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의 방황과 방랑 그리고 피아노 [음악]

글 입력 2022.03.18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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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졸업연주를 끝냈다.

 

개강을 하고서 그동안 머릿속에는 졸업연주 밖에 없었다. 일정 체크리스트에는 매일 연습만이 적혔다. 큰 짐을 하나 내려놓은 것 같아 후련하기도 하고 앞으로 내가 무대에 설 일이 있을까 싶은 생각에 조금 싱숭생숭해지기도 한다. 그렇게 내 피아노 레퍼토리에 <방랑자>가 추가되었다. 


나는 음악대학 전공자가 아니라 사범대학 음악교육학 전공자이다. 그렇기에 공부와 음악 사이를 늘 왔다 갔다 해야 했고, 항상 애매한 정체성을 느꼈다. 내가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 피아노 인생은 늘 취미와 전공의 모호한 경계선 위를 달렸고 그러는 사이에 레퍼토리는 하나둘 추가되어가고 있었다. 몇 개 되지 않는 곡이지만 각 곡에는 항상 그 곡을 공부했던 때의 기억과 추억이 하나하나 담겨 모든 곡이 각기 다른 소회를 남긴다.

 

 


첫 만남



졸업연주 곡을 골라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 졸업 동기들의 선곡들은 화려했고, 역시 리스트의 곡이 많았다. 리스트의 곡은 피아노 기교의 끝을 보여주기에 졸업연주 레퍼토리에서 자주 보인다. 그러나 리스트나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항상 내 취향은 아니었고 내 테크닉이나 손 크기로는 감히 도전도 할 수 없었다.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리는 쇼팽의 폴로네이즈에 매료되어서 하고 싶다고 가져갔지만, 당시 레슨 선생님께서는 어렵다고 보셨다.(언젠가는 도전해보고 싶다) 그렇게 선생님께서 내게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추천해주신 곡이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이었다.


첫 두 마디를 듣는 순간 왜 내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셨는지 알 것 같았다. 뭐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아, 이건 내곡인데? 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처음에는 약간의 거부감도 들었던 것 같다. 나는 어쩌면 평소의 내가 쳐왔던 곡들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곡을, 혹은 친구들이 치는 것처럼 어려운 기교에 도전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방랑자>는 내게 최고의 선곡이었다.

 

방랑자 환상곡은 초절기교만큼 어렵지는 않으면서 연주에서 하기에 효과가 좋은 곡-이라는 평가를 많이 들었고, 무난하게 악보를 읽어가며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속도를 높일수록, 연주가 손에 익으면 익을수록 어려운 곡임을 뒤늦게 알았다.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는 초기 독일낭만파의 대표적 작곡가로, ‘가곡의 왕’으로 불릴 만큼 수많은 독일가곡을 작곡하였고 장르의 발전을 이끌었다. 절대적인 규칙과 형식에서 벗어나 감정과 표현에 충실한 낭만파의 작곡가인 슈베르트의 음악은 “시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방랑은 낭만주의의 조건이다"

 

- 알프레트 브렌델

 


가곡과 실내악 작품으로 유명한 슈베르트가 대규모 기악작품에 대한 도전의 일환으로 쓴 작품인 <방랑자 환상곡>은 그가 열아홉 살 때 썼던 가곡 <방랑자>를 모티브로 하였다. 처음에는 ‘불행한 사나이’라는 제목으로 작곡했으나 이후 현재의 제목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이 곡은 “환상곡”이지만 전통적인 소나타 형식의 악장 배치를 따른다. 그러나 이 곡은 나중에 슈만의 환상곡이나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악장에 걸쳐 단일주제가 순환형식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며 그러한 점에서 이후의 소나타를 예언하는 듯하다.


슈베르트는 평생 베토벤을 깊이 존경하였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베토벤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며, 동시에 ‘리스트적’인 기교도 돋보인다. 이후 이 곡을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시 형식으로 편곡한 리스트가 평가한 것처럼 이 곡은 다채로운 오케스트라적 색채가 느껴지는 피아노곡이다.


그가 2악장의 주제로 사용한 가곡 <방랑자>의 가사는 이러하다.


 

나는 산 넘어 저쪽에서 왔다

골짜기는 안개에 자욱 바다는 물결치고 있었다

나는야 방랑자

작은 기쁨도 없이 탄식하면서 어딘가를 찾아헤맨다

햇볕은 차고 꽃은 시들었으며 목숨도 피로하여 지쳐버렸다

남의 말은 공허하게 들리고

나는 어딜가나 아는 사람 없는 방랑자

내 동경하는 나라는 그 어디인가, 찾아도 보이질 않는다

푸른 희망의 나라, 장미꽃이 피는 나라, 벗과 화목하는 나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나라 서로 말이 통하는 나라

그 같은 나라가 어디 있는가

아무리 방황해도 작은 기쁨도 없이 이어지는 탄식

“어느 곳인가” 찾으면 꿈결처럼 들려오는 소리

“네가 없는 곳, 거기에 행복이 있다”

 

- 슈미트 폰 뤼벡

 


상당히 음울한 내용의 가사를 보고서 행진곡처럼 긍정의 에너지로 가득한 1악장, 열정적인 피날레를 가진 이 곡에 왜 방랑자라는 제목을 붙였을까에 대한 고민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조성진의 방랑자



“방랑자”의 명연주로 유명한 건 마우리치오 폴리니이지만, 나는 2020년 음반을 낸 조성진의 연주를 들으며 이 곡을 연습했다. 그의 연주는 내가 이 곡을 연주하는 것을 더 좋아하게 만들어주었다.

