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여전히 유효한 질문 - 라스트 세션

글 입력 2022.01.25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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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2라스트세션_메인포스터_페어(사진제공_파크컴퍼니).jpg

 

 

"리스본의 지진은 볼테르에게서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이라는 질병을 제거하기에 충분했다."

 

- 테오도르 아도르노

 

 

1755년 11월 1일, 종교계와 철학계를 뒤흔든 사건이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발생했다. 모든성인대축일에 벌어진 대규모 지진은 자그마치 도시 내 건물 85%를 붕괴시켰다. 장장 5분간 지속된 진동으로 삽시간에 아비규환이 되어버린 현장 앞에서 신을 향한 사람들의 믿음 또한 순식간에 박살났다. 역사상 최악의 재난은 숱한 논쟁 속에서 꿋꿋히 존재감을 발휘해온 신정론의 위기를 불러일으킨 대표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그로부터 약 180년 뒤, 신의 존재를 다시금 의심하게 만드는 인류 최악의 사건이 발생한다.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이틀 뒤인 9월 3일, 제60대 총리 네빌 체임벌린의 연설을 필두로 영국은 독일에 전면전을 선포하고 전쟁에 돌입한다. 전쟁의 서막을 알린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자그마치 3만명의 사상자를 발생시켰지만, 이는 홀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인류 최악의 사건 결과와 비교했을 때 지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판가름하기 어려운 재앙이라는 점은 동일하지만, 앞선 사건의 주체가 초자연이었다면 후자는 영락없이 인재人災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여전히 무마하기 어려운 피해를 끼친 역사적 재난은 모든 생명체를 주관하고 탄생시킨 창조주를 향한 창조물들의 짙은 탄식을 유발했다. 무기력하게 방관만을 일삼는 저 하늘의 존재를 놓고서 다음과 같은 문제적 질문이 사람들의 머릿 속에서 제기되었다,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단 한줄 짜리의 질문은 무수히도 많은 지성인들을 혼란의 중심 속으로 끌어들였다. 

 

역사상 가장 큰 논쟁 거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신의 존재 유무라는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위대한 사상가들에게도 섣불리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둘러싼 갑론을박이 시대를 불문하고 지속되었다. 특히, 우리의 이성관을 뒤흔든 끔찍한 사태가 발생할 때 눈에 보이지 않는 어느 방관자의 존재 여부가 다시금 고개를 들이밀면서 뜨거운 토론 주제로 자리매김했다. 상술한 리스본대지진에서의 이해하기 어려운 초자연적 재난이 그러했고,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나서 유럽을 피로 물들인 학살 사건이 바로 그와 같았다. 

 

신의 존재는 그 자체로 특정 분야의 존립을 뒤 흔드는 막대한 논제거리다. 신이 존재한다면 이성의 독보적 자리를 차지하는 과학 분야에 커다란 경종을 울릴 것임에 다름이 아니며, 예측하기 어려운 그 모든 인간사는 결국 신의 뜻이라는 거대한 자장 안에서 운명이라는 명칭을 부여 받기에 이른다. 반면, 신의 존재가 거부된다는 건 수많은 종교인들의 믿음이 허구를 향했다는 허무한 결론으로 귀결된다. 그 어떤 답변을 내놓던 간에 그로 인한 여파는 상상 그 이상의 것이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신의 존재는 결코 손 쉬운 결과를 낳지 않는 엄청난 난제다.

