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슈미의 ‘비행’ 아니, 보다 도발적인 ‘자유로의 이행’ [공연]

연극 <슈미> 분석 및 리뷰
글 입력 2022.02.22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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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미>는 새로 이사한 슈미의 신혼집에 가까운 지인들이 방문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방문교사 유완과 불륜관계에 있는 ‘애경’, 슈미와 불륜 관계에 있는 ‘도규’, 슈미의 전 애인이자 자유의지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일념으로 가득한 ‘유완’까지. 슈미는 이들과 비밀스럽고도 진솔한 대화(남편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결혼한 것)를 나누며, ‘온전한 자유로의 이행을 통해 빛나는 삶’을 개척하고자 노력해간다. 그러나 연극의 끝 무렵 ‘자유로의 이행’이라는 슈미와 공통된 목표를 가진 유완이, 목표 이루기에 실패하고 사망하자 슈미는 충격에 빠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슈미는 도규에게 통제되는 상황에 처하자 방향성을 잃고 만다. 누군가에게 통제되는 상황을 극도로 혐오했던 슈미는 결국 자살로써 자유의지를 행하고 연극은 막을 내린다. 지금부터 연극 <슈미>를 여러 관점에서 살핌으로써 함의된 바를 파헤치고, 연극이 끌어낸 사유들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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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도에 편입된 사람들, 거기서 다소 벗어나 있는 슈미와 유완


 극중 인물들은 모두 무언가를 원했다. 슈미의 남편 ‘경만’은 아름다운 아내와 정교수 자리를 얻음으로써 사회적으로 좋은 평판을 얻길 원했고, ‘애경’은 사랑이란 명목으로 유완을 곁에 두며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고자 했고, ‘도규’는 슈미의 약점을 잡아 슈미의 집안에서 권력을 갖고자 했다. 이들의 욕망은 ‘사랑’, ‘명예’, ‘권력’ 등으로 각기 다른 듯하다. 그러나 전부 ‘사회에서 이상적이라 여기는 항목들’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들은 보기 좋은 단어들로 자신들의 행동을 포장하며, 사회적인 규격에 맞춰 살아간다는 사실에 완전히 솔직하지는 못 했다. 
 
 그러나 슈미와 유완은 다소 달랐다. 슈미는 자유로운 방식으로 삶을 개척해나가기 위한 도구로써 남편을 이용하고자 결혼을 택했으며,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직설적으로 밝혔다. 또한 유완은 박사 논문을 작성해 호평을 얻긴 했으나, 정교수 자리를 탐하려는 목적으로 작성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유완은 허울뿐인 명예가 아닌 사회적 맥락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끊임없이 탐닉했다. 이는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미공개 본으로 소장하고 있었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이들은 즉, 이상적인 제도와 규격에 편승하지 않는 사고방식을 지녔다. 이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요인들에 대해 탐구’한다는 유완의 박사 논문 주제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슈미와 유완의 관계성과 대화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드러나는데, 이를 설명하기 위해선 잠시 둘의 전사를 언급해야 할 것이다.

 슈미와 유완이 애인 사이였을 당시, 슈미는 유완이 자신의 자유를 침해했다며 총구를 들이밀었다. 유완이 자신과 야외에서 관계를 나누는 사진을 소장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여기서 유완의 해명이 인상적이다. 헐벗고 있어도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는 슈미가 아름다웠기에, 자신의 ‘자유의지’로 포착한 것이란 주장 말이다. 누군가와 관계를 하는 장면을 남기는 것은 상호 동의하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유완의 행동은 상식 밖이며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제도에 편승하지 않는 사고’를 지녔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어낼 수 있기도 하다.
 
 이러한 유완의 일반적이지 않은 특성은 슈미가 유완에게, ‘너는 자연을 사랑하지?’ 혹은 ‘너는 야생을 사랑하지?’ 라고 묻는 데서도 드러난다. 슈미가 파티에 참석한 유완이 ‘머리에 포도 잎사귀를 달고 돌아올 것’이라 거듭 말 한 것에서도 그렇다. 포도 잎사귀를 단순하게 ‘자연을 상징하는 요소’라 해석한다면 이는 유완은 제도에 복속되지 않았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유완과 슈미는 여기에 상당히 집착했고, 높은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유완이 슈미에게 왜 남편과 결혼한 것이냐고 화를 내며 따져 물은 것은, 앞서 슈미가 추구했던 바대로 자유로이 살지 않고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에 편승하려고 한 데 대한 질책임을 알 수 있다. 슈미는 사랑을 전제로 결혼을 한 것이 아니고, 그저 자유의지로 삶을 개척해나가기 위한 도구로써 남편을 이용하고자 했다고 밝혔지만 말이다.
 
