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확신에 찬 숨들, 숨을 닮은 포착들 - 비비안 마이어 [도서]

비비안 마이어는 자신이 살고 싶었던 삶을 살았다.
글 입력 2022.08.2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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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시카고의 한 경매장에 나온 상자에는 누구에게도 공개된 적 없던 어떤 무명 작가의 사진 필름이 들어 있었다. 한 남자는 당시 집필하던 책에 실을 만한 사진이 있을까 싶어 이를 낙찰받았다. 그리고 그중 SNS에 올라온 몇 장의 놀라운 사진들에 대중들은 순식간에 열광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무명 작가를 본격적으로 찾기 시작한 이래로 지금까지 모인 그의 작품 수가 거의 15만 장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한 사람이 찍은 사진이라기에는 믿기지 않는 양이다. 이로 인해 20세기 거리 사진의 역사가 다시 쓰이게 되었지만, 사진을 찍은 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자연스레 이 베일에 싸인 거리의 사진작가에게는 대중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신화가 따라붙었다. 책 표지에 적힌 ‘보모 사진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삶’이라는 말은 언뜻 보았을 때 꽤나 의미심장하고 미스테리한 뉘앙스를 풍긴다. 그리고 나 역시 그의 삶이 담겼다는 약 500페이지가량의 두꺼운 책을 마주하며, 어쩌면 ‘남기고자 했던 이’의 숭고하고 극적인 서사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방대한 역사를 남긴 것과는 달리, 그녀의 삶에서 어떤 사명감의 궤적을 따른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보여주기 위해 카메라를 들지 않았다. 그 수많은 필름 중 약 7천여 점 외에는 현상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가 자신이 찍은 사진을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저 그녀는 망설임 없이 셔터를 눌렀고, 후회 없는 포착을 했을 뿐이다.


그렇게 비비안 마이어는 살았고,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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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 마이어는 유전적 요인과 어린 시절의 경험, 그리고 우연한 만남과 진지한 관계와 무작위적인 결정의 우여곡절로 빚어진 존재였다. 혼외자, 중혼, 부모의 방임, 약물 남용과 폭력, 정신 질환의 문제가 얽히고 섥힌 복잡한 가족사는 비비안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녀의 비밀스러운 삶은 과거와 과감하게 절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른 시기부터 그녀는 앞으로 평생 간직하게 될 보호막을 두르게 되었다. 비비안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을 재빠르게 다른 곳으로 전환하는 데에 익숙했고, 신체 접촉을 공공연하게 혐오했다.

 

이때 확립된 그녀의 성격과 행동 양식은 이후의 교류에서도 지속적으로 발휘된다. 비비안 마이어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타인에게 굳이 밝히지 않았고, 때로는 자신의 이름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떠나는 데에 있어 어떤 망설임이나 미련을 보이지 않았다. 피사체와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그녀가 ‘세상과 담을 쌓은 불운한 천재’라는 식으로 납작하게 해석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복잡한 가족사의 일면에는 그녀가 개방성과 독립성을 기르게 된 계기 또한 분명히 존재했다. 어머니 쪽의 집안인 샹소르 사람들은 스스로가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거의 모든 면에서 자유를 사랑하고, 제약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들이었다.

 

또, 그녀는 엄청난 에너지와 호기심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인형 공장에서 일한 경험으로부터는 세심한 미적 감각을, 보모 생활로부터는 일상에서 놓치기 쉬운 지점을 포착하는 눈을 키워나갔다. 카메라는 그동안 빠르게 흡수하고 수용해왔던 것들을 표현하는 단순한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저자는 기존의 해석을 거부하고, 전기를 집필하며 비비안이 정말로 무엇을 원하고 느꼈는지를 알아내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녀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고 느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기를 힘들어했던 여인이 그토록 개방적이면서 감성적이고 인간미 넘치는 사진을 촬영했다는 역설에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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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결핍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지만, 작업에서만큼은 인간의 애정을 여실히 드러낸다. “과거를 빼앗긴 사람들이 가장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게 되는 것 같다.”라는 수전 손택의 말처럼 하루에 적어도 필름 한 통씩, 40년간 약 15만 장이라는 전설을 만들어 낸 이 탐닉적인 거리의 사진작가로부터 저자가 결론적으로 밝혀낸 것은, 비비안에게 사진이란 ‘감정을 드러내고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그녀가 세상에 대한 자신의 깊은 이해를 드러내고, 그 세상에 참여하는 방법’이었다는 점이었다.