 

 

22라스트세션_프로필(사진제공_파크컴퍼니).jpg

 

 

그런 의미에서, 연극 <라스트 세션>의 존재감은 그 자체로 유별나면서도 독창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문제작이다. 아맨드 M. 니콜라이의 저서 『루이스 vs. 프로이트(THE QUESTION OF GOD)』에서 얻은 영감을 토대로 쓰여진 작품은 시기적으로 만날 일이 없는 두 지성인을 무대 위로 불러내며 신과 종교에 대한 도발적인 토론을 끊임없이 야기한다. 20세기의 무신론의 시금석으로 불리는 ‘프로이트’와 대표적인 기독교 변증가 ‘루이스’가 직접 만나 논쟁을 벌인다는 탁월한 상상에 입각한 2인극은 신에 대한 물음에서 나아가 삶의 의미와 죽음, 인간의 욕망과 고통에 대해 한치의 양보 없이 치열하고도 재치있는 논변을 쏟아낸다. 영국이 독일과의 전면전을 선포하며 제2차 세계대전에 돌입한 1939년 9월 3일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두 남자의 논쟁은 일촉발의 기운이 감돌던 그 당시 유럽 풍경을 재현이라도 하듯 서서히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정신분석학의 권위자이자 도발적인 주제들로 많은 사람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프로이트' 교수(배우 신구/오영수)는 신과 관련해서 자신과 정반대의 위치에 서있는 'C.S 루이스'(배우 이상윤/전박찬)를 저택으로 초대한다. 한때는 자신과 같이 무신론을 믿었던 C.S 루이스의 변심을 듣고 싶었다는 노老학자의 호기심에서 촉발시킨 세기의 만남은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다. 여유가 넘치는 가운데 예측 불허한 타이밍에 건네는 프로이트의 날카로운 지적 앞에서도("아퀴나스도 자살은 비난하면서도 사형은 찬성하지 않았나?"), 옥스포드 출신의 총기가 넘치는 청년은 기가 꺾이기는 커녕 상대의 주장을 역으로 활용하며 자신의 요지를 견고히 하기에 이른다("하나님과 사탄이 대결하는 이야기에서 위안을 얻으셨다고요?").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 작품 속 갈등 양상은 외관부터 화법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게 대조적인 와중에도 같은 시간대를 공유함으로써 형성된 두 남자의 묘한 공감대를 통해 더욱 특별해진다. 

 

프로이트는 세속적인 측면을 결코 숨기지 않으며 인간이라면 응당 추구할 수 밖에 없는 감각과 욕구에 입각한 주장들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그 과정에서, 프로이트의 기라성 같은 학문적 성과들(Ex.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이 대거 활용된다. 반면, 인간이라면 응당 지킬 수 밖에 없는 윤리와 신앙적 측면에서 프로이트와 대조적인 형태의 주장을 내세우는 C.S 루이스는 다소 노골적일 수 있는 프로이트의 주장에 논리정연하게 반박한다. 더불어, 죽음을 목전에 둔 프로이트와 한창 문학계에서 활약 중인 C.S 루이스의 세대 차이는 신을 둘러싼 신구세대의 대립을 연상시킨다. 서재와 한 몸을 이루는 듯한 프로이트의 브라운 수트는 공간과 동일한 컬러를 이룸으로써 굳건히 자리잡은 그의 무신론적 시선을 상기시킨다. 반면, 시종 점잖은 태도를 유지하는 가운데 누구도 섣불리 앉기 어려운 프로이트의 의자를 잠시나마 대신 차지하는 C.S 루이스의 동선은 상대의 주장을 강하게 반박하는 신세대의 보이지 않는 속내가 투영되있다. 

 

오스트리아 출신으로서 영국으로 이주하며 자신의 마지막 삶의 종착지에 도달한 프로이트는 죽음에 초연한 자세로 사후 세계는 없음을 단호히 주장한다. 반면, 조국을 위해 과거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영국 토박이의 C.S 루이스는 신의 존재를 강하게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되려 강한 신념을 나타내는 근거 임을 상상 속의 존재 유니콘에 빗대서 설명한다. 더불어, 상대를 찍어 누르는 프로이트의 강렬한 화법은 누가 들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직관적 특성을 지녔다. 반면, 상대의 지적을 반박하고 이를 토대로 자기 주장을 전개시키는 C.S 루이스의 변증 화법은 프로이트의 그것과 강렬한 대비를 이룸으로써 두 남자의 첨예한 대립을 부각시킨다. 그 과정에서, 프로이트와 C.S 루이스의 대조적 특징들을 몸소 체현한 두 배우의 열연은 흡사 그러한 현장이 실제 발생한 것 같은 생동감을 작품에 적극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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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라스트 세션>, 2022년

 

 

"우리는 평온한 길을 갈 때는 신을 찾지 않지요. 철로 위에 자동차가 멈춰서고 기차가 날 향해 달려오는 걸 볼 때에야 비로소 신의 이름을 부릅니다. 고통은 '도구'가 아닐까요?"

