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드디어 수면 위로 올려낸 콘텐츠들 - 문콘이 EP.7 [문화 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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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 3달 만에 돌아온 문콘이
약 3달 만에 돌아온 문콘이 EP.7. 이번 편에서는 그간 다루고 싶었지만 다루지 못했던 콘텐츠들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한 달에 한 번 나오는 문콘이가 왜 이제야 돌아오게 되었냐 물으면, 마음에 드는 글을 내놓고 싶다는 욕심과 그러지 못한 현실이 충돌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지난 연말은 콘텐츠로 가득한 풍요로운 삶을 보냈다. 문콘이에 녹여낼 소재는 충분했고, 쓰고 싶은 주제 또한 분명했다. 그러나 순조로웠던 시작과 달리 중반부터 글이 흐지부지됨을 발견했다. 기존의 에피소드와는 분명히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무언가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문콘이에 설정해둔 기준이 높다 보니 이에 대한 딜레마에 빠진 것 같다.
이러한 연유로 스트레스를 받아선지 문콘이만 쓰려고 하면 글이 엎어지기 일쑤였다. 언제부턴가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마감 기한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초조해졌던 것 같다. 그래서 스스로 장기휴가를 내리고 몇 달간 이에 대한 압박을 버린 채 다른 글에 집중했다. 이제 충분히 쉬었으니 묵혀왔던 콘텐츠들을 수면 위로 올릴 생각이다. 진작 꺼내주지 못해 미안한 감정이 들었던 콘텐츠들을 지금부터 소개해보겠다.
Music
: 일상을 영화의 한 장면으로,
사카모토 류이치의 Merry Christmas Mr. Lawrence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의 메인 OST. 영국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을 정도로 영화보다 음악이 더 유명하고, 그만큼 많은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곡이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합주가 돋보이는 어쿠스틱 버전이 가장 인기를 끌었고, 나 역시 이를 통해 그의 음악에 흠뻑 빠져들었다.
영화는 사카모토 류이치와 데이비드 보위가 공동 주연을 맡은 작품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자와섬의 일본군 포로 수용소에서 극한 상황에 놓인 인물들의 상극을 그린 이색적인 휴먼 드라마. 일본 군인과 서양인 포로와의 관계를 흥미롭게 묘사한다."라고 소개된다.
이 음악은 크리스마스 플레이리스트를 듣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밝고 통통 튀는 느낌의 캐롤과 달리 차갑고 서정적인 느낌의 연주곡에 색다름을 느껴 다시 재생했던 것 같다. 이번에야 제목을 처음 알게 되었을 뿐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익숙한 곡이었다. 그래서 영화음악의 거장으로 불리는 그의 대표곡들을 한 번씩 들어봤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역시 이 곡이었다.
보통 과제를 할 때 음악을 함께 듣는 편인데, 이를 접하게 된 계기 역시 그러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타이핑을 하다가 'Merry Christmas Mr. Lawrence'의 첫 음을 듣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제목은 "메리 크리스마스"라며 누군가를 축복하는 듯하지만, 이와 반대되게 어둡고 쓸쓸한 기운이 내려앉은 선율에 어떤 사연이 존재하는지가 궁금해졌다. (영화를 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아마도 오지 않을 혹은 기쁘지 않을 크리스마스를 미리 축복하는 듯 보인다.)
음악은 단선율로 시작해서 한 음 한 음이 조화롭게 쌓이고, 이내 바이올린의 부드러운 활시위가 더해지면서 아련하고 슬픈 분위기가 극대화된다.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속도가 빨라지며 세기가 높아지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에 드라마틱한 장면이 눈앞에 연출된 기분이다. 마치 약 5분 동안 한 영화의 기승전결을 모두 경험한 듯하달까?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 이 음악을 들었을 때 무언가 슬픈 영화의 한 장면으로 뛰어든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먹먹한 감정이 휘몰아쳤던 곡이기에 긴 여운에 빠지고 싶을 때 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내가 추천한 음악이 마음에 들었다면 비슷한 결이면서도 또 다른 매력이 있는 사카모토 류이치의 'Opus', 'A Flower is not a Flower'도 한번 들어보길 권한다. 자신이 영화 속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며 감상하면 또 다른 감성과 느낌을 선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Musical
: 사랑스러움을 듬뿍 묻힌 극, 레드북
"난 슬퍼질 때마다 야한 상상을 해"
신사의 나라 영국, 그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이었던 빅토리아 시대. 약혼자에게 첫 경험을 고백했다가 파혼당하고 도시로 건너온 여인 안나.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첫사랑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하루하루 굳세게 살아간다. 그런 그녀 앞에 어느 날 신사 중의 신사 브라운이 찾아오고 안나는 의도를 알 수 없는 브라운의 수상한 응원에 힘입어 여성들만의 고품격 문학회 ‘로렐라이 언덕’에 들어가 자신의 추억을 소설로 쓰게 된다. 하지만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되던 시대, 안나의 소설이 담긴 잡지 '레드북'은 거센 사회적 비난과 위험에 부딪히게 되는데...
- 시놉시스
뮤지컬 <레드북>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야한 글을 쓰는 걸 억압받던 '안나'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레드북'을 세상에 출간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려냈다. 2018년 초연 후 2021년 재연된 <레드북>은 제7회 예그린뮤지컬어워드 4관왕(극본상, 작곡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에 이어 최근 제6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도 4관왕(작품상, 여우주연상, 연출상, 음악상)을 받을 정도로 잘 만든 창작 뮤지컬이다.