 

비비안 마이어는 타인과 관계를 맺는 능력을 발전시킬 기회를 얻지 못했을 뿐,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사진의 거장 조엘 마이어로위츠는 “남녀를 불문하고 거리의 사진작가는 길가에 나가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걸 편안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점에서 사교적이라 할 수 있지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독과 흥미롭게 결합된 존재들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관찰하고 포착하고 받아들이면서도 뒤로 물러서서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해요. 그것이 사진과 함께하기로 한 사람이 감수해야 할 이중성이지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비비안 마이어는 이에 매우 적합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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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삶과 시골의 삶, 중요한 삶과 가려진 삶, 깊이 사랑받는 삶과 비극적으로 버려진 삶이라는 놀라울 정도로 다른 두 삶을 살아야 했다. 부자들과 어울렸지만 가난한 사람들 손에서 자랐고 모든 곳에 속해 있었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 이제, 비비안은 온전히 홀로 설 수 있었다. (p.100)

 

 

비비안이 어린 시절을 보낸 프랑스와 처음 홀로 서기 시작했던 뉴욕은 극단적으로 다른 곳이었다. 그녀가 보고 겪은 프랑스 시골의 감성과 도시의 세련미, 엄청난 창의력과 지적 자원, 어렸을 때의 깊은 트라우마 등의 이중적인 요소들이 그녀 안에 한데 뭉쳐, 그녀를 동기와 행동을 파악하기 힘든 비비안 마이어라는 복잡하고 독특한 인물로 이루어 냈다.

 

진보적인 시각을 지닌 비비안은 인종과 계급이 교차하는 지점을 포착하는 데에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찍은 사진에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나지만, 그들의 순수함에 대한 애정은 공평하게 묻어난다. 그렇게 그녀의 사진에서는 사람과 장소를 초월하는,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보편적인 가치가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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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과 함께한 촬영 여행에서 잉어가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하는 것은 사진을 찍을 대상을 인식하고 그 순간을 포착하는 비비안의 속도였다. “피사체를 발견하면 곧바로 카메라를 열어서 초점을 잡고 셔터를 눌렀어요. 콰광! 정말 빨랐어요. 걸어가면서 초점을 맞추고 셔터를 누를 때까지 1초도 안 걸렸을 거예요. 그러니 찍히는 사람들은 반응할 시간도 없었죠.” (p.252)

 


비비안은 사소한 일상에 담긴 아름다움과 의미, 관습, 문화 등을 찾아내는 재능 또한 뛰어났고, 셔터를 누르는 일이 숨 쉬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진에 관해 비비안은 그 어떤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그 장면을 포착했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망설임 없이 셔터를 누르게끔 했던 그 확신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비안은 사진작가로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수많은 실험을 거듭해왔고,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을 향해 자신의 렌즈를 들이대며 빛과 그림자, 구도와 움직임에 따른 변화 등을 끈질기게 연구했다.

 

또한 그녀는 언제나 유행을 면밀하게 살폈고, 기술적인 측면에서나 지적인 측면에서나 동시대에 발맞추려 애썼다. 특히 기술에 대한 탐구는 촬영에 있어 그녀가 주도적으로 더 많은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했고, 찍는 것들의 범위를 더욱 확장해 나갈 수 있게끔 했다.

