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Tschüs! Berlin! [여행]

글 입력 2022.09.25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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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로 이방인이 된 기분을 즐기기 위해 여행을 간다. 아무도 내가 있는지, 있었는지, 앞으로 있을 것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불투명한 상태가 좋아서. 뜻 모를 언어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제한된 기분도 썩 나쁘지는 않다.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을 즐기고, 돌발 상황을 썩 즐기지 않는 것이 기본적인 내 성격이라면, 여행은 조금 다르다. ‘되는 대로 하면 되는 거지, 내가 통제하지 못할 것에서 스트레스 받아 하지 말자’는 느긋한 성정은 여행에서만 발휘된다. 골목골목을 뒤져가며 들여다보고 빛을 드는 순간을 놓친 것이 못내 아쉬워 다음날 다른 일정을 포기하고 또 가보는 그런 마음.


특히 이번 여행은 평소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정이 빼곡히 예정된 출장이었다는 것이 우선 마음을 가볍게 만들었다. ‘여행의 본전을 찾아야 한다’는 여행객의 부담이 덜어진 것이다. 여행의 목적이 비즈니스니, 일만 잘하고 오면 본전인 셈이지.(맥주의 고장인 곳이라 밤마다 맥주 한 잔씩은 의무처럼 챙겨마시기는 했다.)


길을 찾으려면 눈에 익지 않은 독일어와 내 위치를 몇 번이나 확인해야 ‘저기 있다!’ 같은 기분 좋은 탄성을 내지를 수 있고, 현실감 없이 닥쳐버린 위기 상황에서는 입을 꾹 다물고 무력하게 앉아있어야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래서 베를린에서 만난 사람들이 지금까지 베를린의 인상이 어땠냐 물으면, ‘I don’t wanna go back!’ (나 돌아가기 싫어!)이라고 답하곤 했다. 내가 묵었던 호텔에는 멋진 수염을 기른 직원이 있었는데, 내 대답을 듣고서는 ‘Well, welcome to Berlin!, Just in case that anyone didn’t say that before.’ (베를린에 온 걸 환영해요! 당신이 그 말을 이전에 못 들었을까봐 말해봤어요.)라고 답했다. 그런 다정한 인사는 기대도 않았는데.


사실 베를린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아는 것이라곤 베를린 사람들이 엄청 칼 같고 깐깐하다더라, 인종차별이 엄청나다더라, 여행지로는 별로라더라, 일렉 클럽에 들어가려던 모 CEO가 소위 말하는 ‘입뺀’을 당했다더라 같은 무성한 소문뿐. 지금은 여행지로는 ‘부적합’ 판정을 내린 사람한테 가서 PPT를 띄워놓고 연설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베를린 진짜 좋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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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은 기본적으로 친절했다. 그리고 그것은 낯선 곳에서 이방인이 가장 필요로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바쁘게 지나가던 사람들은 무작정 제 앞길을 막고 제 이야기를 쏟아내는 수상함과 무례함에도 기꺼이 자신의 짐을 내려놓고 걸음을 멈췄다. 친구와 수다를 떨다가도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친구의 손목을 잡고 내 앞에 멈춰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기자라고 해서인지, 아니면 진짜로 베를린이 친절한 도시였던건지 그 경계는 명확하지 않은 듯.)

 

웃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래 이거지! 이래서 내가 내 직업을 좋아했었지!’

 

타지에서 직업에 대한 애정을 느끼다니, 다시없을 특이한 경험이었다. 길거리에 명함을 수도 없이 뿌렸다. 그들은 내 명함과 얼굴을 번갈아 보며, ‘좋은 기사를 기대하겠다’고 이야기했다. 내 명함은 그들의 가방 구석에서 굴러다니다가, 버려질 즈음에 ‘아 이런 사람이랑 이야기를 했었지’ 정도의 의미만 선사한다 해도 충분하다. 내 기사를 찾아본다면 더 좋겠지만.

 

베를린에서 보낸 시간을 일주일이었다. 한 도시랑 사랑에 빠지기에는 충분한 시간. 나는 급기야 여기서 살면서 작업실 겸 집으로 쓸 곳까지 정해두었다. 일주일 동안 틀어지는 일정 말고는 속을 썩인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나같이 재밌고 신선한 경험뿐. 선배들은 틈만 나면 휘청거리는 내게 종이라는 별명을 붙였고, 우리는 매일 다른 술을 바꿔 마시며 낄낄거렸다. 혼자서라면 반드시 포기했을 일을 다 함께 해냈고 한숨을 쉬었으며 미친 듯이 걸었다. 또, 고등학교 선배를 만났으며, 밤의 베를린 거리를 휘청이면서 돌아다니다가, 아침에는 공원을 뛰었다. 예술을 하는 세르비아인 친구도 생겼다.


