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초록색 낭만, 주황색 죽음 [공간]

식물은 말이 없다
글 입력 2022.08.22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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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대청소를 앞두고 말라죽은 화분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오늘 버려, 말아.


다 마른 가지랑 바스러진 꽃잎만 남은 이 화분을 어떻게 처지를 해야 할지, 곤란했다. 죽은 식물은 집에 두지 않는 게 좋다는 엄마의 말이 떠올라서 마음이 더 분주하다. 하필 그러게 선인장도 죽이는 집에 와서는.

 

꽃집을 여는 게 꿈이라며 대뜸 화분을 내밀던 사람의 기운에 이끌려 얼결에 주황색 꽃이 활짝 핀 화분을 몸에 안았다. 꽃다발도 아니고 내 움직임에 맞춰 하늘하늘 흔들리는 화분을 들고 하루를 돌아다녔다. D는 옆에서 ‘호구 잡혔네’하고 술에 젖은 목소리로 웃었다.


삼신할머니도 아니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떤 여자가 점지해 준 화분은 무사히 내 책상 위에 안착했다. 이름도 어렵다. 칼랑코에. 잘 죽지 않는다고 호언장담을 하던 여자의 목소리가 무색하게 화분은 2주가 지나면서 시들시들. 활짝 피었던 꽃잎은 흔적도 없이 수그러들었다가 이내 비비 꼬이면서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고민이 길어지자 바쁜 몸이 먼저 주변 쓰레기를 주워 담기 시작했다. 집주인이 외출이 잦으면 제일 먼저 집이 망가진다. 집에는 있지도 않았는데 머리카락은 어디서 이렇게 떨어지는지, 청소기를 돌리고 카펫을 털고 밀린 빨래를 하고. 고민의 흔적이 역력한 지난 원고들을 찢어버리고 나니 금세 쓰레기봉투 20L가 가득 찬다. 그러고는 맨 위, 잘만 구겨 넣으면 화분 하나 정도는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공간만이 남았다.


다시 고민을 시작했다. 이걸 버려 말어. 그러고 보니 죽은 화분은 어떻게 버리더라, 네이버에 검색을 해보니, 죽은 것들은 일반 쓰레기란다. 시든 잎은 잘 조각내고, 뿌리는 흙을 잘 털어내어서 일반 쓰레기로 들어간다.


나는 의사도 아닌데, 잎이 좀 시들었다고 꽃잎이 모조리 닫혔다고 마음대로 사형선고를 내려도 될까. 내 실수로 죽인 화분, 며칠 전까지는 살아있었던 것들인데 이렇게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걸까 심하게 망설여지기 시작했다. 결국은 이것저것 인간이 낳은 진짜 쓰레기들과 함께 버리기는 미안해져서 그대로 쓰레기봉투를 묶고 내보내고 만다.


며칠의 유예를 주기로 했다. 플라스틱 쓰레기는 버릴 날이 좀 남았으니, 화분을 버릴 수 있는 날까지만 책상에 그대로 두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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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꽃이 피었다. 선명한 초록색 줄기가 크게 솟았다. 그 밑에 종종이 달린 꽃잎들이 햇빛을 향해 입을 벌린다. 주홍빛 조명이 책상 한구석에서 빛났다.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 꽃잎이 마치 처음처럼 활짝 피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느닷없이 튀어나온 행동에 금방 머쓱해지기는 했지만 나는 하루 종일 그 화분 앞을 서성거리며 어떻게 살아났는지 생각했다.


취업 선물로 처음 받아 집에 온 지 3년이 훌쩍 넘은 스투키 화분 덕배는 최근 제법 용맹한 잎을 하나 틔웠다. 다른 집 스투키는 위로 쑥쑥 잘만 자라던데 우리 집 애는 영 자라지를 않아서 걱정했는데. 위만 푸른 잎인 체하고 아래는 플라스틱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놈이 기특하게 이파리 하나를 쏙 내민 것이다. 이때도 머쓱하게 손뼉을 쳤다. 생각해 보니 너무 기대하지 않아서 제대로 반응해 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해진다.


말이 없는 것을 마음에 담는 것은 어렵다. 말이라는 공통의 언어가 있는 사람과도 말이 잘 통하지 않는데 식물은 오죽할까 싶다. 덕배가 싹을 틔우는 것은 3년을 기다렸고, 만개한 칼랑코에가 분갈이 시기를 놓쳐 완전히 줄기가 꺾이기까지는 석 달이 걸렸다. 나는 그 근처를 서성거리고, 물을 주고, 창문으로 옮겨주거나 가끔은 잊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늘 그 자리에 있는 화분은 가끔씩 이렇게 잊지 못할 선물을 준다. 집안을 식물원처럼 만들어놓은 식물 박사 Y는 내 이야기를 듣고 식물의 연관어는 아마 인내심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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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뿌리만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어. 잎이랑 줄기는 다 말라죽어버린 것처럼 보여도 뿌리만 있으면 다시 언젠가는 이파리를 낼 수 있고, 줄기를 세울 수 있으니까 나는 그냥 참고 기다려야 해. 언젠가는 얘가 다시 하늘을 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기다리면 돼. 우정은 그런 거 같아.”


우정이래. 그러게 2년이면 우정이지. 나는 쉽게 수긍했다. 이것은 우정이 맞다. 자라지도, 죽지도 않고 제시간 속에 틀어박힌 것을 기다려준 것이 우정이 아니면 무엇인가. 나는 덕배 사진을 본 Y가 전해준 분갈이 팁을 수첩에 적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스탠드 빛만 어렴풋하게 비추고 있는 책상 옆에서 덕배는 비죽하게 튀어나온 잎을 두고 늘 그랬던 것처럼 서 있다. 비록 칼랑코에의 마음은 읽지 못해서 금방 떠나보내고 말았지만 덕배는 더 오래 지켜줄 셈이다. 집에 도착하니 아무래도 분갈이는 자신이 해주는 것이 낫겠다는 Y의 긴박한 카톡이 와있었다. 잘 부탁한다는 답장을 보내면서 나는 책상 구석의 덕배를 바라본다.

 

오래 살아. 책상에서 삐져나온 유일한 우정이 된 덕배를 지켜주기로 다짐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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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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