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파이트 클럽: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결말 - 3부 [영화]

글 입력 2022.05.31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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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이 경고는 당신을 위한 것이다. 당신이 읽는 이 쓸모없는 글에 담긴 모든 말들은 당신의 삶을 낭비시키는 것이다. 달리 할 일은 없는가? 이 순간들을 더 좋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당신의 인생은 무의미한가? 아니면 당신은 권위에 감복한 나머지 이를 주장하는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적인 존경과 신뢰를 바치는가? 당신은 읽어야만 하는 모든 것을 읽는가? 생각해야만 하는 모든 것을 새악하는가? 이런 걸 원해야 한다고 듣고선, 그걸 그대로 구매하는가? 아파트를 나가라. 이성을 만나라. 과도한 쇼핑과 자위 행위를 멈춰라. 당신의 일을 그만 둬라. 싸움을 시작하라. 당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라. 당신이 스스로 인간성을 주장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한낱 숫자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경고받았다...... 타일러가.

 

(<파이트 클럽>의 DVD 상영에 삽입된 도입부)

 

 

돌고 돌아, 결국 내 이야기를 하려 한다. 사실 <파이트 클럽>을 3부까지 쓸 정도로 할 말이 많다면, 그건 그만큼 이 작품을 사랑한다는 거다. 그러면 그토록 사랑하게 된 이유와 그 시절의 나를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때의 나



이상한 애. 누군가가 나를 정의할 때면 늘 들어가던 설명이었다. 그런 말들은 대부분 기분 나빴지만, 동시에 ‘남들과 다르다’라는 특별함을 담고 있어 때론 나를 우쭐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감수성이 예민해지고 또래문화가 삶의 중심이 되는 사춘기를 겪게 되자, 더는 야릇한 으쓱함 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조금 다른 특성을 지닌 사람 혹은 특별한 부류가 아니라, 그저 ‘틀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인정받고 싶었다. 주변 친구들처럼 아이돌을 좋아하고, 춤추는 게 재밌으며, 떡볶이를 잘 먹는, 주류가 되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상한 애'였다. 책벌레라는 별명이 전혀 모욕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너무도 익숙했고, 왁자지껄한 교실보다 조용한 도서관 또는 미술학원이 편하며, 외화와 팝송을 좋아하는 애. 처음으로 내가 싫어졌다. 무엇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나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더욱 내가 아는 세상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파이트 클럽>을 만났다.

 

 

 

다시, 파이트 클럽



척 팔라닉의 원작 소설과 데이비드 핀처의 영화까지 두 가지 매체로 감상할 수 있는 <파이트 클럽>. 간략히 설명하면 세 명의 주인공이 서로를 쫓고 쫓는 이야기다. 아니, 한 명의 주인공이 가진 세 가지 자아가 마침내 스스로를 받아들이기 위해 사랑과 미움- 애증의 싸움을 벌이는 내용이다. 이미 1, 2부에 걸쳐 쏟아낸 <파이트 클럽>에서 내 인생의 주제가 된 메시지는 바로 이거다.

 

 

"나만이 나를 구원한다."

 


그러기 위해선? 맞다. 먼저 나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 방식은? 내 마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어떤 문제가 생겼거나 어떤 갈등에 맞닥뜨렸을 때, 그것을 해결할 방법은 오직 나에게만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우린 자꾸만 외면한다. 듣지 않는다. 귀를 닫는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내 안의 소리를 무시하고 나를 부정했다. ‘잭’과 다를 바 없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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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은 짜여진 트랙을 따라 달릴 뿐, 자신이 어떠한 삶의 목표를 지녔는지 설명할 수 없는 인물이다. 이는 정체성 확립과 자기완성의 부재를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피해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잭은 성장통을 겪기 싫다는 이유로 아예 자라기를 포기한 상태였다. 더욱이 자신이 진정으로 손잡아야 하는 자아- '말라'를 만나면서 모든 문제가 보다 거대해진다. 말라는 잭 내면의 문제점, 골칫덩이, 자신이 가짜라는 진실에 대한 반감과 기피, 우울, 짜증을 그대로 직시하게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그렇다. 말라의 존재 자체가 고통이 된 잭은 결국 불면이 그를 잡아 먹어버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이윽고 잭은 자기 자신을 회피하는 또 다른 방식을 선택한다. 바로 나의 이상형이자 워너비를 만드는 것. 남자답게 집단의 우두머리로서 사람들을 이끌고, 사랑에서도 마초적으로 관계를 리드하며, 물리적인 힘의 논리를 따라 세상을 새로이 재건하겠다는 포부까지 지닌 ‘타일러’라는 대상으로 타자화한다. 타일러의 존재는 잭의 착각- 분명 나를 이런 세상에서 끄집어내 줄 ‘구원자’가 있을 거라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말미에서 알 수 있듯, 잭은 타일러를 죽인다. 그가 겨우 내가 만들어낸 또 다른 자아에 불과하다는 점을 맞닥뜨렸을 때, 모든 걸 뒤돌아본다. 잭은 자신이 해온 행동의 배경이 분노에 가득 차 있고, 그 결말은 심히 파괴적이라는 점에서 회의를 느낀다. 또한 자신이 결국 원해 온 것은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타인과의 진정한 유대, 지독히 아프더라도 열심히 겪어내 성장하는 자기완성, 손수 자신을 구출해 떳떳하게 나로서 살아가는 삶임을 깨닫는다. 한마디로- ’말라’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타일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그리곤 말라의 손을 꼭 잡고 그와 교감하며 드디어 나를 긍정하게 된다.