 

아래 영상은 그의 레전드 영상으로 유명하다. 솔스베르크 음악축제에서의 연주인데, 코로나로 많은 공연이 취소되고 있던 시기였고 그래서인지 덥수룩한 머리를 한 그를 만나볼 수 있다. 장소가 주는 특별함과 더불어 팬들에게 "접신한 것 같다"라는 평을 듣곤 하는 연주다.

 

 

 

 

그의 연주를 듣자면, 특히나 슬프고 쓸쓸하면서도 절제된 열정이 느껴지는 2악장을 들으면 이 곡이 왜 “방랑자”인지 납득이 간다.

 

 

‘방랑자 환상곡’은 여러 면에서 난도가 상당한데요. 슈베르트 자신도 “너무 어려워 칠 수 없다”고 말한 것으로도 유명하고요. 이 곡을 조성진만의 연주로 표현하기 위해 감정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어떤 부분에 가장 중점을 두셨나요?

 

"이 곡의 가장 어려운 점은 테크닉이 어렵다는 것이지만... ‘테크닉이 어려운 걸 감추는 게’ 제일 어려운 거 같아요. 사람들이 이 곡을 들으면서 이 곡이 어렵다고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냥 이 곡이 아름답구나, 드라마틱 하구나, 서정적이구나 이렇게 느끼게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제가 연주한 슈베르트 곡 중에서는 가장 기술적으로 어려운 곡이라는 점은 사실이기도 하고요. 근데 그런 어려움을 티 내지 않으면서 음악이 먼저 들리게 하려면 일단 테크닉적으로 편해야 하는 거 같아요. 제가 2018년 말부터 이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무대에 오르면 오를수록 더 편해지는 게 있더라고요. 그리고 이 곡은 또 상상력이 많이 가미된 곡이에요. 악장마다 캐릭터도 다르고, 그런 것도 잘 표현하려고 했어요."

 

- 올댓아트 인터뷰 중

 

 

 

나의 <방랑자>



방학 내내 피아노를 놓고 있었던 나는 졸업연주를 급히 다시 준비하느라 꽤 애를 먹었다. 나는 전곡이 아니라 1,4악장을 연결해 10분가량을 연주했는데, 늘 전곡이 아닌 한 악장씩만을 공부해온 내게는 최장기록이었다. 그래서 악기연주에 체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번 기회에 뼛속깊이 느끼게 되었다.


이 곡은 특히 4악장에서 지구력을 많이 필요로 한다. 처음에는 1-4악장을 쉬지 않고 이어치지 못할 정도로 나는 체력과 지구력이 약했다. 4악장 후반부로 가면 절망스러울 정도로 팔이 아팠다. 그래서 팔에 힘을 빼는 연습과 더불어 지치지 않고 연주할 수 있도록 코어힘을 기르는 홈트레이닝과 연습 강행군을 수일간 이어갔다. 그랬더니 점점 4악장까지 연주할 수 있는 힘이 생기기는 했지만, 몸살이 나서 앓아 눕는, 웃지 못할 부작용이 있었다.

 

"art"는 "기술"이라고도 해석된다. 피아노 연주는 손만 이용하는게 아니다. 팔과 손목, 손가락 전체의 협응이 조화롭게, 아주 세밀하게 이루어져야 좋은 연주가 가능하다. 그야말로 기술이라 할 만하다. 지금껏 머리로만, 글자로만 이해하고 있던 걸 이제 와서야 몸으로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또 4악장은 휘몰아치는 듯한 피날레에 흥분하여 달려가기 십상이어서, 악보에 흥분하지 않기! 를 크게 써두고 그 부분에도 신경을 쓰며 연습했다.


잘하고 싶었다. 입시 때 이후로 이렇게 열심히 연습해보기는 처음이었다. 연습을 하면 할수록 곡에 빠져들었고, 음악에 빠져들었다. 내 머릿속과 일상에는 연습밖에 없었지만, 오히려 굉장히 생기있는 몇 주였다.

 

*


표제음악인 만큼 연습 내내 제목의 의미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방랑”은 낯선 단어이다. “방황”쪽이 내게는 더 익숙하다.

 

 

방랑 : 정한 곳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님

방황 : 분명한 방향이나 목표를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함.

 

 

비슷하지만 다른 두 단어다.

 

나의 지난 대학 생활, 그리고 휴학은 방황에 가까웠다. 학교와 전공, 인간관계는 내게 벅찼고 나는 무엇이 하고 싶은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몰랐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휴학을 했고 그때의 1년은 희미하게 기억날 정도로 방황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니었음을 지금은 잘 알고 있다. 아직도 분명하지는 않지만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를 알았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전공이나 많은 사람들이 걷는 길과는 다르기에 항상 불안하다.


방랑이 주는 단어의 느낌은 어딘가 명랑하고 방황자보다는 여행자의 느낌을 준다. 나는 인생의 여행자이고 싶다. 그것이 내 방황의 끝이 내게 준 해답이다.


슈베르트가 쓴 이 곡의 피날레는 방랑자가 여행의 끝에 결국은 찾아낸 기쁨에 대한 환희가 아니었을까? 혹은 행복을 찾아 헤매는 여정 그 자체에 대한 긍정인지도 모르겠다.


*

 

그렇게 “방황”과 “방랑”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이 연주가 끝났다. 내 연주가 어땠는지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리고 분명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후회는 없다. 대학에서의 연주는 이것이 마지막이고 이제는 언제 또 무대에 설지 다음에 내가 만나게 될 곡은 무엇일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분명 내 음악 인생의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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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레슨을 받으며 나는 음악이랑은 안되나보다고 절망하며 울었던 나날도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미스터치 하나하나에, 악상기호 하나하나에 점수가 매겨지는 게 음악의 목적은 아니니까. 언제나 음악을 즐기는 사람이고 싶고, 내 인생에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음악과 피아노가 항상 함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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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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