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무감 無感

글 입력 2021.12.13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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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글에 대한 아주 짙은 선입견 하나가 있다. 지금 행복한 자는 글을 쓰지도, 읽지도 않으리라는 믿음. 여러분께서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여태 글 쓰는 내내 내게 자리해 있던 신념이다. 그러니 요즘 내가 퍽 괜찮은가보다. 글 쓰러 나온 카페에서, 30분이 넘도록 말간 백지를 응시하고 있자니 스을 지루함이 찾는다. 심장에서부터 힘차게 뿜어져 나오던 그 튼튼한 실오라기들, 태어나려고 하는 그 많은 언어들, 그것을 직조하는 나의 손이야 그 얼마나 조악했건, 참으로 무궁한 그 실타래를 나는 그저 엮으면 그만이었다. 그것이 내겐 그저 글이었고, 에세이이자 오피니언이 되어주었으며, 간혹 리뷰의 형태로 화하기도 하였다. 아직도 심저에서 아무런 글의 조짐도 보이지 않으니, 아무래도 나는 행복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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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행복한 자는 글을 쓰지 못한다.` 내게 이런 편향된 선입견이 자리한 까닭이야 말해 무엇할까. 그러나 지루할 정도로 충분히,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내게 질문해보자. 나는 행복한가, 묻노라면 글쎄. 이런 질문 하나를 써보곤 이내 지운다. 그 질문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눈은 그저 무색하였음에.

 

지난 오피니언에 쓰기를, 점점 무감해져 가는 나를 끄집어내기 위하여 나는 이곳에 돌아왔다. 무감 無感. 그러고 보면 한때는 그것을 꿈꾸기도 했더랬다. 스스로와 투쟁하던 시절에는 가끔 지치어, 부디 무감한 이가 되어 조용히, 동그마한 하루를 보내고 싶다는 소망을 가졌더랬다. 조용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고, 고요한 눈으로 세상을 가만 바라보고 싶었더랬다. 내게 내가 너무 버겁던 시절에 꿈꾸어 본 지금. 나는 행복한가 물어보면, 고요하기만 한 눈으로 그 질문을 바라보곤 이내 지운다.

 

수없이 많은 꿈이 있었다. 내게는 별이 너무 많았고, 별은 아스라이 먼 곳에서 가리어진 채로 나를 불렀다. 영원히 닿을 수 없을 듯 그곳을 나는 바라만 보며, 애타는 마음들로 매일을 떠나보냈다. 시간을 떠나보냄으로써 나는 아주 티끌만큼씩 약속된 미래로 가까워지고 있노라 믿었다. 애타는 그 마음으로. 흰 바람벽에 어리는 모든 행복한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과 사랑스러운 환영들은 언제일지 모를 미래로 하염없이 미루어두고는 그것을 향해 이끌리듯 시절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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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찬미 없이 사랑하고, 아무런 걱정 없이 텃밭과 아이들을 일구는 나의 모습. 의심 없이 등을 기대어, 조용히 꿈꿀만한 누군가의 품과 그 위에 안기어 짓는 나의 표정과 번영하는 과수원. 익어 떨어지는 홍옥. 무엇도 끊을 수 없는 신뢰로 빛나는 두 눈빛과 신념이 깃든 눈썹, 그리고 적막한 겨울밤을 밝히는 작은 등대 하나를 가지고 싶었다.

 

그것들은 당장 가질 수 없었음에, 언젠가는 하는 마음으로 계속 유보되었다. 그리고 이렇듯 갈망하는 나의 모습을 두어 생 生이라 이름 짓고, 언제까지고 너끈히 기다려주겠노라 의기양양이 내게 으름장도 놓았더랬다.

 

별과 애타는 마음, 환영과 갈증으로 지나 보낸 청춘이다. 견디고 기다리기만 하는 삶, 세상이 이렇게 쉽게 아름다운 것들을 내게 줄 리 만무하다는 믿음으로 살았다. 누군가는 내게, 너무 낭만적이라고도 하였다. 있을 수 없는 행복을 꿈꾸고 있다 하였다. 다칠 나를 지레 걱정해주었다. 점점 흰 바람벽에 매몰되어가는 나를 두고 혀를 차기도 하였다. "삶을 살어"라고. 왜 모를까, 그들의 눈에 비치는 내 모습, 그 감정들을. 이미 충분히 살아낸 사람들은 우습다 하였고, 이제 충분히 살아갈 사람들은 내게 헛되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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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바람이 그쳤다. 언제나 나를 괴롭히던 바람이 불면, 흰 벽에는 갖가지 아름다운 환영이 떠오른다. 성냥 하나에 한 가지씩의 소망을 그리어보듯. 지금, 겨울바람에는 날이 서 있어 나로 하여금 따스운 방과 붕어빵 한 봉투를 꿈꾸게 하듯. 아픈 바람이 등을 떠밀면, 어디로든 갈 곳이 떠오른다.

