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바티망', 익숙한 세상을 낯설게 바라보다

레안드로 에를리치의 국내 개인전
글 입력 2022.08.12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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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는 순수한 예술 감상의 통로 외에도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를테면 정보 전달 내지는 오락적 성격의 전시까지, 그 목적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띤다. 그중에서도 후자의 경우 순전히 즐거움을 전달하는 일회성의 이벤트 정도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유희의 방식을 과감히 작업의 주된 기법 삼아, 국경을 넘어서서 전 세계에서 활약하는 작가가 있다.

 

바로 지금 진행 중인 전시 《바티망》의 주인공, 아르헨티나 출신의 레안드로 에를리치(1973~)다. 그의 이번 개인전은 한-아르헨 수교 60주년을 맞아 개최되며, 노들섬 복합문화공간에서 올해 12월 28일까지 계속된다.


이번 전시는 그를 ‘현대미술의 아이콘’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 <바티망>이 그간 18개국에서 일평균 4,500명의 관객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 호칭에 이견을 내놓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렇듯 많은 대중의 열렬한 참여를 이끌어낸 그 작품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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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망’이란 프랑스어로 ‘건물’을 뜻하는 단어다.

 

제목처럼 건물의 형태를 닮은 실물 크기의 설치 작품으로, 파리의 예술 축제 ‘뉘 블랑쉬’를 위해 2004년에 탄생했다. 그 이후로는 각국을 순회하며 그곳의 고유한 건물 형태에서 영감을 받아 새로 제작되어 왔지만 이번 전시의 경우 특별히 파리에서 전시한 원본을 선보인다.


〈바티망〉은 미술 전시에서는 드물게도 작품과 신체적으로 긴밀히 접촉할 수 있는 경험을 선사함과 동시에 다른 관객과도 자연스럽게 상호 소통할 수 있는 자리다.

 

다른 관객이 불편해하지 않을까, 그들의 사진에 내 모습이 나와도 될까 등등의 불필요한 걱정을 내려놓고 창문에 매달리면 다른 낯선 이들과 비로소 하나가 되어 작품을 빈틈없이 메우게 된다.

 

 

잃어버린 정원(Lost Garden, 2009).jpg

 

 

〈바티망〉 외의 다른 작품들도 착시를 통해 색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열차의 창 너머로 파리, 뉴욕 등의 풍경이 스쳐지나가며 마치 여행하는 듯한 체험을 선사하는 〈세계의 지하철〉, 낮 비행기와 밤 비행기의 창문을 재현한 〈비행기〉와 〈야간 비행〉이 그렇다.

 

또한, 정원 건너편의 창문에서 낯선 이의 모습을 맞닥뜨리게 되는 〈잃어버린 정원〉과 낡은 교실에 유령이 되어 앉아있는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교실〉까지 모든 작품들이 이질적이면서도 즐거운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번 전시를 그저 일반적인 체험형 전시 내지는 사진 촬영용 전시로 여긴다면 오산이다. 작가는 그러한 오락적인 기법 너머에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숨겨 두기 때문이다.

 

사진으로 전시된 그의 다른 설치 작업들 중 〈상징의 민주주의〉를 보자.

 

 

상징의 민주주의(The Democracy of the Symbol)_2.jpg

 

 

이 작품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랜드마크인 오벨리스크의 뾰족한 윗부분이 잘린 듯한 눈속임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이 기념비는 1936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400주년을 기념해 단 4주만에 세워진 탑으로, 권위주의의 산물로 여겨져 시민들 사이에서는 종종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게다가 탑의 꼭대기에는 전망대가 있는데도 출입이 금지된 탓에, 도시 풍경을 관망할 수 있는 이들은 몇 없었다.


그래서 에를리치는 첨탑의 뾰족한 상단부를 똑같이 복제해 라틴아메리카 미술관 앞에 설치하고, 탑의 꼭대기에서 보이는 풍경을 영상으로 기록해 그 내부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동시에 첨탑 꼭대기가 실제로 잘린 것처럼 보이게끔 탑과 같은 색깔의 가림막을 설치해 뾰족한 부분을 가렸다.

 

이로써 허울뿐인 기념비를 미완의 상태로 격하시키고, 최상층의 특권적 시야를 일반 대중과 공유함으로써 권위의식을 전복했다.

 

 

교실(Class Room, 2017).jpg

 

 

이 전시를 그저 즐거운 체험의 장 그 이상으로 이해해 보면 그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정체성이 ‘유희’보다는 ‘시각’의 방식에 가깝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거울의 각도를 비틀어 왜곡된 가짜 공간감을 만들어내고, 투명한 동시에 맞은편의 형상을 비추는 유리판으로 공간의 물질적 경계를 흐림으로써, 평범치 않은 사물과 풍경을 마주했을 때 느끼는 낯섦에 온 감각을 집중해 평소와는 다른 시야로 주변을 살피게 한다.


우리는 시감각이 절대적으로 진실만을 비춘다고 여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처럼,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 중 망막에 비치는 형상을 가장 신봉한다. 그러나 이 전시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시각 체계는 약간의 속임수만으로도 별다른 의심 없이 손쉽게 속아넘어갈 정도로 미약한 구조다. 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가 보는 것이 늘 진실이 아님을 몸소 경험하게 함으로써 시각의 방식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메시지를 가장 유쾌한 방식으로 전한다는 것이 그의 작업의 매력이다. 어떤 언어적 설명도 필요하지 않다. 전시실에서 관람객에게 제공되는 텍스트는 인용된 작가의 몇 마디 문장과 작품의 제목이 전부다. 그저 자유롭게 작품 사이를 드나들고 탐색하며 즉각적인 체험 앞에서 맞닥뜨리는 감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시감각의 허점을 공격 당하면서도 즐거워하면 된다.


 

“Scenes from daily life strike me as the most fitting environment 

in which to question reality.”

 

“저에게 일상은 현실에 의문을 던질 수 있는 최적의 환경입니다.”

 

- 레안드로 에를리치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전시인 만큼 가족 혹은 연인, 친구끼리 방문해 전시를 관람하고 노들섬에서 한강 산책을 즐기는 것도 좋겠다. 또 한 가지 더, 8월 중순부터는 그의 다른 설치 작품을 전시하니 이전에 공간을 방문한 관람객이라면 기존의 티켓으로 재입장이 가능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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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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