 

- C.S 루이스

 


두 남자의 설전에 불꽃을 지피우는 건 작품의 시기적 배경인 2차 세계 대전의 비인간성이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건들이 속속들이 발생했던 끔찍한 전쟁은 양심이라 일컫는 인간의 도덕률에 관해서 다시금 숙고하게 만든 대표적인 역사적 재앙이었다. 자신을 키워준 부모로부터 일방적으로 전달 받은 후천적 학습 효과로서, 사회 혼란을 막기 위한 행동 양식에 불과하다고 프로이트는 언급한다. 그와 달리, C.S 루이스의 양심은 누구나 다 갖고있는 선천적 기질로서 선과 악을 태어난 그 순간부터 구별할 수 있음을 강하게 설파한다. 성선설의 경향이 뚜렷한 그의 경직된 주장에 프로이트는 냉소가 짙은 농담을 던진다, "아하, 그건 기하학적 도덕률인가?" 하지만, 그의 날카로운 농담은 과거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어 기제임이 곧이어 드러난다. 

 

인간의 도덕률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두 남자의 토론은 자연스럽게 이 모든 사태를 바라보기만 한 신의 방관자적 태도로 넘어간다. 그 과정에서, 전쟁의 참상에 따른 피해자들의 심정은 누가 보상하는가에 관하여 프로이트는 자신의 딸 '안나'가 게슈타포에 의해 연행될 뻔했던 과거를 언급하며 신의 부재를 강조한다. 오스트리아에서 겪은 나찌의 만행 때문에 고국을 벗어나 영국으로의 이주를 결심한 프로이트의 과거는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피해 받은 사람들의 억울한 심정을 대변한다. 이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음에도 일찍 세상을 떠난 자신의 둘째 딸 '소피'와 손자 '하이넬레'의 죽음을 프로이트가 처절하게 토로하는 장면에서 감정이 극으로 치닫는다. 

 

프로이트는 말한다, "그래서 히틀러가 망치를 휘두르는 동안 신은 그 망치질에 누가 살아남을지 기다리고 있는거구만". 전지전능하다는 호칭과 별개로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은 채 억울한 피해자가 양산되는 과정을 그저 지켜보는 그를 향한 프로이트의 날선 일갈에 C.S 루이스는 정중히 대꾸한다. 물론, 자신의 절친을 전장에서 잃을만큼 프로이트 못지 않게 전쟁의 참혹함을 실감했던 C.S 루이스 역시 이를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이와 같은 사태들이 결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고 그는 단호히 언급한다. 고난에는 이유가 있다는 확신과 함께 그는 말한다, "고통은 '도구'가 아닐까요?" 치열하게 오가는 두 남자의 대화로부터 작품은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들기 시작한다. 물론, <라스트 세션>의 최종 목적지는 애초부터 뚜렷한 정답이 아닌, 또 다른 질문에 전적으로 기인한다.  

 

흥미로운 건 전쟁, 그리고 죽음과 관련된 두 남자의 실제 행동이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물론, 스스로의 생명은 오직 자신이 주관할 수 있다는 신념과 함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하지만, 오작동으로 발생한 공습경보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신의 책상 밑으로 숨어드는 그의 모습을 C.S 루이스는 놓치지 않고 지적한다("죽음을 두려워하시지 않는 분 치고는 너무 빠르게 책상 밑으로 숨으시던데요?"). 더불어, 여러 국가에서 추앙하는 신적 존재를 형상화한 조각상들은 무신론자의 서재에서 쉽게 보기 힘든 미장센임을 C.S 루이스는 또한 흥미로운 시선을 견지한 채 지적한다. 물론, 한시도 여유를 잃지 않는 프로이트는 자신의 수집품임을 언급하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다. 