결국, 구원은 오직 나로부터 가능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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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일러를 죽이고 말라의 손을 잡는 행동은 잭의 구원- 당연히 제 손으로 자신을 구출해낸 그의 성장을 결정적으로 보여준다. 잭은 스스로를 신뢰하고 누구의 명령도 기다리지 않으며 직접 선택과 결정을 행한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이전의 현대사회 속 유령에 불과한 잭이 아닌, 타일러의 카리스마와 과감한 결단력 등을 부분적으로 갖추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마지막에 만나게 된 잭은 두 인격의 특성을 합친 인물로, 화자의 소심함도, 타일러의 폭력적 성향도 사라진다.

 

즉, ‘말라’로 표현되는 이상(理想)- 타인에게 공감하는 것은 물론, 사랑을 통해 진실한 관계 맺음이 가능하고, 사회적으로 거부되는 가치에도 당당하게 원하는 바를 솔직히 표현하며,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하기보단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로 나아간 것이다.


스스로 신뢰할 수 없었던 잭이 또 다른 정체성을 뒤집어쓴 채 갇혔던 허상을 버리고 조각난 정체성을 통합하는 일. 이는 물질주의적인 세계관에서 자신의 개성을 학살당하고 자기 신뢰를 이룰 수 없던 잭이 진정한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 연대와 자신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일군 자기실현을 뜻한다. 이렇듯 나를 구현하고 구원하는 일은 억제와 억압을 벗어버린 건강한 치유이며 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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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



나는 나를 미워했다. 나를 분노했다. 그렇게 세상이 싫었다. 그런 나였기에 <파이트 클럽>은 그토록 기다려온 구원자처럼 보였다. 어렸던 내가 보면 안 될 내용이었기 때문인지, 나 역시 한순간 잭과 마찬가지로 ‘파이트 클럽’의 사상에 흠뻑 매혹됐다. 말라의 손이 아니라, 타일러의 비누를 꼭 쥔 채 이 세상의 멸망을 고대하며 함께 사라지고 싶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파이트 클럽>은 나를 처음으로 쓰게 만들었다. 마음속에서 들끓는 무언가- 나만의 이야기를 토해내야 한다는 것을, 어쩌면 그게 ‘이상한 애’가 지닌 운명임을 깨닫게 했다. 더욱이 관련된 영화와 책과 음악과 그림을 찾아 ‘예술’을 공부하도록 이끌기도 했다. 이건 결국 외면의 변화로도 나타나게 되는데, 조금씩 예술을 알고 글로 쏟아내는 법을 알며 나를 알게 되자, 꿈이 생겨 원하는 배움을 찾아 제 발로 고등교육기관에 가게 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내면의 성장이었다. 나의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모두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믿으며, 무엇보다 내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 결국 <파이트 클럽>을 통해 나는 나를 구원했던 것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이상한 애’가 아니다. 나는 오롯이 나를 통해서만 설명할 수 있기에, 내 스스로 이름 붙인다. 서옥 규(圭)에 빛날 희(熙)- 길하게 빛나는 사람. 그 뜻에 따라 살아가려 한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게 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자, 사랑하는 나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빛이기 때문이다.

 

(글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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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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