 

그리고 바람이 그쳤다. 구름에 별은 가리인다. 나는 이것이 무언지를 다 모르겠다. 내 꿈은 거기 그대로인데, 나는 무감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무색하니 고요한 눈빛으로, 고요하기만 한 눈빛으로 세상을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하염없이 바라만 보는 것이다, 기다림도 없이. 그러므로 나는 관망 혹은 방관하고 있는 것이다. 기다림도, 갈망도 않는 나의 매일을, 이 삶을 두어 무어라 불러주어야 할지를 다 모르겠다.

 

고요했다. 그것은 내게 두려움을 준다. 완전히 새하얀 것의 앞에 서서 느끼는 막대한 두려움 같은 것. 마음을 밀고 당기는 조류가 사라지니 움직임이 멎고, 본디 실체가 없는 그것에 감각마저 사라지니, 존재가 흐려진다. 언제나 눈감으면 보이던 검은 바다가 사라졌다. 그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나의 초상이 따라 사라져 있다. 망막에 드리운 낭만과 신기루의 필터는 걷히고, 세상은 놀라우리만치 딱딱한 모습으로 변모했다. 무채색의 감각. 돌담에 어린 햇발 위로는 이끼가 말라 죽어 있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요즘 들어 괜찮아 보인다고 말해왔다. 더 이상 예민하지 않았고, 무던하니 듣고 멀거니 바라보다간, 그려~ 한마디 뱉곤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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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거기 그대로 있는데, 어느새 갈망하지 않았다. 욕망하지 않고, 갖지 못해 허덕이거나 괴로워하지도 않고, 그를 인내하며 기다리지도 않고, 즉 나는 가만히 있었다. 유인, 미끼가 사라지니 나는 깊은 바다 모래밭에 누워 꿈꾸지 않는 광어같이 있었다. 색깔이 지워지고 점차 모래에 닮아가고 있었다. 꿈꾸지 않는다. 꾸던 꿈은 이제 불가하게 여겨진다. 숱하게 들어온 그들의 이야기가 이제 뇌리에 미친다.

 

만나온 수없이 많은 그들, 색깔 없는 그들이 곧 내 초상이 되고, 얼굴 없는 내 사랑의 실루엣이 된다. 그저 시시한 사람들, 가질 수 있는 것만을 꿈꾸어보다간 이내 그만두고, 느껴지는 것만을 느끼며, 되는대로 생각하고 곧 잊어버림으로써 서로 닮고 닳아진 대열에 내 자리가 마련된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되고, 새로운 것은 괜스런 것이 되는 곳에서….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농담들, 겨울밤 하늘 위로 입김과 함께 흩어져서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지루한 언어들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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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하다. 나이는 차고,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을 따라잡기도 버겁고, 삶은 어제와 같으며, 꿈은 완전히 닿을 수 없는 광년으로 밀려 나갔다. 연말은 그럭저럭 외롭고, 대충 일에 치여 지나가는 것으로 족하다. 무엇을 포기했더라면, 마지못한 미련과 흔적이라도 남아 있겠거늘, 나는 포기도 못 하고 잃어버렸다.

 

그래서 아프지 않았다. 나는 아플 기회와 권리를 잃어버렸다. 불행하지도 않지만 참으로 무감히, 서글퍼진다. 내 청춘이 정말로 끝난 것만 같아 계속 뒤를 돌아다보며 마지못하다. 얼마든지 꿈꾸고 기꺼이 아파하고도 간절히 기다리는 이 모든 모습, 그것이 나의 청춘이었다. 나는 정말로, 정말로 내 청춘이 끝났을까 서글프다. 이렇게 소리 없이 가버릴 줄을, 꿈에도 몰랐기에.

 

이제 오래전 한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마음에 아무런 사랑도, 갈망도, 갈증도 없이 고요한 그놈의 말. 그는 마음껏 흔들리고 고통받는 나를 두고 부럽노라는 딱딱한 한 마디를 남기곤 로스쿨로 떠나버렸다. 또 내 늙은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꿈꾸지 않고, 지난 시절들을 씹으며 자꾸 텁텁하다고만 하시는 당신이. 나는 잔불을 뒤적이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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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오랜 선입견을 다시 쓴다.

 

지금 꿈꾸지 않는 사람은 글을 쓰지도, 읽지도 않으리라고. 내 꾸던 꿈은 먼 광년으로 밀려 나아갔고, 별의 인력이 불러일으키는 바람이 그친다. 나는 현실적인 사람으로 퇴화하고 있다. 잔불을 뒤적이는 마음으로 글을 늘어뜨린다. 억지 꿈을 꾸어서라도, 가려는 청춘을 미련했다.


 

[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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