 

그렇게 그녀를 복합적으로 이루는 풍부한 경험들로 인해, 그녀는 날카롭고 현혹적인 동시에 재치를 겸비하는 다채로운 다양한 속성을 지닌 자신만의 기준을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사진을 찍을 때 뿐만 아니라, 인생의 모든 일들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 그녀의 확신을 더욱 두텁게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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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모든 연구자적인 면모에도 불구하고, 비비안 마이어는 사진작가가 아닌, 사진 애호가로서의 길을 택했다. 사진을 찍으면서 그녀는 누군가의 평가나 인정을 구하지 않았고, 사진 커뮤니티에 발을 들이거나 사진을 판매하려는 시도도 거의 하지 않았다. 비비안은 그저 자기 자신만을 위해 마음껏 사진을 찍었다.

 

이를 두고 혹자는 예술가라는 관점에서 그녀의 작품이 예술적인 비평을 겪거나 타협에 휘둘리지 않고도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비비안을 행운아라고 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토록 어마어마한 양의 사진을 꾸준히 찍는 일을 가능케 했던 것은 단순히 운이 아닌, 전적으로 수많은 결정을 이어갔던 그녀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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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을 실제로 본 사람조차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비비안 마이어라는 한 사람의 인생을 대해 밝혀나가는 6년간의 여정은 한 사람의 재현이 이토록 어려운 일임을 충분히 짐작 가능하게 한다.


저자는 비비안 마이어를 수소문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주변인에게 들었던 그토록 따뜻한 휴가 사진이 실제로 전부 허구였다는 비화를 가감없이 밝히며, 사진은 현실을 충분히 오도할 수 있음을, 그리고 사진에 담긴 장면이 반드시 진실이거나 무언가를 상징하는 건 아님을 명시했다. 이에 남아있는 가장 명확한 흔적으로 여겨졌던 사진에는 더욱 자세한 이야기가 필요하게 되었다.

 

한편 비비안이 찍은 방대한 양의 사진이 역사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데에는 그녀의 정신질환이 꽤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실제로 비비안은 일상생활에 크게 영향을 끼칠 정도로 저장 장애를 겪고 있었고, 저장 장애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 랜디 프로스트 박사는 저장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지능이 아주 높을 수 있으며, 시각적으로 창의적이어서 “물건의 미적이고 공간적인 품질에 방점을 두고 다른 사람들이 간과하는 물건의 특성을 발견하고 음미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무명이었던 비비안 마이어가 유명세를 얻게 되면서, 그녀의 불우한 삶과 정신 질환을 둘러싼 편견과 낙인, 관심의 정당성과 함께 그녀가 자신의 작품을 공개하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수많은 논쟁이 이어졌다. 이에 비비안 마이어의 팬들은 그의 작품을 음미할 때마다 묘한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저자가 밝혀낸 비비안은, 스스로를 결코 희생자로 여기지 않았으며 필요할 때면 기꺼이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었다. 과잉 해석을 최대한 지양하려는 노력이 담긴 비비안 마이어를 둘러싼 촘촘한 설명들은 책으로 엮여 독자가 비비안 마이어라는 사람을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비로소 그녀의 사진과 인생이 조화를 이루게 되었고, 정성스레 완성된 그녀의 이야기는 보통의 삶과 예술가의 경계를 가뿐히 오고 갔다.

 

*

 

 

비비안 마이어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았다. (p.25)

 

 

사진은 비비안 마이어를 세상과 잇는 중요한 연결고리였고, 그녀는 원할때면 언제라도 세상으로 들어가 자신이 있어야 할 정당한 위치를 요구했다. 그리고 새로운 곳에 들어설 때면 그녀의 목에 걸린 장비는 언제나 그녀에게 목적의식과 권위를 선사해 주었고, 안전한 거리에서 감정을 끌어낼 수 있게 함으로써 비비안이 스스로를 규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비비안 마이어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았고, 그녀의 인생이 담긴 상자가 여기까지 왔다. 그녀가 남긴 것들이 또다시 그녀의 삶과 세상을, 지금을 잇는 숨으로 이어졌다.

 

 

[민정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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