이는 작년 8월 중순에 관람한 극으로, 이제야 리뷰하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만족스러웠던 뮤지컬이다. 코로나 19의 여파로 예매 취소를 당하는 등 어려움이 있었으나 마침내 원하는 캐스팅으로 관람에 성공했다. 그전부터 돌려 듣던 <레드북>의 대표 넘버인 '나를 말하는 사람', '사랑은 마치', '나는 야한 여자'를 실제로 듣고야 말겠다는 집념이 통했던 것 같다.
2021/8/19 오후 7시
사랑스러움을 듬뿍 묻혔다고 표현했듯, 어느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게 없는 극이었다. 글 쓰는 괴짜 '안나'와 보수적인 신사 '브라운'의 알콩달콩한 케미는 물론, 관객들의 웃음 비중 1순위를 담당했던 신사 듀오와 거침없는 입담이 매력적인 로렐라이 언덕의 여인들 덕분에 극 속으로 푹 빠져들었던 것 같다. 뚜렷한 서사와 개성이 입혀진 캐릭터들과 이를 맛깔나게 연기하는 배우들에 더욱 유쾌한 극이 탄생했다는 생각이다.
말하는 대로 그림이 그려지는 연출, 빅토리아 시대를 생생하게 재현한 헤어와 의상, 무대를 빈틈없이 채워주는 앙상블 등 그 밖에도 칭찬할 만한 요소가 많았다. 물론 가장 좋았던 건 안나가 이야기하고 싶은 바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넘버들이었다. '사랑은 마치'는 율동 같은 동작(브이를 접었다 펼치는)과 시적인 가사가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졌고,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은 주체적인 인물을 표현한 가슴을 울리는 가사와 극적인 구성으로 벅찬 감동을 주었다.
사랑은 마치 마치
오늘의 날씨처럼
흐렸다 환해지고
추웠다 따뜻해져
사랑은 마치 마치
노을진 하늘처럼
노랗게 물들었다
빨갛게 피어나죠
- '사랑은 마치' 중
내가 나라는 이유로 죄가 되고
내가 나라는 이유로 벌을 받는
문제투성이 세상에
하나의 오답으로 남아
내가 나라는 이유로 지워지고
나라는 이유로 사라지는
티 없이 맑은 시대에
새까만 얼룩을 남겨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중
여기서 아이비가 안나와 혼연일체 된 듯 온몸을 떨면서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이라고 부르짖는 장면에서 엄청난 전율을 느꼈다. 자신의 성별로 인해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은 안나가 목 터질 듯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데 순간 숨이 멈췄던 것 같다. "정답이 정해진 사회 속 자신만의 해답을 찾는 과정"을 보여주는 뮤지컬이라고 소개하는 이유를 저절로 깨달았다.
스스로 오답을 자처한 안나는 글을 통해 냉정했던 바이올렛 부인을 웃음 짓게 했고, 로렐라이 언덕의 여인들에게 끝없는 영감을 주었고, 사랑이 식은 사람들에게 열정적인 사랑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한 점에서 '새까맣게 얼룩진 시대 속 티 없이 맑은 이슬'이라고 봐야 더 정확한 표현일 듯하다.
물론 그녀가 만든 레드북은 출간 후 많은 사랑을 받으며 마무리되지만, 그 후 책에 대한 재판이 없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내가 상상한 <레드북> 결말 속의 안나는 여전히 레드북 시리즈를 출판하고 있으니 괜찮을 것으로 생각한다.
또 다른 주역으로서 귀여움을 담당하는 브라운은 착한 심성을 지녔음에도 뿌리 깊은 고정관념으로 안나에게 편견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녀의 당찬 신념과 소신 있는 태도를 보며 서서히 인식을 바꿔나간다. 단순한 연인 관계를 넘어서 서로가 배우고 성장함으로써 좋은 변화가 나타난 점이 인상적이었다.
안나가 치열하게 싸울 수밖에 없던 이유와 브라운이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던 이유는 <레드북>의 배경에 있다. 극 속의 빅토리아 시대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만연했다. 여성은 남성과 달리 아무렇지 않게 희롱당했으며 남편을 내조하는 게 평생의 업보로 여겨졌다. 특히 결혼한 남성은 모든 죄(바람, 강간, 근친)를 다 저질러야 이혼을 당하지만, 결혼한 여성은 바람으로 보이는 행동 한 번으로도 이혼을 당하는 위치에 속했다.
이렇게 끔찍한 상황 속 수위 높은 용어와 선정적인 안무의 사용은 굉장히 파격적으로 다가왔다. 마치 보수주의를 깨겠다는 안나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의 도전정신이 관객들에게 전달된 느낌이었다. 극의 메시지가 명확해서 좋았던, 그래서 더욱 사랑스러웠던 <레드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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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돌아온 문콘이이기에 그만큼 애지중지해온 콘텐츠들을 소개해보았다. 작년의 기록이 이번 년으로 돌아와 재창조되니 쓰면서도 설레고 신기했던 것 같다. 내가 이들을 좋아했던 이유가 다시금 떠오르면서 Merry Christmas Mr. Lawrence와 레드북에 대한 새로운 기억이 덧붙여졌다. 그럼 언제나 흥미로운 '콘텐츠를 발굴하고 추천하는 일'을 이어나가기 위해 더 많은 콘텐츠를 접하러 떠나보겠다. 이번 문콘이는 기다린만큼 더욱더 만족스러웠길 바라며 마친다.
[최수영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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