 
 

2. 자유로의 이행을 위한 슈미와 유완의 고투. 그러나 이것을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

 
  이렇게 제도에 편입되지 않고 자유롭게 살려는 슈미의 시도는 결말부에서 정점을 찍는다. 권총 자살을 하는 것으로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치명적인 맹점이 존재한다. 엄밀히 말 하면 슈미는 자유의지로 삶을 살게 된 것이 아니라, 죽음을 좌우했다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자유의 이행’이 아니라 ‘포기’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왜 이렇게 됐을까? 슈미가 이렇게 행동을 한 데에는 목표 이루기에 실패한 유완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유완은 자유의지에 대해 탐구를 하는 과정에서 정교수 자리를 탐 내지 않는다고 밝혔다. 또한 본심을 담은 글은 공개하지 않고 그저 소장함으로써 어떤 사회적 대외적 목적 없이 그저 연구 자체에 몰두한 것임을 보여줬다. 그랬던 그는 그 글을 잃어버리고 나서 한순간에 무너진다. 유완은 ‘어떤 것도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없고 오직 나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식으로 사는 듯 보였지만, 결국 어떤 것을 매개해야만 내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거기에 매몰되어버리고 만 셈이다. 그러니 죽음으로써 자유로워진 슈미의 행동은, 삶에서 순전히 자유의지로만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오로지 죽는 것만을 좌우할 수 있다는 사유에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 싶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무인도에서 아무와도 관계 맺지 않고 홀로 살아가지 않는 이상 인간은 누군가와 관계 맺고 관계 속에 복속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니까 말이다. 도규처럼 을의 입장에 있다가 어느 순간 주도권을 잡게 될 수도 있고, 유완에게 자살을 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졌지만 결국 사고사로 생을 마감한 것만 보아도 그렇다. 불가역적인 것이 등장하면 무력해지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 죽음을 제외하고 삶에서 온전한 자유로의 추구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는 자유로의 이행에 성공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도 하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극의 초반과 달라지는, 죽기 직전 슈미의 모습을 살펴야 할 것이다. 
 
 슈미는 극 중에서 내내 남편의 손을 매개해 무언가를 누린 바 있다. 커튼은 네가 열라고 시키거나, 물을 달라거나, 요리를 해달라는 등의 방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만큼은 직접 커튼을 친다. 여기서 무대 배경의 변화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평소 커튼을 전부 치고 싶지 않아하는 슈미의 뜻에 따라, 무대 위에는 내내 빛과 어둠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 그러나 죽기 직전만큼은 빛이 온 집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비로소 누군가의 그림자가 아닌 빛만이 슈미를 감싸게 됐고, 자신의 자유의지로 생을 마감하게 됐음을, 비로소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를 쟁취하게 됐음을 상징하는 셈이다. 
 
 여기서 슈미는 허공에 피아노를 치는 시늉을 한다. 이는 좀 뜬금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기실 위와 궤를 같이하는 요소였다. 이유는 이러하다. 슈미는 연극의 초반에서 계속 피아노가 언제쯤 집에 도착할 것인지에 대해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여기서 피아노의 도착 여부는 자신의 권한 밖이다. 그러나 피아노를 치는 것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영역에 해당한다. 요컨대 피아노가 있든 없든 자기는 피아노를 치고 싶다는 욕망으로 들끓고 있고 그것을 자유의지로 이행하고 있음을, 허공에서의 연주로 보여준 셈이다.
 
 이렇게 자유의지로의 이행에 성공했단 사실은 등장인물들의 복장을 통해서 드러나기도 한다. 슈미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지만, 슈미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다 검은 의상이다. 단순히 슈미의 집을 방문하기 위해 격식을 차리려는 목적만은 아닐 것이다. 극 중에서 도규는 슈미에게 ‘당신은 내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 한다’는 발언을 한 바 있다. 여기서 그림자를 무언가에 복속돼 살아가는 것을 상징하는 모티브라 한다면, 다른 등장인물들은 거기에 해당하므로 그림자와 닮은 ‘검은 의상’을 착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슈미는 흰색 의상을 입었다. 이는 슈미가 방황을 하기도 하지만 종내에는 주체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 성공했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러나 모순적이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자유의지로의 이행을 두고 성공 여부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수 있기도 하다. 극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인간관계로 엮여 있는 사회를 사는 이상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유완도 그래서 본인의 입장을 끝까지 고수하지 못 하고 속절없이 무너졌던 것일 테다. 그러니 양쪽이 전부 답이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다고 보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른다.
 