 

지적하는 자와 이를 맞받아치는 주체가 시시각각 변함으로써 작두 남자의 갈등 양상은 보다 입체적으로 변모하며 전개된다. 직관과 논리의 층위가 고르게 분포된 작품의 서사는 지성인들의 대화를 엿들는 과정에서 지적 교양을 쌓는 듯한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저마다의 전문 분야인 정신분석과 종교를 넘어 철학과 문학 그리고 신화로 뻗어나가는 다채로운 논거들을 통해서 전개되는 과정에서 팽팽한 긴장을 적재적소로 느슨하게 만들어 주는 지성인들의 농담은 특기할 만하다. 그 자체로 웃음을 야기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뼈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때로는 상대의 저서에 서술된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역으로 이용하는 과정들은 작품의 지적 분위기를 더욱 고취시키는 또 다른 매력 포인트다. 

 

하지만, 긴장과 느슨함을 넘나드는 두 남자의 논쟁은 프로이트의 고백과 함께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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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라스트 세션>, 2022년

 

 

"나는 진실을 발견했지! 삶이 끝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진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작품은 단순히 신의 존재를 언급하는 단계에 국한되지 않고서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재단할 수 있는 가에 관한 생명권의 논쟁으로 돌입하며 인간의 삶을 둘러싼 여러 모티브들로 시시각각 토론 주제를 교체한다. 그 과정에서, 첨예하게 대립되는 작품의 전개 양상은 예측하기 어려운 흐름 속에서 시시각각 보는 이의 머릿 속을 헤집어 놓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물론, 입으로 건네는 주장과 몸으로 부딪치는 실재적 경험 사이의 간극을 구태여 좁히는 억지스런 시도를 하지 않는다. 이는, 평생을 입으로 먹고 살던 프로이트가 입으로 고통 받는 과정을 C.S 루이스가 곁에서 지켜보는 씬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구강암으로 인해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 힘겹게 투병 중인 프로이트는 자신의 주치의 '막스 슈어' 박사에게 안락사를 요청한다. 죽는 그 순간만큼은 편안하게 세상과 작별하고 싶다는 그의 소망은 자신의 생명은 스스로의 주관 하에 있다는 프로이트의 주장과 고스란히 맥을 같이한다. 이를 전해 들은 C.S 루이스는 자신의 신념과 철저히 어긋나는 그의 발언에 주변 사람들은 알고 있냐는 말과 함께 이기심 때문에게 가족들에게 상처를 줄 것이냐고 통렬히 지적한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사정은 사뭇 심각하다. 

 

수차례 입 안을 수술함으로써 입천장이 닳아 없어진 그는 스스로 괴물이라 일컫는 보철판을 입안에 달고 남은 여생을 산다. 그로 인해 C.S 루이스와의 논쟁 과정에서 흥분하는 순간 보철판에 의해 긁힌 상처로부터 파생된 한 움큼의 피를 토한다. 노쇠한 기운을 극복하지 못한 채 점차 피를 토하는 과정이 잦아들던 프로이트는 C.S 루이스와의 대화가 극에 달하는 순간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피를 마구 토한다. 쓰린 고통에 몸부림치던 프로이트는 주치의가 없는 상황으로 인해 C.S 루이스에게 보철판을 제거해달라고 부탁한다. 어색한 손짓으로 그의 보철판을 입안에서 빼낸 C.S 루이스는 상상할 수 없는 프로이트의 고통을 미약하게나마 곁에서 체험한다. 그럼에도 자살은 명백히 잘못되었다는 C.S 루이스의 주장도 옳지만, 과연 죽는 그 순간까지 평온하지 못한 여생을 보내야 하는 프로이트의 입장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신의 존재 만큼이나 자신의 생명권과 관련한 작품의 심도 깊은 시선은 끝내 명확히 답을 내리지 않는다. 상술했듯이, <라스트 세션>의 종착지는 정답이 아닌 또 다른 질문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구와 감각을 토대로 신의 존재를 현실 지향적 시선에서 냉철하게 바라본 프로이트의 주장은 누구나 한 번쯤 공감할 수 밖에 없는 포인트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와 반대 선상에서 인간의 이성이 추구할 수 있는 최대치의 윤리 의식와 절실한 신앙심이 절묘하게 합치된 C.S 루이스의 식견은 오늘날 유신론의 기틀을 마련할 만큼 단단한 체계들로 구성되있다. 두 남자의 상이한 주장은 치열하게 대립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텍스트를 쏟아내며 가파른 호흡으로 관객의 이목을 잠시도 내버려두지 않는다. 빠른 템포로 전개되는 가운데 두 남자의 공통분모로서 라디오를 통해 급박하게 흘러가는 전시 상황이 소개되는 순간은 작품 내 몇 안되는 쉼표로 작용한다. 그렇게 몇 번의 쉼표가 지나가고 나서 두 남자의 설전이 클라이막스를 치닫는 순간 그들이 도착한 곳은 결국 현실이라는 원점이다. 

