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결국 시시콜콜한 수다가 우리를 구원할 거야 [도서/문학]

책을 읽는 것은 '나와 비슷한 취약함을 가진 동지'를 발견하기 위해서였다
글 입력 2022.12.11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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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내가 초라하게 느껴지는 날은 책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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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나이가 30살을 향해가고 있다. 매년 한 살씩 늘어가는 나이에 비례하여 능숙해진 것이 있다면, '내 불안과 불행을 타인에게 들키지 않으면서 처리하는 법’이다.


왜 들키지 않아야 하냐고? '슬픔은 나눌수록 반이 된다'는데 이 말은 대체로 거짓이었던 개인적인 기억 탓이다. 이 문장에서 찾은 오류는 2가지가 있었다.


1) ‘나눌수록’의 오류 : 사람들은 내 슬픔이나 불행에 관심이 없다. 애초에 ‘나눌 사람’조차 딱히 없다는 거다.


2) ‘반이 된다’의 오류 : 만약 누군가에게 내 슬픔을 나눈다고 해도, 반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유난히 섬세하고 민감한 사람, 경험으로도 아직 깨치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 나아가 고착화된 내면적 결핍이 있는 사람 취급 정도는 받을 수 있었다. 되려 부정적인 이미지만 얻어 가는 꼴이었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은 그렇지 않은 현실을 부정하고픈 하얀 거짓말인지도 모른다. 내가 슬픔을 나누면 주변까지 검게 물들기 일쑤였고, 불청객이 되어 민폐를 끼친 것 같은 죄의식까지 덤으로 얹어지곤 했으니까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슬픔을 들키지 않고 혼자 처리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인적인 불행과 불안을 떠벌리지 않고, 조용하게 해결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모색한 방법 중 하나는 '책  읽기'였다. 나약한 내 쿠크다스 멘탈 덕에 별안간 다독을 하게 된 셈이었다.


그렇게 '책 읽기'는 유독 내가 초라하게 느껴지는 날의 루틴으로 자리 잡았다. 20대 초반부터 시작한 이 루틴은 20대 후반이 된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여전히 나는 책에서 편안함을 느끼며, 틈이 나면 서점을 들른다.


왜 난 유독 내가 엉망진창인 것 같은 외로운 날 서점을 서성이는 걸까. 내가 책에서 얻고 싶었던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책의 위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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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매슈 아널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예술은 삶의 가장 깊은 긴장과 불안에 ‘해법’을 제공하는 매체다."


그렇다. 책은 때에 따라 '해법'을 주기도 한다. 작가는 문제투성이인 인간들을 때로는 사랑스럽게, 때로는 익살스럽게, 때로는 애처롭게 재해석하여 묘사한다. 이런 작가의 시도로 독자들은 자신의 불안과 결함 또한 ‘다양하고 개방적인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해석이 달라지면 해법도 달라진다는 말이 있듯, 독자 개개인은 각자의 '위트 있는 해석'을 통해 기존과는 달라진 ‘위트 있는 해법’을 도출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그들은 궁극적으로 긴장과 불안을 잘 해결하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예술의 가치는 정말 위의 문장처럼 ‘해법 제공'에 있는 것일까?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어떤 작품을 골라 읽을 때부터 ‘해답 또는 진리 따위를 찾는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을뿐더러, 만약 몇 권의 책이 우리에게 그런 숭고한 삶의 비밀을 알려준다면 그것은 위선이고 교만일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책을 통해 찾고 싶었던 것은 다름아닌 '나와 비슷한 취약함을 가진 동지'였다. 책은 고요하게 타인의 일상으로 나를 끌어들여 그들의 속 시끄러웠던 일생까지 기어코 비춘다. 일면식도 없던 동떨어진 타인의 서사를 듣다 보면 나는 발견하게 된다.


각자의 문제들로 스스로 발등을 찍기도 하고, 그것을 수습하기도 하며 살아가는 나와 비슷한 타인을. 이깟 위기쯤 이젠 가뿐히 대처할 수 있다는 듯, 웃음 지어 보일 것 같던 나이 지긋한 중년도, ‘찌질’이란 단어는 사전에 없을 것 같던 세련된 누군가도, 마냥 커 보이기만 했던 엄마도 사실은 ‘그들만의 엉망진창’으로 골몰하고 있다는 것을.


우습게도 ‘취약함에 의해 맺어진 동맹’이야말로, 어떤 해법이나 진리보다 나를 무한한 고립과 소외의 굴레에서 비로소 자유롭게 만들 수 있었다.


책은 오만하지 않게 나를 위로한다. 책은 결핍을 지닌 존재를 문제로 규정하지 않는다. 책은 함부로 동정하거나 조언하지 않는다. 책은 취약한 인간을 업신여겨 발언할 기회를 빼앗지 않는다. 다만, 책은 솔직하게 자신의 밑바닥을 먼저 내보이는 방식으로 나에게 우연한 위로를 전할 뿐이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되지 않았던 현실에서, 고요하고 솔직한 ‘책의 위로’는 내가 유독 힘들었던 날 안심하고 기댈 수 있던 최선의 지혜로운 위로였다.

 

 


결국 시시콜콜한 수다가 우리를 구원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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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영화 평론가가 최근 한 영상에서 이런 말을 했다. 결국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거대한 이념이 아닌 가벼운 수다라고.


내가 유독 초라하게 느껴졌던 외로운 날에 서점을 찾았던 이유도 '시시콜콜한 우리들의 엉망진창에 대한 수다'를 원해서가 아니었을까. 활자라는 베일에 가려진, 꼭 나 같이 어리석은 책 속의 인간들과의 치기 어린 수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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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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