은 계열의 낡은 천들로 검은 머리카락을 잔뜩 꾸미고 있었고, 난해한 패턴들이 그려진 갈색 원피스와 붉은 스타킹까지! 특히나, 베이비 페이스에 키가 작은 편에 속하는 배우가 이런 정열적인 캐릭터를 맡아 그 사랑스러움과 매력이 배가 되고 있었다. 그녀의 시그니처 웃음소리인 "홀롤롤로"는 극이 끝나도 머릿속을 맴돈다.


옥따브의 엄마이자 기업을 운영 중인 아르강뜨는 아마 지하철을 타다가 창문 밖으로 스쳐봐도 옥따브의 어머니라는 것을 단숨에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입고 있는 채도가 굉장히 높은, 비비드 톤의 정장에서 그녀의 호락호락하지 않은 성정이 드러난다. '딸기콘'처럼 위로 치켜올린 머리카락은 그녀의 프라이드를 나타내는 듯하다. 옥타브처럼 테가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지만 붉게 반짝이는 삼각테는 그녀의 깐깐함이 더욱 드러난다. 품에 소중하다는 듯이 안고 있는 강아지는 어째서인지 비슷한 주인을 두고 있고 이름이 '브라우니'였던 어느 허스키 인형이 생각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구세주인가, 사기꾼인가, 알 길이 없는 레앙드르의 하인, 스카팽이다. 벌룬 소매의 셔츠에 갈색 조끼를 껴입고, 파란색 빵모자를 쓰고 다니며 등장인물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그의 모습은 어쩐지 묘하게 셜록 홈즈가 떠오르기도 한다. 짙은 수염과 선이 굵은 그의 얼굴은 언제나 진중한 듯 보이지만, 어쩌면 진중함보다는 '잔꾀'에 더욱 어울리는 캐릭터다. 상황에 따라 능글맞게 위기를 모면하거나 익살스럽게 슬픈 표정을 연기하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판을 짜는 캐릭터다.

 

 


현대사회를 향한 세련된 풍자, <스카팽>


 

[국립극단] 스카팽(2022) 공연사진16.jpg

 

 

이들이 나오는 스카팽의 큰 줄거리는 이렇다. 아르강뜨와 제롱뜨 (레앙드르의 아버지)가 함께 사업을 하러 나가 있는 동안, 옥따브는 부모님 몰래 신분도 모르는 이아상뜨와 결혼해버리고, 레앙드르는 천한 집시와 사랑에 빠져버린다. 하지만 곧 아르강뜨와 제롱뜨가 돌아온다는 소식과 함께, 옥따브는 새로운 여자와 결혼하게 될 위기에, 레앙드르는 연인 제르비네뜨와 헤어질 위기에 처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그들은 결국 잔꾀의 달인 스카팽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어쩌면 매우 가볍고 즐거워 보이는 희극의 줄거리다. 하지만 이런 줄거리 속에 담겨 있는 풍자는 실로 무겁다. <스카팽>을 보며 서로의 이득만을 위해 자녀들의 의사는 상관없이 결혼을 진행하려 하고, 사실을 알거나 스카팽에게 속아 당장 아들을 파혼시키겠다고 이야기하거나 아들이 죽을 위기에 처해있다는 소리를 들어도 그 와중에 자식의 안위나 의견보다는 돈의 아까움을 더욱 외치는 아르강뜨와 제롱뜨의 추한 모습을 보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무서운 이야기를 해봐!'라는 스카팽의 대사에 '후쿠시마 농수산물'을 이야기하는 실베스트르, 출산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때에는 몰리에르가 직접 무대 위로 올라와 '결혼하면 애 낳으라 하고, 애 낳으면 둘 낳으라 하고, 둘 낳으니 셋 낳으면 돈을 준다고 한다! 자식을 키우는데 들어가는 돈이 얼마인 줄 알기나 해? 그놈의 돈 돈 돈! 그러면서 애만 낳으라고 하고 있으니!'라는 뉘앙스의 대사를 내뱉으며 돈으로 저출산을 해결하려는 사회를 향해 비난하며 관객의 환호성을 불러일으킨다.