 

세기의 난제를 놓고서 벌어진 심도 깊은 대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아무런 결말도 없이 끝이 난다. 거센 폭풍우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것 마냥 두 남자의 대화는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든다. 순간의 정적이 흐른 끝에 이를 깨트린  C.S 루이스의 마지막 한 마디는 귀결되지 못한 대화의 마무리가 유발하는 허무함을 증폭시킨다, "우리가 무슨 생각으로 정답을 구할 생각을 했을까 싶네요" 저마다의 논리로 중무장한 두 남자의 논쟁은 끝내 핵심에 도달 할 수 없다는 선천적 결함과 서로의 나약함을 부정하지 못한채 귀결된다. 그럼에도, 프로이트와 C.S 루이스의 논거들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건 두 남자를 한 공간에 모이게 한 질문 자체의 유효함이다. 

 

쉽게 귀결될 수 없는 사안임에도 신의 존재를 둘러싼 다채로운 시각들이 지속해서 등장하고 있다. 무엇하나 예측하기 힘든 삶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거론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자, 거센 삶의 흐름으로부터 양심과 신념을 의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대지진이 발생하던 중세 시대에도 그랬고, 산업혁명이 휩쓴 근대에도 그러했으며, 메타버스가 거론되고 있는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내며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술이 발달된 현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발생 중인 불가해한 재난들을 기점으로 증폭된다. 명확한 해답으로 귀결되지 않는 단 하나의 물음은 발전을 거듭하는 와중에도 인류의 이성으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건들이 발생하는 오늘날에도 유의미하다. 확인할 길이 전무한 신의 존재는 온전히 파악하기 어려운 삶의 형이상학적 측면을 분석하는 과정과 같은 궤적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두 남자의 토론 주제는 현재까지도 절실히 필요한 질문이다. 

 

<라스트 세션>은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공백을 향해서 그럼에도 접근하려는 사람들의 무한한 호기심을 프로이트와 C.S 루이스를 통해 대변한다. 설령, 그것이 원점으로 돌아온다 할지라도, 접근이라는 시도 자체의 과정은 또 다른 올바른 질문을 위한 교두보의 다름이 아니다. 정답이 무엇인가가 아닌, 어떤 질문을 하냐는 고민에서 두 남자의 설전은 비로소 빛을 발휘한다. 희망으로부터 어떤 격려를 얻을 수 있는지, 아니면 절망으로부터 무슨 해답을 얻을 수 있는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답을 얻기 위해선 반드시 상의해야만 한다. 과정없는 결과는 도출될 수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에 입각했을 때 우리의 눈 앞은 더욱 명확해진다. 

 

그렇게 무대를 나서는 순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 다시 제기된다.

 

 

 

김현준_컬쳐.jpg

 

 

[김현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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