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방의 '죽음'인지, 아니면 나방의 '삶'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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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작가를 보고 두 가지의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우선은 버지니아 울프라 너무 기대되는데 소재가 나방이라니 조금 거부감이 드는군.’ 하지만 한편으로는 과연 작가가 징그러운 나방에 대해 어떤 새로운 시선을 보여줄지 호기심이 생겨 글을 읽어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짧은 글은 정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누가 누구와 불륜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믿을 수 없는 기괴한 일들이 벌어진 것도 아닌데 이 글을 읽고 나니 마치 한 판 사투를 벌인 느낌이었다.
이 수필의 제목은 the ‘death’ of the moth이지, the ‘life’ of the moth가 아니다. 이 수필의 마지막 부분 역시 ‘death’의 힘이나 결과에 대해 서술하며 끝난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수필을 읽고나서 삶에 대한 힘을 얻었다. 나방, 아무도 봐주지 않고 어쩌면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존재가 치열하게 삶의 사투를 벌이고,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에서 우리의 삶의 모습을 본 것 같았다. 그래서 한 문단 한 문단 점점 마음을 졸이고 마치 내 이야기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읽어나갔다. 필자는 영어로 이 작품을 읽었지만 한글 번역본도 존재하니 관심이 간다면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이다.
1문단 - 낯설지만 익숙하게
만약 이 수필에서 서술자가 나방에 대한 과도한 연민이나 애정을 드러냈다면 이 수필을 다 읽기도 전에 거부감을 느껴 읽기를 관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술자는 보통의 우리가 그렇듯이, 이 작은 나방에 대해 덤덤하게 서술하며, 심지어는 머릿속에서 나방을 잠시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렇기에 우선 서술자의 시각에서 나방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런데 또 한편 작가는 중간 중간 나방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을 집어넣어서 독자가 조금은 낯설게 느끼도록, 하지만 그것에 곧 익숙해지도록 한다. 예를 들면 1문단에서 나방에 대한 묘사를 읽는데, 아직은 나방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아 징그러워’하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읽는 중간 중간 ‘seemed to be content with life’, ‘vigour’등의 긍정적인 느낌의 힘찬 말이 등장했고, 이것은 ‘음? 내가 방금 뭘 읽은 거지?’하는 작은 충격을 가져다주고 다시 그 앞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게 만들었다. 이러한 낯선 묘사는 수필 내내 계속되어서, 수필을 읽으며 참신하고 통통 튀는 단어들을 발견하는 재미도 같이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어떤 한 단어나 한 마디 뿐만 아니라, 아예 어떤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색달라서 충격을 안고 바라보기도 했다. 1문단 끝 부분에서 까마귀 떼가 나무 위를 날아다니다 나무 위에 내려앉는 모습, 또 일제히 날아가는 모습에 대한 묘사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festivities’, ‘thousands of black knots’, ‘net’과 같은 단어들을 통해 까마귀 떼의 행동을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하는데, 일상적으로 일어나지만 잊고 있었던 기괴한 형상들을 자꾸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 같아서 매우 충격적이었다.
2문단 - what he could do he did
1문단이 어떤 배경에 대한 묘사, 잠시 동안의 나방에 대한 언급이었다면 2문단에서는 나방이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우리는 그 작은 나방에 대해 기묘한 동정심을 갖기도 하고 약간 불쌍하게 느끼기도 하는데, 그 나방은 ‘pleasure’, ‘zest’, ‘enjoy’등과 같은 단어들과 함께 즐겁게, 열정적으로 그냥 날아다닌다. 그리고 여기에서 ‘That was all he could do, in spite of the size of the downs, the width of the sky, the far-off smoke of houses, and the romantic voice, now and then, of a steamer out at sea’라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 부분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었다. 첫 번째로는 이 드넓은 세상에서 나방은 자기 방식대로 마음대로 날아다녔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in spite of’가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 드넓은 세상이 나방에게는 좁은 공간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 하늘의 넓이, 이 집들과 이 바다의 크기에도 불구하고 나방은 날아다녔다고 바라보는 것이 맞는 해석이라면 정말 참신한 표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문단을 읽어가며 어느새 이 나방의 삶에 빠져들었는데, 아까 서술자의 시각에서 나방의 삶을 봤다면 이제는 나방의 입장에서 그의 삶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리고 2문단에서 가장 깊숙이 다가온 말은 ‘What he could do he did.’ 였다. 이 말을 읽고 잠시 많은 생각을 했다.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그는 할 수 있는 것은 했다’라는 말이 내 삶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 나방도 저렇게 열심히 살아가는데, 나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서부터 ‘내가 앞두고 있는 수많은 기회들을 할 수 있는한 열심히 잡아야겠다, 적어도 나방만큼은 해야 하지 않겠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2문단의 마지막 말도 좋았다. ‘he was little or nothing but life.’ 작은 존재이지만 삶이라는 그 한마디에서, 작은 존재이지만 그 가치는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았다. 단지 나방에 대한 묘사일 뿐인데 이상하게 나를 응원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3, 4문단 – 허무함 속의 노력