이는 도규의 대사를 통해서도 추측 가능한 부분이다. ‘때로는 완벽하다 믿었던 진실에도 틈이 있지’, 라는 대사 말이다. 이 대사는 불륜을 저지르는 상황에서 쓰인 것이었다. 그런데 넓게 보면 위와 같은 주제를 암시하는 대사로도 해석할 수 있다. 유완이 결국 자신이 추구하던 바를 이행하지 못 하고 문제에 봉착한 것과, 슈미가 자신이 그토록 믿던 것이 좌절되는 경험을 한 것을 상징하는 대사로 말이다. 

 

 


3. 사랑과 인간에 대한 고찰 

 

 한편 연극을 ‘진정한 사랑’과 ‘인간성’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감상할 수도 있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을 수단으로 이용했다. 공통적으로 이러한 행위를 ‘사랑’이라는 단어로 정의하며 말이다. 그리고 상대에 대한 필요가 부재한 순간 상대를 가차 없이 버렸다. 이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은 ‘사랑이 끝났다’는 말로 달리 표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필요하다’라는 말로 치환 가능할까?
 이는 어쩌면 모두가 외면하지만 모두가 은연중에 인지하고 있는 사실일지 모른다. 일례로 애경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애경은 유완을 자신의 거울처럼 여기며 안쓰러워했고 자신의 입맛대로 고침으로써 유완을 좌우하려는 욕구를 채우고자 했다. 애경은 그것을 사랑이라 칭했고, 유완은 그것을 ‘구원’에 지나지 않는다고 정의했다. 
 그러나 유완의 말대로 그것을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대개 헌신하고 상대방의 모든 것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고 품는 행위를 사랑이라 여기며, 이에 어긋나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 심지어는 나쁜 것으로 치부한다. 연인이나 부부 사이임에도 상대방을 사회가 정의한 이상적인 방식대로 사랑하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라고 간주한다. 도규가 극중에서 올바른 남편상에 해당하는 경만을 ‘착하다’고 손쉽게 정의하고, 그를 이용하는 슈미를 ‘나쁘다’고 한 것에서 드러나듯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상적이든 아니든 간에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을 이행한 것은 맞을 것이다. 극 중에 등장하는 모두가 조금씩은 그런 속내를 지녔고, 그런 점에서 오히려 보편성을 띠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완전히 부정하긴 어려울 것이다. 요컨대 슈미와 유완이 사랑이 아니다, 라고 단호하게 거부한 그것이 기실 추악한 사랑의 민낯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극은 이렇듯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한 원초적 의문을 이끌어냈다.

 다음으로 극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근원적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슈미는 자신이 유완을 구원해냈다는 애경의 말을 듣고는 ‘그러니까 네가 유완이를 인간으로 만들었다는 거네?’ 라고 받아쳤다. 이는 방탕하고 술을 좋아하는 알코올 홀릭으로서의 유완은 ‘인간이 아니다’는 말과 같을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의 ‘인간’이란, 사회적으로 이상적이라 정의되어 있는, 일탈을 하지 않고 ‘제도에 안정적으로 편입돼 있는 인간상’을 형상화하는 것이겠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에 반하는 내용이 등장하기도 한다. 극중 남성 인물들이 파티에 가기 전슈미에게 ‘너도 갈래?’ 라고 묻자 슈미가 ‘아니, 아름다움은 추악함과 어울리지 않아’라며, ‘인간들은 추악하지만 한 명쯤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덧붙인 바 있다. 여기서 ‘한 명’이란 유완을 겨냥한 것으로, 유완이 그들처럼 방탕해지질 않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기인한 대사다. 요컨대 여기서의 ‘인간’이란 방탕하고 윤리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인간상을 상징한다. 이는 위와 상반된다.
 이 역시 두 가지 정의 다 맞을 수도,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이러한 모순적인 존재가 인간임을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르고 말이다. 이는 위에서 슈미가 자유의지를 이루기에 성공했는지를 두고 두 가지 방향의 해석이 가능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런 점에서 연극에서는 총체적으로,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고 모순적인 지점으로 가득한 인간 사회를 시사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4. 무대 연출적 측면에서 바라본 연극

 