<스카팽>은 돌아올 때마다 그 시기의 이슈들을 극 사이사이에 넣으며 관객들의 즐거움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조금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사회에서는 잊을 수 없는 사건으로 회자하고 있는 "땅콩 회항 사건"부터, 놀란 이모티콘으로 많이 사용되었던 상상도 못 한 정체(수도꼭지 리액션)도 극 안에 포함되어있다. 반가운 마음에 깔깔 웃다 보면, 극에서 풍자되는 불편한 진실에 가슴이 무겁다가도 불쾌하지 않게 극을 이어볼 수 있었다.


극을 진행하며 두 개의 반복되는 대사들은 관객들의 머릿속에서 깊이 자리 잡게 된다. 레앙드르가 납치되었다는 스카팽의 거짓말에 속은 제롱뜨가 외치는 애절한 비탄 '도대체 군함에 왜 탔어.', 그리고 몰리에르가 작가로서 존재하다가 극에 갑작스럽게 끼어들고, 그로 인해 흐름이 잠깐 멈출 때마다 머쓱하게 이야기하는 '연결해'다. 이 두 대사는 단순하지만 유쾌하고 강렬하게 내뱉어지며 관객들의 머릿속에서 <스카팽>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극의 흥과 유쾌함을 극대화한다.


 

 

다채로운 무대와 연출들


 

[국립극단] 스카팽(2022) 공연사진17 (1).jpg

 

 

대극장을 위주로 다니는 나로서는 무대가 얼마나 화려한가도 나의 만족도를 기록하는 중요한 평가 기준 중 하나다. 하지만, 중소극장에서는 그 화려한 무대를 보기가 쉽지 않다. 변경 없는 소품과 무대에서 2시간을 다 이끌어간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무척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스카팽은, 화려한 무대가 없어도 무대가 다채로울 수 있다고 느낄 수 있도록 해준 공연 중 하나다.


창의적인 조명 연출부터, 배우들은 즉석에서 연주되는 각종 효과음에 맞춰 마임을 하거나 행동한다. 그 현장에서의 효과음에 맞춰 몸짓 언어를 사용하며 과장되게 연극적인 연기하는 것을 보며 '이것이 바로 공연예술을 보는 매력이 아닐까'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적절한 상황에 맞춰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더하는 탭댄스부터 탱고, 노래, 심지어는 랩까지…. 이 모든 것들이 단 두 시간 만에 무대 위에서 이뤄지는 것을 보며, 단순히 대사만 할 것이라는 연극에 대한 나의 편견이 산산조각이 난 것과 동시에 배우들의 무수한 노력이 눈앞에서 그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스카팽> 속 무대 위의 배우들은 대부분 액터뮤지션이다. 액터 뮤지션이란,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며 악기도 다루는 배우들을 지칭하는 단어다. <스카팽>의 배우들은 연기를 하면서도 가끔 각자 하나씩 악기는 맡고 연주하고 있었다. 배우들의 악기 연주를 포함하여 이 수많은 구성이 한 곳에 모이며 눈과 귀가 더욱 풍요로워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아쉬웠던 점



어쩌면 나의 나쁜 버릇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는 모든 문화예술을 즐기며 장점만을 즐기지 않고, 단점도 집중해서 찾아낸다. 마치 시어머니처럼 꼼꼼히 단점들을 살펴본 뒤에'다 좋긴 한데'라고 운을 띄우며 단점들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스카팽>에서는 도저히 단점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굳이, 정말 굳이 이야기하자면 땅콩 회항 사건도 벌써 꽤 오래된 이야기라는 것일까….

 


[국립극단] 스카팽(2022) 공연사진18.jpg

 

 

뮤지컬과 연극은 집에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두 번째 표를 잡는다고들 한다. 나는 극 관람을 끝내고 나오자마자 명동극장 앞에서 우두커니 서서 남은 표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첫 극 관람을 너무 늦게 한 탓에 이미 새로운 표를 구하기란 어려웠고, 아쉬운 마음에 집으로 돌아와 국립극단 사이트에 있는 온라인 극장에서 영상을 구매해 봤다.


이런 좋은 극을 올려준 국립극단에 감사한 마음뿐이며, 그들의 앞으로가 굉장히 기대된다.

 

 

[김혜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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