3문단은 나방과 우리의 삶을 비교하고 연관시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나방에 대해 ‘pity’를 갖게 된다. 그것은 나방의 삶에 공감해서가 아닐까? ‘true nature of life’를 보면서 ‘나도 저렇겠지’, 혹은 나방에게서 내 처지를 비추어보고 무언가 나의 삶에 대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이제는 아예 나방을 응원하는 편에 섰는데, 나방은 4문단에 들어서 죽음과 마주하기 시작한다. 4문단은 인생의 허무함 혹은 부질없음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듯했다. 나방은 아무도 봐주지 않는데, 심지어 서술자도 깜빡 잊어버리는데 끊임없이 다리를 휘젓고, 힘들면 쉬었다가 또 온 힘을 다해 휘젓는다. 이때에는 나방이 빨리 원하는 바를 이루었으면 하고 응원했다. 어쩌면 나방에게 감정이입을 한 것 같기도 하다. 이 문단을 읽고 시지프 신화가 생각나기도 했다. 산꼭대기로 돌을 굴려 올리고 또 올리는 시시포스의 삶이 우리의 삶인 것처럼, 부질없어 보이는 노력을 계속하는 나방의 삶도 우리의 삶처럼 보였다. ‘start again’, ‘helplessness of his attitude’를 계속하는 나방을 보고 서술자는 연필을 들어 그를 도와주려 하지만 갑자기 생각한다, ‘죽음’이라는 것을. 그리고 연필을 내려놓는다. 어쩌면 4문단이 가장 우리의 인생을 잘 보여주는 문단이라 생각했다. 죽음 아래에서 모든 것이 의미 없어 보여도 열심히 아등바등 복작대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우리의 인생이 이 한 문단에 표현된 것 같았다. 그리고 여기까지 읽으면서 느낀 것은, 단어 하나하나가 생동감이 넘치는 것 같았다. 사용한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것 같기도, 톡톡 튀어 오르는 것 같기도 해서 그런 읽는 즐거움도 있었다.
5문단 –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5문단은 이 수필의 하이라이트 같은 느낌이었다. ‘stillness and quiet’, ‘oncoming doom’등 죽음이 점점 옥죄어오는 모습이 그려지지만, 그럼에도 나방은 ‘power’, ‘extraordinary efforts’, ‘last protest’ ‘gignatic effort’를 보여준다. 그리고 나중에는 결국 원하는 바를 이루는 모습이 드러난다. 이 문단에서 나방의 위대함을 느낀, 혹은 인간 삶의 위로를 얻었던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러한 노력을 결국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부분이다. 나방도, 인간도 결국 자신의 삶에 있어서는 자기만 치열한 사투를 벌이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종종 있다. 평소라면 굉장히 외로운 기분을 느끼겠지만, 서술자가 혹은 버지니아 울프가 이러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주고’ 그것을 글로 표현해주기에,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치열하게 사투를 벌이기에 나방의 삶이, 인간의 삶이 더 위대하게 느껴졌다.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고 알아주기 때문에 노력하는 것은 좀 작위적이고 순수한 열정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이렇게 나방이 치열하게 살아갈 때 작가는 다시 연필을 들어올린다. 하지만 이 순간, 나방은 죽음을 맞이한다. 삶이 낯설고 이상한 것처럼 죽음도 이상하다. 서술자는 연필을 내려놓는다. 마지막 말에서는 나방이 이미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방은 죽음이 자기보다 세다고 말하는 듯 했는데, ‘O yes’에서 나는 아무렴, 알지, 당연하지, 이런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이 마지막 문장도 우리의 삶과 너무나 관련이 있는 듯했다. 인간은 누구나 당연히 죽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 그러나 이렇게 죽을 것을 알면서도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부단하게 움직이며 살고 싶어 한다는 것. 알베르 카뮈가 말한 ‘반항’ 개념이 생각나기도 했다. 죽음이라는 부조리에 맞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수필은 이렇게 ‘죽음’으로 끝을 맺었는데 글을 읽으며 ‘삶’에 대해 더 깊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비록 결말은 나방의 죽음이었으나 나방의 행동을 통해 내 삶에 대한 힘을 얻고 위로를 얻는 기분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짧은 순간에 나방의 삶의 에너지를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책을 다 읽은 나에게 긍정적으로 남았다.
사소한 부분일지 모르지만, 서술자가 자꾸 연필을 들었다가 놓았다가 하는 부분을 읽으며 이것이 뭔가 작가로서의 고뇌를 드러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방을 도와주려, 혹은 삶의 열정적인 순간에 연필을 들어 올렸다가도 또 죽음이 있어 다 부질없는 것 같아 연필을 내려놓는 모습에서 어쩌면 작가의 삶과 죽음에 대한 고뇌, 자신의 작가로서의 삶에 대한 고뇌가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도 했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삶과 죽음, 노력에 대한 고민을 한다. ‘나방’이라는 생소한 소재를 통해 삶과 죽음을 내밀하게 들여다본 이 글이 오늘날에도 누군가에게 작은 날갯짓이 되기를 소망하며, 글을 마친다.
[정유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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