 한편 연극을 무대 연출적 측면에서 접근해본다면 어떨까.
 연극이 시작하자마자 슈미는 하얀 식탁 위에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슈미는 언뜻 죽어서 관 위에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식탁의 한 구석에는 꽃들도 있었다는 점이 이러한 인상을 이끌어내는 데 한 몫 했다. 이는 따분하고 지루한 삶을 사는 슈미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음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공교롭게도 슈미는 연극의 결말부, 동일한 장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꼿꼿이 누워 있었던 시작과 다르게, 당당히 일어선 채 말이다. 이 점에서 첫 장면은 결말에 대한 암시인 것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각각 누워 있고 서 있었다는 점은, 자유의지의 존재 여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임을 보여주는 연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또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할 때마다, 슈미가 식탁의 가장자리를 잡고 배치를 다시 하는 연출도 인상적이었다. 이는 단순히 막을 구분하기 위한 장치일 수 있다. 그러나 식탁이 시계 초침이라 해석한다면, 극중에서의 시간이 계속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읽어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극 중에서 내내 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연출을 조명으로 해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식탁을 옮김에 따라 빛이 들어오는 방향도 바뀌었다. 그런 점에서 ‘시점에 따라 빛과 어둠의 위치가 달라진다’는 것으로도 해석 가능했다.
 

 

 


5. 원작과의 차이점

 

 <슈미>는 19c에 쓰인 <헤다 가블러>라는 희곡을 원작으로 하며, 서울에 사는 슈미를 주인공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원작에서 헤다는 누군가 자신에게 남편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말을 하면, 다소 예민하게 받아들이며 ‘사랑하고 있다’는 표현을 쓰는 것을 꺼리고 낯설어 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역설을 하기보다 ‘그렇게 말 하는 것은 싫어요’라는 식으로 유하게, 자신의 마음을 에둘러 표현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슈미는 자신은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직설적으로 말 한다. 보다 자신의 욕망에 투명한 여성 캐릭터로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또한 슈미는 남편을 사랑해서가 아닌 필요에 의해 이용한다는 점에서, MZ세대가 사랑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반영한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요컨대 보다 자유롭고 과감한 연애 방식을 추구하는 요즘의 세태를 반영했다는 이야기다. 
 
 사랑을 바라보는 요즘의 추세를, 잠시 연애를 주제로 하는 예능을 일례로 가져와 언급해보고 싶다. 예전에는 연애 예능에서 <짝>이나, <하트시그널>, <썸바디> 등 상대방과 연애로 발전하기 이전의 단계에서 갈팡질팡하고 결국 최종선택을 하며 막을 내리는 방식의 ‘안전하고 안정적인 사랑의 전형’을 선보였다. 그러나 요즘은 <환승연애>, <체인지 데이즈>, <돌싱걸즈>와 같이 완전한 사랑이라는 환상이 깨어지는 순간 벌어질 수 있는 다이나믹한 사랑들을 다루는 경향이 있다. 이는 사랑을 바라보는 관점이 보다 개방적으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연극은 이러한 현대 사회의 직설적이고 도발적인 사랑의 방식을 그대로 반영해냈다.
 
 마지막으로 원작에서 헤다의 남편인 여성 혐오적인 시선으로 헤다를 바라보고 그 틀에 맞추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슈미에서는 테스만 역할을 한 경만이 헤다를 통해 아름다움을 탐닉하려는 경향을 보이긴 했으나, 여성 혐오적인 발언은 최대한 거세한 채, 은연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요컨대 각색 과정에서 페미니즘 시각을 반영하고 문제적인 발언을 거세하는 방식의 시도가 엿보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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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총평

 
 <슈미>는 삶에 대해 보다 도발적이고 직설적인 시선을 던지며 극을 전개해나갔다는 점에서 신선하게 다가왔다. 다수의 대사들에서 개방적인 방식을 추구하는 슈미의 모습이 드러났는데, 공감이 되면서도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슈미를 보며 외면하고자 했던 감정과 불현 듯 마주하게 돼서 그렇다. 이는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사랑’과 ‘인간’에 대해 깊이 탐구하고, 다양한 의문들을 던져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무엇보다 슈미의 캐릭터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탐닉해갔다는 점에서 좋았다. 슈미의 발언들이 용기 있고 진취적으로 느껴졌다. 유완에게 자살을 종용하는 대목은 어쩌면 기이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극의 메시지를 관통하는 것이기도 하고 슈미의 입장을 차례차례 따라가며 감상했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깊은 사유를 끌어낸 작품이었다.
 
 
[추예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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