베를린에서 산다면 나는 언제나 이방인으로 살게 될 것이다. 베를린의 변덕스러운 날씨가 하루 끝의 매운 서러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더 알고 싶다. 이 도시가 갖고 있는 나쁜 점까지도 알고 싶었다. 그리고 나서 ‘내 미래가 담긴 도시는 베를린이다’, 확고하게 말하고 싶었다. 어떤 것의 나쁜 것까지 품어버리려는 미련함을 사랑에 빠졌다는 말 말고 어떤 말로 대체할 수 있을까.


얼마 전 재미로 봤던 타로카드점이 생각났다. ‘빠른 시일 내 당신의 주변과 사랑에 빠지겠네요.’ 용하기도 하지. 그게 꼭 사람이란 법은 없지 않은가. 한편으로는 베를린에 함께 갔던,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과도 사랑에 빠졌으니 꼭 틀린 말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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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베를린 미테 거리에서 쓰고 있다. 가게 안에 있는 의자보다 바깥에 있는 의자들이 더 많다. 나와있는 의자들은 햇빛을 볼 수 있는 방향으로 줄을 서 있다.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햇빛이 강하게 꽂히는 카페 자리에 앉아서 햇빛과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다. 가게에는 이름 모를 빵들이 구워지고 있고, 야외에 앉은 사람들은 손끝이 아릴 정도로 뜨거운 커피를 들고 눈을 맞추며 대화하고 있다. 나는 그 사람들의 가운데 앉아 다양한 억양의 독일어를 주워 삼기면서 고요히 앉아있다. 가끔 생각나는 단어들을 일기장에 적으면서, 필름 카메라로 순간을 담으면서.


베를린은 춥다. 아름답고 영특하게 짜인 건물을 안고 있는 도시이며 그 사이로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지만, 너무나도 춥다. 해가 지기 무섭게 코가 시려지는 차가운 바람이 얼굴과 마음을 동시에 친다.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안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꽉 안아주면 좋겠다는 생각.


그래서 베를린에서는 누군가에게 자주 안겼다. 두 팔을 활짝 벌리면 안아주겠다는 것이 만국 공통인 보디랭귀지라 너무 다행이다. 내가 너를 안아보고 싶다는 것이 더 많은 노력을 표하는 일이라면 누구도 외국인과의 포옹을 선뜻 도전하려 하지 않을 테니까. 나는 애정을 자주 표했고, 조금 더 친밀하게 굴었고, 자주 웃었다. 내 벽을 무방비하게 무너뜨리는 이 나라가 좋다. 이미 한 번 벽을 무너뜨린 나라라 그럴까? (농담이다)


티 한 잔을 들고 방금 친구가 되기로 한 내가 ‘서울 집에 놀러 와도 좋아’라고 하자 ‘그렇다면 우리집도 열려 있어’라고 답해준 나의 친구 아냐와 안젤라. 타지에서 만난 반가운 고등학교 선배 Y와 나눈 술과 빨개진 코. 베를린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남겨진 발자국이 너무 진하다.


한국보다는 한 달 먼저 흐르고 있는 시간 때문에 이미 아침과 밤을 둘러싸고 겨울 공기가 흐른다. 겨울이 되면 늘 속절없이 흘러버린 시간 때문에 책임질 수 없는 우울감에 휩싸이곤 하는데, 먼 나라의 앞선 계절이라 우울감은 간데없고 온통 신기함뿐이다.


곧 눈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흐린 하늘 아래서 비집고 나올 햇빛을 기다렸다. 신기하게도 언젠가는 햇빛이 난다. 기다리면 햇빛이 보얗게 고개를 든다. 기다린 만큼 더 따사로운 볕을 향해 이리저리 몸을 옮겨 걷는 사람들을 보며 웃는다. 겨울을 예습했으니 올해 겨울은 덜 어렵고 막막하리라는 기대감을 안고서 노트북을 들고 일어난다. 다시 만나요 베를린, tschü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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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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