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외국어 공부, 그 끝을 찾아서 [문화 전반]

'나 외국어 좀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 때 읽으면 좋은 글
글 입력 2022.08.14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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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나도 외국어 하나 쯤은 하는 세상


 

훈민정음은 과학적이고 한글은 체계적이며 한국어는 글맛이 있다. 세계의 석학들이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연구한다. 그로부터 오는 자부심은 이루 말할 데가 없지만, 애석하게도 이 우수한 언어의 사용 인구는 남북한을 합쳐도 7,500만이 안 되고 재외동포 등을 포함해도 8천만이 채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한국어만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의 경우,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전 세계 인구의 약 10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는 거다. 바야흐로 글로벌 시대, 세대를 불문하고 어학 공부의 붐이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 이유다. 수많은 직장인이 새벽 시간 '전화 영어'로 아침을 깨우고, 또 유학과 어학연수는 주변에 흔히 있는 예삿일이 됐다.


글로벌화의 흐름에 맞춰 2014년 봄, 중국어 통번역학과에 입학하면서 나 역시 외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햇수로 9년째, 휴식기 없이 흘러온 나의 중국어는 어느새 10년을 바라보고 있다. 지난 9년간 '외국어 공부, 이 지난한 과정의 끝은 어디인가'에 대해 스스로, 또 같은 길을 걸어온 스승에게, 선배에게, 동료에게 무수히 물었다.

 

물론, 어떤 공부든 끝은 없다지만 언어는 사람들의 삶과 너무 가까이 맞닿아 있는 분야라 시시각각 변하고 생겨나기에 그 끝이 다른 어떤 분야보다 요원하게 느껴졌다. 마치 무지개를 연구하는 학자처럼, 절대 끝을 볼 수 없지만 그래도 할 줄 아는 것이 이것뿐이라는 마음으로 부단히 말하기와 듣기, 쓰기, 읽기 실력을 갈고닦았다.


그렇게 나는 통번역사가 되었다. 통번역대학원을 다닐 때만 해도 나는 이제 전공 언어를 정복했다고 믿었는데, 졸업 후 나온 세상은 나에게 조금 다른 이야기를 했다. 통역이든 번역이든, 결과물이 나올 때마다 클라이언트는 필터링 없는 피드백을 날렸고, 대학원 동기들의 크리틱을 돌이켜보면 아주 젠틀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통번역사가 된 후에 '외국어 공부의 끝'에 대해 더 자주, 더 많이 생각한다.

 

 

 

외국어 공부, 그 끝은 어디인가?


 

나를 거쳐간 대답에는 '자막 없이 드라마 보기', '최고 수준의 자격증 취득', '외국어로 꿈꾸는 것' 등이 있다. 물론 외국어를 배우는 목적에 따라 그 끝은 달라지겠지만, 오늘은 해당 언어 국가에서, 그 국가의 언어로 밥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 9년의 공부를 통해 느끼는 '외국어 공부의 끝'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설 읽기'다. 주의할 점이 있다면 외국 문학을 해당 언어로 번역한 소설은 논외로 한다는 것. 어느 나라나 그렇듯, 문학작품 특히 소설에는 그 나라의 문화는 물론이고 언어의 정수가 담겨있다. 한국 소설을 생각하면 쉽다.

 

한국 소설에는 한국 문화도 담겨있지만 한국의 지방 사투리, 의성어나 의태어, 캐릭터의 특징에 따라 달라지는 언어 습관까지 녹아있다. 장면을 상상하며 읽어야 하는 소설의 장르적 특성상, 어투로 인물의 성격을 추측해낼 수 없다면 어느 순간 상상에 몰입이 되지 않고, 의성어나 의태어가 나타내는 움직임의 경중을 알 수 없다면 상상 속 장면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주말을 맞아 들른 서점에서 책을 세 권 사서 읽고 난 다음이다. 현지 작가의 자기 계발서 한 권, 번역된 비문학 서적 한 권, 현지 작가의 소설 한 권. 이렇게 총 세 권을 구매했는데 서점에 딸린 카페에서 한참을 읽고 난이도를 평가한 결과, 자기 계발서<번역서<소설 순으로 난이도가 높았다.

 


[43]소설.jpg
왼쪽부터 소설, 비문학 역서, 자기 계발서

 

 

지난 9년간 쉼 없이 중국어를 공부한 데다가, 한국에서도 '제7일'로 유명한 중국의 현대 소설가 '위화'의 책이라 자신만만하게 집어 들었음에도 체감 정확도가 70% 정도 밖에 안 되는 느낌이었다. 어떤 대사는 좀 뜬금없다고 느껴졌는데 찾아보니 관용어였고, 어떤 대목은 단락 통째로 의미 이해가 어려웠다. 뜻을 찾는 데에 너무 많은 시간이 들고, 몰입감까지 빼앗겨 결국 형광펜을 칠하며 눈치코치로 넘어가며 읽었는데, 읽고 보니 1/3이 형광펜 자국이었다.


내 중국어 실력에 좌절하며 소설을 덮고 펴든 자기 계발서는 너무 쉬웠다. 형광펜을 들 필요도 없이 술술 읽혔다. 중국 웹사이트에서 자주 접한 인기 칼럼처럼 일은 이렇게 해라, 쉬지 말고 배워라 등의 훈수를 두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 자기 계발서를 중국에서 산 까닭 역시, 훑어봤을 때 술술 읽혔기 때문이었으니 책이 훈수를 두든 참견을 하든 크게 상관이 없었다. 번역서인 비문학 서적도 원어를 중국어로 음역한 표현을 제외하고는 신문 기사로도 자주 접하는 환경 분야라 어렵지 않게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소설, 그 장르적 심오함에 대해


 

생각해 보면 소설은 모국어로도 소화가 어려운 장르다. 특히 장편 소설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효율과 가성비의 시대에 정보나 지식을 전하는 걸 목적으로 하지 않는, 300 페이지의 글 자체가 우리에게 진입장벽이 된다. 그 진입장벽을 넘어선 후에도 소설은 우리가 계속 사고하고 상상하기를 요구한다. 소설을 읽는 내내 독자는 이해를 위해 인물 간의 관계, 인물의 가치관이나 입장을 끊임없이 추적해야 하는데, 이 과정 자체가 표면적인 이야기 너머를 봐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모국어로도 쉽지 않다.


하물며 외국어로 이 작업을 반복적으로 수행한다는 건, 출중한 외국어 실력뿐만 아니라, 해당 외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화자 간, 보편적이라고 여겨지는 사고방식, 논리의 흐름 등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한다. 즉, 한국과 그 나라 간 문화 차이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적확하게 판단할 줄 알아야 그나마 읽어진다는 거다. 나의 경우에는 문화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소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소설은 남의 인생을 엿보는 수많은 방식 중에서도 조금 어려운 축에 속한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엿본 남의 인생은 꽤 큰 울림과 쾌감을 선사할 거다. 소설이 주는 울림과 원서가 주는 정복감이 모두 내 것이 되길 소망하는 마음으로 중국어 소설을 독파해 보고자 한다.

 

 

[오영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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